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관련하여

짱공이시다 작성일 13.02.24 01: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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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에서는 1980.5.17까지의 정치적 배경과 각종 소요사건에 관한 내용들은 다루지 않았다.


*아래는 5.18 광주사태에 관련된 몇가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1980년 4월 29일, 김대중이 주도하는 ‘국민연합’은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불법적인 장외투쟁을 전개.
.
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 선생이 강제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계획은 김대중 홍위병들이 극비에 추진하고 있었으며,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그 모의를 하던 홍위병들 중 몇명이 경찰에 검거되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냥 참조만 하기를.  김대중 석방 사건. 서울의 봄. 그리고 대통령 선거 및 헌법 개정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갈등. 

김영삼. 김대중. 김대중의 소요사태 선동등  5월 17일까지의 사건은 매우 복잡함.)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5.18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에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광주역에 모여 30분을 기다려도 학생회장이나 학생운동권 리더가 안 보이자 모인 이유를 몰라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 하던 찰나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회장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박관현 회장은 그때 여수로 가고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두 그 유언비어에 감쪽 같이 속았다.

1980년 5월 18일 처음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을 때는 광주 경찰이 죽인 것처럼 말이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고, 2007년에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가 진우(박관현)의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시신을 어깨에 둘러멘 장면의 포스터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거의 모든 관객이 이 거짓에 속았다.

1980년 5월 18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

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불을 댕겨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1980년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고,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른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첫날부터 이처럼 거짓 선동하는 삐라를 살포했던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1980년 5월 19일 계엄사는 광주에서의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1980년 5월 19일 17시경, 광주시위대에 에워싸여 고립된 11공수 장갑차 뚜껑 위에 시위대가 불타는 짚단을 계속 올려놓았다. 그 열을 이기지 못한 소위가 뚜껑을 열고 나와 비조준 사격을 하였다. 불타는 장갑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위목적에서 비조준사격을 한 것이다. 이것이 5.18광주사태 전과정을 통틀어 최초의 발포였다. -["5.18관련사건수사결과",검찰보고서,1995년 7월 18일,197-216쪽]-

1980년 5월 19일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 있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장갑차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28명에 달했다.

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은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했고,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져서 당일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일시에 습격했다.

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정규군 2개 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부근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95년 7월 18일자, 검찰의“5.18관련사건수사결과”105-106쪽에 33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계엄군에는 카빈소총이 일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광주폭동 전과정을 통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한 시민이 36명뿐이다. 이 중 12명은 신원미상자이다. (북한특수군 시체들일 가능성을 제기.) 그리고 그 36명 중 28명은 시위대가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좌익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키려다 죽은 사람들이다. 

날짜별 사망자 통계는 이러했다. 5월 18일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5월 19일에는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에는 7명, M-16 1명, 카빈 2명, 타박상 4명이다. 5월 21일에는 61명, 카빈총 16명, M-16 30명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은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 22일에는 29명, 차량사 5명, 카빈 5명, M-16 16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 23일에는 20명, M16 14명, 카빈 1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 24일에는 12명, M-16 8명, 카빈 1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 25일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5월 26일에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마지막 날인 5월 27일에는 26명, M-16이 22명, 카빈1명, 화상1명(윤상원), 기타총상 2명이다.  

카빈총 사망자를 날자 차례 별로 보면 0. 0. 2,16,5,1,1,1,0,0,1이고, M1-6 사망자를 날짜 차례별로 보면 0,0,1,30,16,14,8,0,0,22이다. 시내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21일에 시민은 M-16에 의해 30명, 카빈에 의해 16명이 사망했다. 시민군 총에 시민이 맞아 사망한 것이다. 5월 21일은 양측 모두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며, 군이 30명의 시민을 쏘는 동안 시민군도 16명의 시민을 쏘았다. 또한 5월 21일에는 10여정의 M-16이 이미 파탈되어 있어 M-16 사망자 모두를 군에 전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날 시민들은 61구의 시체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20% 이상은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한 사람과 시민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 기간 중 차량사는 12명, 카빈사는 26명이다. 이 38명(23%)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군이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이 시내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61명(37%)은 주로 시민군이 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이 37%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시민군이 져야 할 것이다.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총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위험한 작전지역에 나타나면 누구나 총구에 의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월 24일(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한국군이 한국군을 쏜 것이다.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5월 22일부터 26일에 걸쳐 시민군이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을 일부러 쫓아가서 총으로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은 이 61명에다 차량사 및 카빈사 38명을 보태면 99명(60%)이 된다. 전체 사망자의 60%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이 명백하게 시민군에 있어 보인다. 여기에 기타총상이 9명도 보태야 할 것이다. 기타총상이란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AR기관총, CAL50 기관총, M1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들이다. 계엄군에겐  오직 M-16만 있었다. 기타총상을 여기에 더 보태면 군이 책임질 수 없는 죽음이 108명(66%)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108명의 죽음에 대해 계엄군은 억울한 누명을 써온 것이다. 진압 직후의 계엄사 발표로는 교도소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이 28명, 부상자가 70명이라 했다. 계엄사측은 또“시내버스, 군경 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는 과정,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음주운전 및 과속운전 등으로 인한 전복이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으로 인해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인들을 위해 계엄군이 지켜주던 도청 그리고 전남대로부터 살인적인 공격을 받다가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총격을 가하다가 사망한 무장시위대들에 대해서도 계엄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피해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충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검찰과 법원과 그리고 이른바 5.18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전두환과 정호용 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김대중, 복학생들, 재야세력,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을 잘못 지휘한 윤흥정과 정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에 동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이다. 여기에서 숫자가 틀리고 맞는 것은 둘째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엄군과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피해를 전부 계엄군이 다 뒤집어 써왔다는 사실, 계엄군이 수세적 방자였고 시위대가 적극적 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계엄군이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려고 무자비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매도되어 온 사실, 그리고 카빈소총 등으로 시민들을 쏘아죽인 사람들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다. 

언론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광주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자 수는 결코 한쪽 만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충돌과 쌍방교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상자 수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 진다. 민간인 부상자 수는 377명, 군인 부상자수는 117명, 경찰 부상자수는 148명이다. 군경을 합치면 265명이다. 부상자 수의 비율은 민간 대 군경이 1.4: 1인 것이다. 쌍방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군경이 일방적으로 시민을 공격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23명의 계엄군 사망자는 5월 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1일 전사자는 3여단 16대대의 정관철 중사로 계엄군의 차량에 깔려 즉사했고, 21일 및 22일의 전사자 6명은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의 사격을 받아 발생했고, 24일의 11명은 교도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자는 광주시 재탈환작전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동안 언론들로부터 나온 왜곡되고 산만한 자료들만을 가지고 5.18에 대한 지식을 나름대로 형성해 왔다.

5.18을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하여 전두환이 일으키고 획책한 광주 말살 작전이라고 믿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의 굳은 신앙이다.

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검찰의 5.18 수사기록에는 신군부가 광주작전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고, 광주작전의 지휘계선 상에 있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법정에 나와 광주작전에 신군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잘라서 증언했다. 

5.18 반란 당시 전두환은 계엄령 하에서 수사반장 임무를 수행했던 2성장군에 불과했다. 5.18은 당시 전두환이 간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과 5.18 사이는 사돈의 팔촌 사이도 아니었다. 

5.18 진압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진종채 2군사령관과 전교사 사령관으로 연결된 군 통수체계에 의해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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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읽어볼만한 글인거 같습니다

글 마지막부분처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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