편찬 8년 만에 8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총 4389명의 친일행위자들이 기록됐다. 이는 앞서 최종 명단에 올랐던 4776명에서 387명이 줄어든 숫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수록 기준에는 해당하지만 정보가 부족해 추가 조사가 필요한 경우 ▲국적이 조선인이지만 확증하기 어려운 해외 활동자 ▲이의신청 중 일부 수용해 사실 확인 중인 경우로, 보유편(補遺篇) 발간 때 수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완전히 제외된 경우는 고(故) 신현확 전 국무총리와 최근우(1897∼1961년) 전 사회당 창당준비위원장, 일본 육사 27기 출신 이동훈씨로 총 3건.
민족문제연구소는 "신 전 국무총리는 일제 말기 근무지를 이탈해 고등관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최 전 사회당 창당준비위원장은 독립운동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한 만주국 이사관 최근우씨와 동일인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또 "이동훈씨는 일본 육사 27기로 소위 출신이지만 3.1운동 때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상해 망명을 준비하다 사망한 사실이 확인돼 제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논란의 대상이 됐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면 전 국무총리,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경남일보 주필 장지연, 음악가 안익태·홍난파, 무용가 최승희, 시인 서정주 등 유력 인사들의 이름은 그대로 수록됐다.
박정희·김성수·장면 등 사전에 등재된 '정치인'... 독립운동 유공자도 포함돼
*'친일인명사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 받았으며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기록한 내용을 시민들이 살펴보고 있다.*
사전에 등재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앞서 보도된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이 주요하게 실렸다.
사전에는 "(박 전 대통령이)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일차 탈락하고 재차 응모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硏?>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됐다"고 명시됐다.
또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임관한 후 활동한 8단에 대해 "엔지에서 조직된 9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를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며 그 성격을 분명히 했다.
장면 전 국무총리의 경우, 일제강점기하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로 활동한 경력이 친일 행적으로 꼽혔다.
이 단체는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한 단체이다. 또 장 전 총리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 축하회 발기인(천주교측 대표)으로 참여해 1만 회가 넘는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 사장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주인 김성수 전 부통령도 친일행위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1943년 8월 5일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내용의 장병격려문을 기고해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해 11월 6일에는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실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조계종 종무총장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욱 전 의원도 일제 강점하 총본산 암사에 창씨개명 상담소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라"는 통첩을 전국 사찰에 보낸 자료가 발견돼 친일 인사로 규정됐다. 이 전 의원 역시 지난 1977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돼 현재 그의 사리 일부가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특히 김성수 전 부통령, 이종욱 전 의원이 앞서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된 서훈자들인 사실이 주목된다. 연구소 측은 "친일 행적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해 총 20명의 독립운동 유공자가 사전에 등재됐다"며 "잘못된 서훈이 발생한 원인은 체계적인 근대 인물정보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해당 인사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소는 이어, "정부 당국의 적절한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이 서훈 심사의 검증 절차에 다소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홍난파,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본분 다하겠다"... 친일 문화예술·지식인 다수 등재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도 다수 사전에 등재됐다. 연구소는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설명했다.
'시일야 방성대곡' 사설로 독립유공자로 분류된 경남일보 장지연 주필의 경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700여 편의 글을 싣고 1916년 12월 10일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를 싣기도 했다. 이 하세가와 총독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후 설치된 통감대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울 밑에선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는 1937년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 있는 필자는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금후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고 밝히는 등 '변절'했다.
현상윤 고려대 총장은 지난 1942년 '춘추' 11월 호에 "정신에 있어서는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토대로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는 글을 기고하고 1942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를 역설해 '친일행위자'로 사전에 등재되게 됐다.
동포를 살해·체포하는 등 일부 인사들의 노골적인 '친일 행위'도 소개됐다.
독립운동가였던 김동한은 1925년 친일인사로 전향해 항일세력 파괴와 1934년 특수공작대를 설립해 항일부대원을 살해·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1937년 항일군과 교전 중 사망했는데 일본은 그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총독부 사무관, 군수, 만주국 이사관 등을 지낸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사무관 겸 독찰관으로 근무 중 항일무장독립군 700여 명을 귀순시키고 1942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중국 동만지구 일대에서 활약하던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숙청공작을 추진해 수백여 명의 항일무장독립군을 체포해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역시 만주국 참사관 및 일본군 소좌로 활동한 윤상필은 만주일대의 항일세력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통제하기 위한 단체인 '간도협조회' 창설안을 입안해 실행시켜 만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장을 받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다.
조선총독부에서 순사로 근무한 김덕기 역시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등 두각을 드러내 조선총독이 주는 당시 경찰 최고 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고 기록됐다.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도 사전 등재... "형평성 잃었다는 주장 사실 아냐"
한편, 연구소 측은 일각에서 "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 관대하다" 는 등 사전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해 "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 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사전에는 보수언론과 일부 수구단체가 사전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지적하던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인 신상묵도 등재됐다. 신상묵은 헌병 군조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연구소는 이어,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도 사전에 수록돼 있다"며 실제로 월북 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등을 맡은 신고송을 비롯한 39명의 월북 인사들을 따로 소개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또 "국가가 외면한 미해결의 과제를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역사정의 실현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성과"라며 "한국 근·현대사 금기의 영역이 최초로 공개됨으로써 최근 만연되고 있는 퇴행적 역사인식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사전 발간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출처 : '혈서지원' 박정희, '사상전향' 홍난파 등 4389명 실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