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의 짐을 떠안고 가는 대한민국 남성들

BUBIBU 작성일 14.03.19 18: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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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의 짐을 떠안고 가는 대한민국 남성들


기자들이 항상 치열하게 취재하는 건 아닙니다. 우연찮게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심지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흥미로운 기삿거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번에 취재한 김치녀 기사 역시 시작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였습니다.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한창인 30대 초반, 역시 대화의 절반은 여자 이야기였습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소개팅 경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철수(가명) : 여자한테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어보니까 스파게티를 먹자고 하더라고. 잘 아는 곳이 있다면서 날 데리고 가. 그런데 스파게티 하나에 2만 원이 넘어. 와인까지 시키니까 금세 10만 원이야. 그러더니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고 생색을 내는 거야. 정이 떨어져서…

민수(가명) : 그러게. 요즘 여자들이 그래. 나랑 연봉도 비슷한데 만나면 다 남자보고 내래. 그런 여자 조심해야 돼. 남자 등쳐먹고 사는 여자 많아. 요즘 세상에 결혼하면 집은 남자보고 해오라고 하고.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나오는 대화입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럴까요. 충분히 불합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능력이 거의 비슷한데, 왜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같이 결혼하는 데 왜 남자가 집을 마련해야 하는지, 남자 부모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등골이 남아나질 않는지 억울한 게 사실입니다. 그 때, 다른 친구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영철(가명) :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더치페이 하자고 그러지, 왜?

철수 : 어떻게 그러냐. 얼마나 쪼잔 해 보여.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

영철 : 자기가 얘기도 안 해놓고 뒤에서 욕하기는…

철수 : 야, 내가 돈 낼 때 옆에서 “같이 내요!” 이러면 얼마나 예뻐? 안 그러냐? 그런 건 자기가 알아서 눈치보고 해야지.

철수의 화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철수는 데이트 비용이 남자가 부담하는 걸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논리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여자한테는 당당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속된 말로 ‘쪼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저 역시도, 남자들 대부분이 이럴 것 같습니다.

한 번 취재해볼까 마음먹고 인터넷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기사 제목에 ‘군대’란 말만 붙어도 댓글 수천 개가 붙습니다. 대부분 여성을 욕하는 말들입니다. 군대도 안다녀온 게 남자한테 빌붙어서 산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느니, 이런 식의 비난들입니다.

대놓고 여성을 혐오하는 사이트들도 많았습니다. 일부 사이트에선 여자는 3일에 한 번 씩 때려야 한다는 뜻의 ‘삼일한’같은 말들이 공공연히 쓰이고 있었습니다. (더 심한 말도 많았지만 성적인 단어가 대부분이라 생략하겠습니다.) 이 곳 안에서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는 것은 금기나 마찬가지였고, 여성임이 발각(?)되면 차단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용어가 ‘김치녀’란 말입니다. 과거 ‘된장녀’가 명품백이나 커피를 즐기는 사치스런 여성을 지칭했다면, 이 ‘김치녀’는 남녀 관계에서 수반되는 비용들, 가령 데이트나 결혼 비용을 남성에게 과도하게 전가시키는 여성을 뜻합니다. 한국 여자가 과도하게 이렇다는 뜻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김치’와 결합됐다고 합니다. ‘된장녀’에 비해 좀 더 관계 지향적인 표현인 셈이죠. 인터넷에선 이 ‘김치녀’를 혐오하는 댓글이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이런 여성 혐오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여성 단체 활동가, 여성학 전공 연구원, 심지어 여성 범죄에 대한 구체적인 취재를 위해 프로파일러도 만나봤습니다.

우선, 불경기를 주목하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혹은 부가 제대로 배분되지 않으면, 그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쏟아낸다는 겁니다.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나 그 구조적 문제점, 정부나 기업 등 분배의 주체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 부를 가져가는 약자에 대해 비난을 쏟아낸다는 이른바 ‘희생양’ 이론입니다. 러시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겨냥한 스킨헤드 범죄와 비슷하다는 논리입니다. 과거 집에서 일만하던 여성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해 남성의 부를 뺏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약자인 여성을 공격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인 면에 국한시킬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경기가 좋을 때도, 이런 일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다만, 그 땐 인터넷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경제적 배경 보다 인식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없어지면서 남녀가 평등해졌다는 ‘착시’가 있다는 겁니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여성 수석 합격자가 다수 나오고 대통령까지 여성이 된 마당에 무슨 남녀 차별을 논하느냐는 거죠. ‘유리천장’은 말 그대로 보이지가 않으니, 남성들에게 더더욱 체감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만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런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남성들도 피해자란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철수의 화법을 예를 들어 보죠. 데이트 비용을 온연히 남자가 부담하는 현실에 대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막상 데이트 자리에선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합니다. 네가 먹은 건 네가 내라,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남성은 많지 않습니다. 가부장 사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남성은 여기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지킬 수밖에 없는 현실인 셈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댓글에 ‘김치녀’ 욕하면서 푸념하는 게 전부겠죠. 결국, 경제적으로 여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의 피해자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차별한 그 짐을 고스란히 남성이 이고 가야 하는 씁쓸한 현실인 거죠.

예상 외로 제가 만난 여성학자들이 이런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댁의 김치는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를 붙인 여학생도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남자들도 참 살기 힘든 시대라고요. 우리는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그 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힘들게 만든 가부장 사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었다고요.

치열한 사건 사고 현장에서, 혹은 정부가 하는 브리핑이나 기자 회견에서 벗어나 긴 호흡으로 얽히고설킨 여성 혐오 문제를 취재하고, 많은 전문가를 만나 차분히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방송 화법의 한계, 더 명확히는 재주 없는 기자의 글 솜씨 탓에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앞으로 기자 생활 하는 데 자양분이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 여성학자의 말로 결론을 갈음합니다.
“이제 여성학은 차별받는 여성 뿐 아니라 차별받는 남성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남성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거죠. 김치녀와 같은 여성 혐오 현상은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가부장 사회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짐을 덜어주는 게 진정한 양성 평등의 시작이라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여성학 내부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일련의 여성 혐오 현상은 여성학에 이런 식의 과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마냥 사회 역행의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경원 기자leekw@sbs.co.kr출처 :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40319&rankingSectionId=102&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96&aid=0000296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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