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근대적 수탈 소동을 보면서...........

NEOKIDS 작성일 10.12.07 0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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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내용이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서 파생된 것 같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적 수탈, 즉 일본의 수탈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라는 것이 뼈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 뼈대에 대해서는 다른 말로, 이영훈 교수는 일본의 수탈 부분이 일반적인 이야기들과 달리 전근대적 수탈이 아닌 근대적

 

수탈이었다, 요것만을 주장했을 뿐 위와 같은 논리가 아니었다고 강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새삼스레 그것들에 대한 논란들을 찾아보다가, 이런 부분들도 발견하게 되었죠.

 

나름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겠습니다만,

 

이 댓글은 나름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에 대한 일종의 단초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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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론이 왔다갔다 하지 않으려면, 근대적인 수탈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식민지 조선의 미곡 생산량을 보면,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이앙기에 엄청난 한발이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괄목할만한 생   산량증가를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일본이 쌀을 빼앗아 갔다는 늬앙스가 틀렸다는 이영훈 교수의 입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비   싼 값에 물건을 파는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니까요.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자, 여기까지가 이영훈 교수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문제라고 보는 부분은 이영훈 교수가 진정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조선지배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나온 결과라   고 본다면, 그래서 그 결과물이 근대적인 수탈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몇가지 부분들의 밀도가 의도   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가 말하는 본론과 자신이 마무리 짓는 결론이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다는 거죠.

제가 만약 이영훈 교수고, 진정으로 식민지적 수탈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을 추가할 것입니다.

- 미곡생산량의 증가 부분: 
  1930년의 미곡 생산량 수치를 보면, 약 8% 가량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인당 소득에서 조선인에 비해   11배 가량 높아진 조선 거주 일본인의 일인당 소득 수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인당 소득 통계를 보여주지 않고, 미곡 생산   량 수치만을 통계적으로 보여주면, 독자가 생산량 증가를 주요한 논점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후반부에 식민   지 수탈이었다고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죠.
  일인당 소득을 보면 증가된 미곡 생산량이 누구 입으로 들어 갔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경제는 근대화 되었지만,   조선인경제는 결코 근대화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쌀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도 이영훈 교수는 쌀을 자본주의적으로 거래 함으로서 수탈의 성격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이 빠집니다.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적 거래 였냐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자본주의   적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일본 제일은행의 조선 금융 지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1897년 일본의 금본위제 화폐개혁으로 조선으로의 일본 화폐 공급이 두절 됩니다. 이로 인해 조선 거주 일본 상인들의 돈 굴   리기가 지장을 받게 되면서 일본 제일은행은 남의 나라에서 독자적인 화폐발행을 시행합니다. 조선정부와 민중은 반대했지   만, 때마침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체제로 들어가게 되고, 화폐발행주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때 부터 황당한 화폐정리사업이 시작되는데, 바로 화폐상태에 따라서 갑(甲),을(乙),병(丙) 으로 나누고 병(丙) 상태의 화   폐는 교환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 그 골자 입니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이 화폐정리사업이 제정   되고, 공포 되고, 실시 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은 9일입니다. 법이 공포되고 실시 되는데 까지는 단 3일이 걸렸습니다. ^^
  이후, 조선인들의 줄 도산->야반도주, 음독자살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농촌 경제 붕괴로 농민들이 노동시장으로 방출되는   결과를 낳게 되죠.

이영훈 교수의 주장대로 자본주의적 거래가 미곡 수탈방식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분명히 추가되어야 할 부분   이 있습니다.
'조선인들의 화폐를 말 그대로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시작' 한 자본주의적 거래였다는 것 입니다.

적어도 식민지시대의 경제학적 관점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그리고 자신이 기본 역사학자들과 달리 거짓말하지 않는 숫자로 F   ACT를 분석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학자라면, 이영훈 교수의 논점은 그리 치밀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논지의 날카   로움을 위해 보편적 근대화라는 큰 부분은 제외시키고 자본주의 근대화에 집중한다는 점을 본다면 더더욱 허술하다고 봐야하   죠.
   저는 이영훈 교수가 진정으로 자신이 가지는 식민지 근대화이론의 진정성을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다면, 많은 부분을 추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계수치가 비교적 많이 나온 미곡 수탈 부분만 봐도 이렇습니다. 조선 이념을 지배했던 성리학 같은 부분에서 경제학이 전공   인 이영훈 교수의 위치는, 기존 역사학자에 비해, 그리 설득력 있는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본주의맹아론은 설   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근데 일본이 조선의 자체적 자본주의 성장을 억제, 파괴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떡잎이 자라지도 않았는데, "떡잎이 자랐을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그 떡잎은 말라 죽을 운명이었다!" 다고 토론하는건 알파   와 오메가인 윗동네 사는 예씨성을 가진 사람하고 토론하기 알맞은 주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할 것은 떡잎이 자라기   도 전에 흙을 파해치고, 사쿠라를 심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의겠죠. :)       (이 부분에 대한 네모키즈가 추측하는 부분:   이영훈의 근대론적 수탈에서 토지정리사업이 한국에 도움이 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   그 직전 조선시대에도 토지정리를 시작하고 스스로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라는 부분으로   응수했던 데 대한 이야기인듯)

출처(ref.) : The Acro - 메인게시판 - 이영훈 교수를 위한 변호 - http://theacro.com/zbxe/?mid=main&page=7&document_srl=280379&sort_index=voted_count&order_type=desc
by 시닉스 에 대한 덧글 중

 

 

 

 

 

 

 

먼저, 이영훈 교수의 방식이 일본 교수에게서 사사받은 철저한 사료주의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영훈 교수의 주장들에 대해 이 댓글들이 지적하는 바를 본다면

 

이런 결론이 도출되지 않나요?

 

 

"사료주의는 사료 이면을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나, 이영훈 교수의 영역이 경제사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성리학의 면까지 왜 이영훈 교수가 들먹였는지도 신기하구요.

 

 

 

그것을 너네집님의 주장에서 내놓은 식민지 당시 조선인 지원병 통계와 비교한다면 더욱 이 결론은 확고해지지 않을까요.

 

너네집 님은 통계자료를 내놓으면서 이것이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 식민체계에 다가가려 했던 증거이며,

 

따라서 일본 식민체계에서 친일은 자발적인 민중논리였으며 고로 친일파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 논지라면,

 

 

그 논지는 강만길 교수의 주장인

 

지원병의 증가추세는 결과적으로 징병될 것임을 감지한 조선인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라는 해석과 상충하게 되죠.

 

창씨개명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자발적 선택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일단으로는 배급까지 끊는 상황으로 몰아넣으며 창씨개명을 강제한 부분도 주장하고 있거든요.

 

 

 

즉, 단순히 사료 데이터들만을 놓고 역사적 해석을 완결지을 수는 없다고 보는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박정희의 경우가 그러한데, 단순 경제학 사료적 데이터만으로 따지면 그는 만인의 우상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의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부분을 놓고 보면 그러한 해석만이 가능할까요.

 

심지어는 히틀러도 이와 같은 해석상의 판단을 가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히틀러 집권시절에는 어느 군사, 경제 등등에서도 역사상 유래없는 발전을 이루어냈죠.

 

하지만 히틀러가 그렇게 해석되던가요.

 

 

사실의 역사적 해석이란 결국 단순한 기록과 데이터 만이 아닌 여러 부분의 어떤 지점들을 끌어와서 보느냐에 따라

 

그 충분성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일테고,

 

 

그래서, 사학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고 지난한 길인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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