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호. 재미있는 떡밥 하나를 물어왔다. 며칠사이 짱공 정경사에 재미난 글이 없어 심심하던 찰나였으니
많은 과객들이 흥미를 느낄만하다 싶다. 물론 몇몇은 나와 그 이상한 사람과의 진지한 토론을 기대한다고 했으나
난 그럴생각이 없다. 본인의 말을 본인이 말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토론을 하라고 하는 것은
참여자 뿐만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곤욕이기 때문이다. 난 사서 고생하는 짓은 하지 않는 주의다.
그래서 그 떡밥은 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얻을것은 내가 장담컴데 없다. 쉰 떡밥 물어봐야 배만 아프다.
여튼 돌아가서 내 룰은 이거다. 반말과 파괴가 원칙이다. 왜 굳이 높임말을 안쓰려고 하느냐. 이건 초반에 있었던 실험의 영향이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논리를 더 명확히 파악하고 감정을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반말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질적인 입장에서 한 논의를 향해 달려드는 편이 훨씬 깔끔하다. 서로를 배려한답시고 말을 돌려가며, 없는 경의따위를 표할 필요는 없지않는가. 그건 시간낭비다. 우리. 레알 진퉁을 보도록 하자. 그래서 난 계속 말을 깔것이다. 고깝게 듣지는 말자. 너네도 파괴해라.
자. 이제 본격적인 논의로 돌아가보자.
내가 어디서 이 떡밥을 물어왔느냐 하면 다음 글이다.
별거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업화가 있어야 민주화가 가능했고
이로인해서 우리가 민주화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독재였다. 는 이야기다.
보수주의자 다운 역설이다.
아래 글은 내가 쓸모없는 사진과 불필요한 이야기를 좀 제거한 글이다. 한번 읽어봐라.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오해
세 번째 강좌에서는 우리나라 산업화와 민주화에 관한 이야기로서 현재수준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의 토대는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강사로 나선 연세대학교 김세중 교수는 story K의 하반기 강좌 '2040세대의 네가지 오해'라는 주제와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오해'를 주제로 잡은 것은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말로 운을 뗐다. 우리가 그동안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산업화가 민주화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권위주의정부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 예로 반일감정이 전사회적으로 팽배해 있을 때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밀어붙여서 배상금을 받아냈다. 민주주의정부라면 여론을 의식해 다 같이 나눠먹고 끝났을 지도 모르는 돈을 포항제철 같은 굴지의 기업을 일으키는데 종잣돈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또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르다고 공식천명할 정도로 민주주의의 도입에 대해 머뭇거렸지만 그렇게 노동과 금융을 통제했던 것은 일면 효율적인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산업화는 민주화의 토대
김 교수는 우리가 역사를 볼 때 한 가지 측면만이 그 시대의 전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부가 권위주의 정부였던 것은 맞지만 그로인해 산업화를 이뤘고 중산층을 양산해 1987년 민주화를 촉발시켰다. 결국 산업화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이루는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강의에 참여한 학생들은 최소한의 권위주의라고 하기엔 너무 강한 정권 아니었냐는 질문과 이전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차용한 것 아니냐는 질문 등을 던졌다. 김 교수는 원래 공부 못하는 학생도 계획은 거창하게 많이 세운다며 재치있게 답변했다. 추운날씨임에도 강의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은 예정시간을 초과해 질문했고 강의 후 비어타임에서 김 교수는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다음은 11월 24일 진행된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후후발 산업화국가
한국의 산업화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는 산업화를 가장먼저 이룬 early commer라고 한다.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late commer로 볼수있다 그런면에서 한국은 late late commer 정도된다.
박정희대통령의 18년 집권으로 한국의 산업화가 확고하게 제 궤도에 올라온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문제지만 뿐만아니라 한국의 산업화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사적으로서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인류문명은 영국산업혁명이후 인간이 인간답게 먹고사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산업화다. 대개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의 수명은 30세 내외였으나 산업화이후 인간수명이 비약적으로 길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산업화가 인간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 말기,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은 산지사방으로 퍼져 유랑걸식을 하던 처지였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516세력은 ‘조국근대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놓고 산업화를 절박한 과제로 보았다. 1960년대 초반 우리의 경제는 오늘날의 캄보디아나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했으며 당시 필리핀과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은 필리핀이 3배가량 더 잘 살았었다. 하지만 현재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한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는 안보와도 직결
또한 당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북한의 도발(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이승복사건 등)에 우리나라를 지켜야하는 심각한 안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도발도 문제지만 사회주의국가의 원조와 천리마운동 같은 혁명열기로 인해 북한의 경제는 한국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한국에 안보위협으로 작용했다. 안보문제는 국가의 존립문제다. 국가가 생존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개인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것과 같다.
박 대통령은 북한과의 경쟁상황에서 안보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제문제라고 봤다. 북한사회에 대한 동경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면 해소 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승만을 거쳐 419혁명 같은 민주주의 갈등으로 우왕좌왕했던 사이 북한이 경제에서 앞서나갔다. 이는 젊은이들을 북한을 동경하는 등 남한의 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국가의 과제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보와 먹여 살리는 문제도 함께 갖고 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정권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측면이 있지만 안보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데 공로가 있다.
박정희, 집권당시 한국에 민주주의는 이르다고 인식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정치제도중 가장 실천이 어려운 것이 민주주의정치제도다. 서구는 현재수준의 민주주의를 달성하기위해 300년의 넘는 갈등과 타협의 기간이 있었다는것을 감안해야한다. 게다가 한국은 몇십년 전 만해도 왕이 존재하던 군주사회에서 살았는데 짧은 기간에 개인들이 주권행사의 의미를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가지려면 중산층이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해야하며 민주주의 제도를 견고하게 다질 수 있다.
박정희대통령의 집권 18년은 진선진미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르다고 천명했었다. 그래서인지 계엄령도 몇차례했었고 국회의원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시각으로 인식해서는 안되고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야한다.
역사적으로 진선진미한 민주주의를 했던 나라는 별로없다. 비스마르크정부의 독일이나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던 일본도 권위주의를 거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중화학공업화는 권위주의정부에서 이룩한 경우가 많다.
산업화는 민주화의 필요조건
산업화와 민주화의 연관관계를 잘 볼필요 있다. 박정희정권이 좌익세력을 상당히 억압하고 노조활동을 막았는데 이는 싼 노동력을 제공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수있었던 부분이 있다. 또 권위주의를 활용해 강력한 금융통제를 함으로써 포항제철같은 기업에 집중투자를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세계굴지의 기업을 몇 개나 키웠다.
또 경제에서 외국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것도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였기에 가능했다. 일본과 국교수립 과정을 보면 알수있다. 전국민적 정서는 일본의 배상금을 받아 국교를 수립하면 또다시 식민지가 될수있으며 감정적으로 절대 안된다고 교수 학생 시민들이 모두 반대했으나 계엄령까지 선포해 관철시켰다. 결과적으로 배상금은 산업화를 위한 귀중한 종잣돈이 되었다.
권위주의 정부의 폐해와 비대해진 중앙정보부가 힘을 남용.
권위주의정부가 산업화를 이뤘고 그것이 중산층을 두텁게 만들고 교육수준을 끌어올려 결과적으로 민주화를 이루게 했다고 해서 방식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또 권력의 관성상 힘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힘을 남용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기업인을 사찰했던 중앙정보부의 경제파트와 학생사찰 등 개인의 인권이 많은 침해를 받았다.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더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지속시켰던 것도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유신체제라는 암(暗)이 있다면 우리나라 산업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온 중화학 공업화도 함께 이뤄졌다는 명(明)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세계최강의 중화학 공업국이 된 것은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권위주의 정부의 문제들을 인정 안하는 바는 아니지만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했던 측면, 안보적 상황, 역사적으로 산업화 없이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은 그 민주화를 공고하게 하지 못해 혼란이 커졌던 사례에서 산업화가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공고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
어떤 국가가 섰을때 민주주의만이 중요한 과제는 아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야한다. 그런데 일부는 민주 VS 비민주 대결구도로 세워서 민주주의에 어긋나면 독재로 치부하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적 민주주의관으로 한국역사를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공고화 하는것은 다른차원의 문제다. 어떤 나라가 민주주의를 강제로 이식해서 도입하든 엘리트사회 협약으로 민주주의도입하든 또는 그나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민주주의를 세웠든지 그것이 유지되고 발전하는데는 산업화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산업화는 전세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유토피아를 이뤘다는 의미는 아니嗤?적어도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명박을 비판해도 누가 잡아가지 않을 수준은 됐다.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는 있지만 우리 역사를 볼 때 민주주의는 발전해 왔고 산업화는 거기에 기여했으며 앞으로도 더 발전시켜야한다는 확고부동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한다.
참으로 쩌는 글이다. 명이 있으면 암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우리는 박정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마무리를 짓는다. 아주 도망가기의 명수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산간태우는 격이랄까. 그러나 수긍 할 만한 점은 있다. 분명 박정희시대에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박정희 시대였기 때문이었는지. 아지면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진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그것까지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면 이건 발제문이 아니라 레포트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 여튼 박정희가 집권하던 때에 발전이 있었다는것에는 모두 동의를 하는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난 거기서 다른 문제를 하나 더 들고오고 싶다. 왜냐. 난 이 보수주의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할만한 논리의 빈틈을 찾아보고 스스로 자기붕괴할 결과를 얻어내보고 싶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민족이다. 일제 야동을 보면서 정기를 뽑아내는 아해들이지만 한민족의 정기라고 한다면 '우리가 ㅅㅂ 남이가' 이라며 정신이 번득번득 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안보이니 친일이니 좌파니, 다 민족에서 출발하는거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업화가 민주화를 위한 발판이었다는 전제에서 조금 더 소급하여 우리는 일본제국강점기로 돌아가보자. 경제계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론적 대립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주의 맹아론 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 그럼 내가 왜 이걸 끌고 왔는가? 우선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설명을 하나 긁어와서 보여주겠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ilkroad1223&logNo=40127860542
복사가 안된다. 참고만 해라. 본 글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좀 더 지지하는 사람의 글인듯 하다. 딱 중딩에게 가르치는 정도 용으로 생각하라. 자본주의 맹아론의 맹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요약된 글이 있어 퍼온다.
#자본주의 맹아론 관련 최근 학계 논의 동향
1. 자본주의 맹아론의 형성과 기여점
1) 형성의 시원
① 우리나라: 1930년대 백남운-‘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창하지는 않았으나, ‘자본주의의 맹아형태’란 말을 사용(1933년). 자본주의 맹아의 단서가 되는 발상을 최초로 했다고 볼 수 있음.
② 중국: 여진우(1933년), <중국상고급중세기경제사강의>, ‘청대의 전반기에 이르러 봉건경제는 이미 몰락에 처하였고 사회자신의 돌발적인 과도기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는데 역사의 새로운 요소가 이미 형성과정에 있었다.’ 모택동은 이러한 신학설에 근거하여 1939년 중국봉건사회에서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자본주의맹아가 출현하였기 때문에, 외국제국주의의 영향이 없더라도 서서히 자본주의로 발전해갔을 것이라고 전망하게 되었다.
2) 1950년대 이후- 북한 학계 : 남한보다 일찍 자본주의 맹아 주장, 최병무, 전석담, 홍희유 등 일련의 논쟁을 거쳐 ‘자본주의적 관계’란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함.
3) 1960년대 이후 남한의 내재적 발전론(자본주의 맹아론) 등장
① 50년대 실학연구: 이우성 -‘실학은 근대정신의 내재적인 태반역할을 담당했던 것’
② 60년대 이기백-<국사신론>, 당파성론. 정체성론 등 본격 비판하면서 ‘동양사회도 모든 사회 인류사회가 밟아야 할 일정한 발전단계- 고대적. 봉건적. 근대적-를 반드시 거쳤으리라는 것이다.’주장.
③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 등장
*농업: 김용섭 - ‘경영형 부농론’, *상업: 강만길 - 사상, 도고
*수공업: 송찬식, 유원동, 김영호 등
※ 내재적 발전론의 같은 주장, 다른 기반의 두 입장
㉠사적유물론을 원용하여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세계사적 기본법칙으로 설명하며 자본주의 이후 단계까지 전망하는 변혁론.
㉡ 근대=자본주의사회를 역사발전의 궁극적 지향점을 설정하여 조선후기 근대의 싹을 찾으려는 근대주의의 입장
4) 내재적 발전론(자맹론)의 긍정적 평가
① 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주장하던 정체성론, 타율성론 극복 계기 마련
② 한국사를 특수성보다 보편성과 관련하여 살피는 계기 등
2.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론
1) 근대화론자(경제사학자)들의 비판 : 안병직, 안병태, 이영훈 등
① 안병직: 1975년<三.一運動>에서는 경제성장론과 식민지 근대화설, 식민지자본주의설을 비판하고 식민지반봉건사회경제론을 주장하여 경제사학계와 한국사학계에 강한 영향을 줌. 이후 86-87년 동경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돌아와 식민지근대화설로 전환하여 종래 옹호했던 견해를 비판. 95년 역사학대회에서 수탈과 개발론 주창, 경제발전론의 시각으로 한국근현대사를 고찰하자는 주장. 제자들의 정년기념논집: <한국경제성장사>
② 안병태: ㉠ 자본주의 맹아론이 ‘근대적 내지 근대지향적 요소만을 추출하여 부각하는 부조적 방법’이라고 비판. 구조적 파악을 제창
③ 이영훈: ㉠ 농촌공업이 실증된 적 없다.
㉡ 농민층 분해로 부농층 형성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소농적 집양농법이 발전하고 있었다.
㉢ (조선의) 시장경제는 자율적 영역이 아니며 그 자체가 국가적 재분배, 재정이거나 이를 보완하는 위치에 있었다.
③ 미국 한국학계의 비판: 한국학자들이 중국학으로부터 한국학을 독립시키기 위한 과제로 특수성 강조, 50.60년대 미국을 지배했던 동아시아 역사관 ‘전통/근대’이분법. 중국을 서구에 대비해 정체, 야만으로 파악.
2) 탈근대화론자들의 비판 - 90년대 이후 미국과 한국한계
①자본주의 맹아론이 ‘근대주의’ 입장에 선 것이라고 비판. - 특히 국문학계 쪽에서 더 거셈. 강명관, 조선후기 서구의 근대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중세의 발전된 모습을 찾아야 한다‘ 고미숙, - 중세와 근대의 단절 강조.
※ 자본주의맹아론의 폐기와 새 대안 모색 필요 주장 - 이헌창, <조선후기 자본주의맹아론과 그 대안>,2008, 한국사학사학보17집 참조.
① 자본주의맹아의 출현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결코 보장하지는 못한다. 자맹론은 자본주의맹아의 출현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보증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베버나 브로델처럼 전근대에 자본주의 요소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자본주의 내지 근대적 성장으로의 전환은 별도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② 자본주의맹아론의 심각한 문제는 자생적 자본주의화를 상정하는 것이다. 자생성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낳는 기본 동력을 내부에서 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사론은 변화의 동력을 기본적으로 내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알려진 영국의 산업혁명은 우호적인 국제환경과 중상주의적 세계시장을 배제하고서는 일어나기 어려웠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체제로서 성립하였던 것이다.
③ 자본주의 맹아는 자본주의로의 전환내지 근대적 성장의 개시를 위한 여러 선행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며 본질적이거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상품화페경제의 성장과 자본주의맹아의 출현, 곧 스미스적 성장이 근대로의 이행을 보증할 수는 없지만, 근대 이행을 준비하는 중요한 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의 충격에 대한 대응 역량을 규정하기도 한다. 아시아가 아프리카에 앞서 근대적 성장 국면으로 진입한 요인 중에 하나로 근대 세계에 편입되기 전에 스미스적 성장을 경험한 것을 들 수 있다.
3. 자본주의 맹아론의 향후 진로와 대안
1) 자본주의 맹아론 비판에 대한 비판-특히, 이영훈의 주장에 대한 비판(백일, ‘이영훈 등 뉴라이트의 한국근대사 식민사관 비판’, 마르크스주의연구, 2005. 참조)
① 실증사학적으로는 조선 후기 사적 소유(민전)의 확대와 자본주의 맹아를 무시하고, 사멸해가는 둔전 등의 합리화(중층적 관계) 실증에 주력함으로써 국유지의 일부 사례를 전체로 확산하는 일화의 오류
② 방법론적으로는 지세론 등에서 봉건제의 확대 해석(지세의 하급형태로서 봉건지대)의 오류
③ 역사적으로 다양한 소농의 존재 양식을 구분하지 않고 소농 일반에 대한 과도한 해석(해체기 소농의 성격에 봉건제 소농이라는 개념을 잘못 적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④ 근본사관의 문제-
2) 향후 진로와 대안
① 박찬승 - 내재적 발전론은 환골탈태해야만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 일부에서 폐기까지 말하고 있지만, 역사발전의 궁극적인 힘은 주체의 밖에 아닌 안에 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재적 발전론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외재적 계기를 무시하는 일국사적인 내재적 발전론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외재적 계기와 내재적 계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역사 발전 이론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다. 또 서구의 역사발전과정을 모델로 삼는데에서 벗어나 ‘복수의 발전경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즉, 일원론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다원론적인 역사관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 물론 한국사 연구에서도 여전힌 세계사적인 보편성은 고민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사적 보편성을 먼제 전제하고 이를 한국사에 적용하는 것보다 한국사의 개별성을 먼저 확인하고 이를 다른 지역의 역사들과 비교하면서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그려보는 것이 더 적절한 순서라고 여겨진다.
② 박기수- 자본주의 맹아론은 한국이나 중국에서 모두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맹아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새로운 이론적 구축이 필요하다. 사고의 전환과 논리의 구축, 그리고 참신한 방법론의 모색..
③ 이헌창 - 근대적 경제 성장을 위한 선행조건을 폭넓게 고찰하자는 것.. 이로써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있었던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항 이후 근대적 국제관계 아래 근대화 과제에 대한 조선의 대응 역량을 어떻게 규정하였던가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조선사회는 보통의 발전과정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생적 산업혁명을 전망할 수 없었다. 개항 전에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묻는 의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지리, 국제환경, 제도, 문화 등의 요인이 시장과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의 발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가. 그래서 근대화의 선행조건이 어떻게 마련되어갔고, 나아가 그것은 외국 근대문명의 충격에 대한 대응 역량을 어떻게 규정하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생산적인 역사 연구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버린 셈이다. 왜 민주화의 필요조건으로 산업화가 나오고 독재가 옹호되는게 초가산간을 태우는 일이 되어버리는지 떡 하니 보여진다. 그렇다. 어쩌면 식민지 시대는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였다고 정의 내려버리고 어허허허 그런때가 있었지 하고 넘어가버린다면 문제될것은 하나도 없다. 박정희 시대와도 동일하다. 어허허허 하고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우스운것은 보수주의자들은 민족에 목을 멘단 말이다. 민족 없이 무엇이 가능하냐고. 결국 하나의 똘똘 뭉친 대한 민국 국민을 지지하다 보니 독재도 옹호하게 되고 뒤돌아가 일본 제국주의도 지지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에게 묻는다. 박정희가 진정 산업화의 역군이었다면, 일본 제국주의가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의 일제치하는 산업화의 명 속에 가려진 암이라는 생각은 진정 옳은 것인가? ㅋㅋ 그게 너네의 민족이며 그것이 너네의 근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