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레디가카씨꺼 내가 펌질 좀 함.
경제개발의 허구
박정희 정부 무역규모와 무역수지 비교표 (출처: 한국 무역연합회)
년도 무역수지 무역규모
1961 -2억8천만$ 3억5천만$
1962 -3억7천만$ 4억8천만$
1963 -4억7천만$ 6억4천만$
1964 -억9천만$ 5억6천만$
1965 -2억9천만$ 6억3천만$
1966 -4억7천만$ 9억7천만$
1967 -6억8천만$ 13억$
1968 -10억$ 20억$
1969 -12억$ 24억$
1970 -11억$ 29억$
1971 -13억$ 40억$
1972 -9억$ 42억$
1973 -10억$ 75억$
1974 -24억$ 1백10억$
1975 -22억$ 1백30억$
1976 -11억$ 1백60억$
1977 -7억6천만$ 2백10억$
1978 -23억$ 2백80억$
1979 -53억$ 3백60억$
결산 총 -250억$ 적자
매년 급속하게 늘어나는 무역규모 수치. 이 수치야 말로 박정희 체제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17년 사이에 3억5천만$에서 3백60억$로 백배 이상 성장을 하지만... 역시 백배 이상 무역 적자를 기록해낸 위대하신 각하 지도력의 실체인거죠.
박정희 정권 당시의 임금인상률
1960-80년 제조업의 월평균 임금은 실태생계비의 49.7%(1965년), 1975년 77.3%, 95.9%(1980년)로 개선되고 있었으나 생계비를 모두 충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세청 발표에 의하면 1978년 현재 전체 노동자 가운데 근로소득세 인적 공제 최저선인 5만원 미만의 비과세 인원이 전체의 76.7%를 차지했으며, 전체 노동자의 88.6%가 월 10만원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가 인상률
한국은행 통계상 1966년 이후 10% 이하 물사상승률은 1973년 3.2% 한 번 뿐임. 대부분 시기 동안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1차 석유파동 일어난 25% 전후, 2차 석유파동 때인 1979년에는 20% 수준이었다. 지금 이 같은 고물가를 견딜 일반 가계가 있겠는가.
환율정책
내수 경시하고 소비자 혜택보다 공급자 중심경제 구조.수출 지원 위해 1960년대 200원대이던 환율이 1972년 400원대, 1975~1979까지 484원으로 고정환율제. 국내 가계의 대외 구매력 약화와 물가 폭등 등 가계를 제물로 성장하는 방식. 교역의존도1970년 36.7%에서 1979년도 59.0%까지 급상승.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박통을 띄우는 가?
보릿고개 시절에서 경제적 궁핍을 탈출한데 대한 인상적 효과와 조선일보 등 언론들의 박정희 띄우기 보도. 고도성장기를 경험했던 50대 이상 세대가 외환위기 거치며 겪게 된 불안에 대한 과거 미화와 향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의 민생경제 개선 실패 등의 복합적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후 한국경제에 미친 부정적인 경로의존 효과가 너무 크다. 그리고 그 당시에나 그나마 통했던 방법이지 이미 그 같은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시대착오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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빕스는 몇가지만 반박을 하면 박통의 공으로 인정을 해줄께.
물론 순수하게 경제는 성장을 했다고 할수가 있겠지.
그렇다면 국민들의 임금이나 생존에 관한 여건을 등한시 하고 순수하게 물가 인상, 무역 적자, 환률 왜곡으로서
만들어진 경제가 과연 보편타당한 경제 발전책이라고 여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