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살해가 쿠데타, 12.12 진실 바로 세워야"

7423946 작성일 09.12.12 15: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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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으로 사건은 시작됐다. 지난 1979년 12월 12일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합수부) 수사관들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은 다음날 아침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숨가쁜 상황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수경사 30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등과 참모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격돌은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았다.

결국 사태는 나중에 신군부로 불린 전두환 사령관 측의 승리로 마감됐다. 이 당시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 12.12 사건의 진상은 1995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 뒤집힌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 자리를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옮겨 앉는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일까.

12.12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 의미를 두고 ‘신군부의 정권 찬탈 기도’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쿠데타가 아닌 정당한 수사권 행사였다”는 평가도 있다. 문민정부 이후 12.12사건은 대부분 ‘신군부의 반란’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같은 평가 역시 ‘승자의 시선에서 본 기록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뉴데일리는 30년 전 12.12사건의 주역이었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과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감사를 만났다. 이들은 이야기한다.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뉴데일리는 이들에게 들은 그대로를 3회로 나눠 연재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뉴데일리

12.12의 발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숨진 ‘10.26’이다. 지금은 공원이 된 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가수 심수봉, 당시 대학생이던 신재순과 만찬 중 저격당한다. 문제는 이 안가의 바로 옆 동에 김재규의 초대를 받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0.26 발발 후 직제에 따라 정승화 육참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수부장이 된다.

“발화점은 대통령 시해 현장이 있던 사람이 계엄사령관이었다는 것입니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은 시해 동조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을 막강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5층 건물 1층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그 건물 모두를 조사하지 않습니까? 정 총장은 불과 현장에서 수십 m 거리에서 범인의 초청으로 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권총이며 M16 등 총성도 아주 가까이 들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범의 혐의를 벗기가 쉽지 않죠.”

합수부의 조사는 막강한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정승화 사령관은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우선 신분 격차가 너무 심하니 조사에 제약이 많았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회고다. “정 총장은 수시로 수사기록을 보여 달라고 하고 마음대로 고치거나 빼거나 써넣곤 했습니다. 이걸 제대로 된 수사라고 할 수 없지요.” 허 이사장은 정 총장이 연행되기 전이나 1995년 12.12 주역들을 고발할 때의 얘기나 자서전에서 쓴 얘기가 모두 각각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 총장은 일관되게, 또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허 이사장은 한 예를 들었다. “정 총장은 합수부 수사관이 ‘김재규가 어디서 박 대통령과 식사를 했느냐’고 묻자 청와대 본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총소리 역시 자하문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다고 주장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한 뒤 험한 몰골로 정 총장에게 왔습니다. 총소리가 나고 얼마 안 지나서인데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는 경호 때문에 시해 자체가 불가능하고, 시해를 했더라도 청와대에 가득한 경호원들이 김재규를 그냥 궁정동으로 가도록 두었겠습니까.” 허 이사장은 “6.25를 겪은 4성 장군이 20여m 떨어진 곳에서 난 총소리를 먼 거리의 자하문에서 난 곳으로 알았다면 차라리 코미디”라고 웃었다.

12·12를 승리로 이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5명의 보안사 핵심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수사국장, 허화평비서실장, 장도영보안처장, 전사령관, 권정달정보처장, 허삼수인사처장. ⓒ 자료사진

정승화는 김재규가 추천해 총장된 사람

정 총장은 합수부의 수사에서 계속 “김재규와 잘 모르는 사이다. 도움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 총장은 김재규가 추천해 참모총장이 된 사람입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자신의 동기인 육사 3기 박희동 장군을 밀었어요. 박 대통령에게 ‘인사 적체 해소’를 내세워 육사 5기인 정 총장을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입니다.”

허 이사장은 수사관으로서 도저히 정 총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전두환 사령관이 자신을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로 전출을 보내려 하자 반발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그는 “전 사령관의 동경사 전출을 정 총장이 노 장관에게 건의했지만 노 장관은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일하게 하라”고 말했고 전 사령관도 12.12 이후에 그 얘기를 노 장관에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0.26의 밤, 육본 벙커에서의 정 총장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유고일 땐 당연히 전방 등의 상황을 점검하고 해당 조치를 해야 합니다. 당연히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주한미군사령관에게도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날 정 총장은 김재규와 상의해 병력을 보고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공범 혹은 동조 의심을 받을만한 것이죠.”

나중에 문제가 된 최규하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의 재가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말이다. “합수본부장은 장성을 조사하거나 연행할 때 관례적으로 국방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만 재가를 얻지는 않습니다. 12.12의 밤에 최 대통령에게 간 것은 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복궁 30단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군에 어두운 최 대통령의 이해와 설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허 이사장은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같은 군 사정으로 오해가 많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재규-김계원-정승화의 사태장악, 얼마든지 궁정쿠데타할 상황

기사본문 이미지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비서실장이 12.12 및 5.18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기 위해 1995년 12월 10일 서울지검으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허 이사장은 10.26의 세 주역의 지위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정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지철이 없는 청와대를, 정 총장은 군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세 사람의 묵계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셋이면 얼마든지 궁정 쿠데타가 가능한 상황 아닙니까?”

그는 “물증이 없고 정황 근거만 있는 속에서 수사진은 정 총장의 끝없는 모호한 태도에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12.12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995년 문민정부의 12.12 재심의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좌파가 엄청난 승리를 한 것이 당시의 재심의”라고 평가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공권력을 단죄하게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반공의 큰 축을 여지없이 뽑아 버린 일이었다는 것이다.

주객을 전도 시킨 문민정부 재판

조영환 올인코리아 대표는 “12.12사건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재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12.12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쿠데타를 일으킨 김재규와 그 일당을 제대로 수사한 전두환의 합수부가 쿠데타 세력으로 후에 김영삼 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규정된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법적 하자를 재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12.12사건 관련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급조한 특별법이 헌법 제 13조의 형벌불소급, 일사부재리, 소급입법제한 등을 위반한 점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1980년 광주 사태 주역과 2008년 광우병 사태 주축세력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12.12사건을 쿠데타로 몰아간 민주화세력의 진짜 정체를 환갑이 지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허 이사장은 “좀 더 기다릴 것이다. 때가 되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겠다”고 별렀다.

 

씁쓸하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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