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의 올바른 자세...

dol2da 작성일 14.10.01 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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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동호가 만난 사람]해임관련 소송에서 6전 6승한 정연주 전 KBS 사장


ㆍ“파업하는 후배들이여, 해직 겁내지 말고 싸울 땐 싸워라”

언론이 언론인을 인터뷰하는 건 그리 자연스럽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시국이 매우 수상(殊常)할 때였던 것 같다. 펜을 갖고 있는 사람의 말을 굳이 펜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뭔가 안 좋은 일, 그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한다. 표현의 자유, 알 권리,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와 관련한 것일 게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반세기 가까이 이런 문제와 몸으로 부딪쳐온 별난 언론인이다.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1978년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되고, 2008년 KBS 사장에서 축출과 더불어 기소된 큼직한 이력만 봐도 알 만하다. 지난해 나온 <정연주의 기록>(유리창)을 보니 그는 고교 시절인 1964년 <광야>라는 교회신문에 헌금 모금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가 학생회 부회장직에서 제명된 일이 있었다. 이를 생애 첫 필화사건으로 친다면 그의 ‘언론투쟁사’는 48년의 대장정이고, 게다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4월 5일 경향신문사에서 정 전 사장을 만났다. 그는 부산에서 막 올라온 참이었다. “백수가 과로사하겠어요, 하하하.” 강연과 유세 지원, 부산MBC 파업 격려, 부산일보 앞 일인시위, 토크쇼 출연 등등 숨 가빴던 부산 일정의 피로를 그는 후배 기자 앞에서 웃음으로 떨어내려는 듯했다. 얼굴에는 피곤기보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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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도를 통해 봤습니다.
“부산대 강연차 간 김에 ‘정수장학회 장물 시민한테 환원하라’는 일인시위나 하자고 해서 한 30분 서 있었어요.(웃음)”

언론인 중에서도 (팔자가) 유난한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돼 ‘거리 언론인’이 된 것이 37년 전인데 지금껏 거리에 있잖습니까.
“맞아요. 제가 이른바 언론 비슷한 걸 처음 만난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교회 필화사건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대학신문에 있었고, 동아일보 들어갔다가 해직됐고, 길바닥에서 싸우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1982년도에 기자의 꿈을 포기하고 유학을 떠나서 미국에서 18년을 살았잖아요. 그런데 뜻밖에 6월항쟁 이후 한겨레신문이 창간돼서 언론계에 다시 들어왔는데, 그때 참 기뻤어요.”

정 전 사장은 싸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언론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언론 복귀가 불가능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의 유학 기간을 빼고는 그의 사전에 ‘평화’라는 낱말은 없었다고나 할까.
“워싱턴 특파원 때는 소위 냉전 사고를 부추기는 수구세력과의 싸움이었고, 논설주간을 할 때는 족벌·수구언론과의 싸움이었죠. KBS 가서도 말이죠, 그 안에도 수구세력이 있습니다. 강고하게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집권세력이죠. 안에서는 그 세력하고 싸우고 바깥에서는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만날 싸웠잖아요. 사실 제가 KBS 사장 딱 그만두고는 진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었어요. 책임 있는 자리에 절대 안 가고 자유롭게 한반도를 여행하려고 했어요. 여행 다닌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려고 익명을 지은 게 있어요. ‘완전한 자유인’이라고.”

그에게 자유와 평화를 앗아간 것은 검찰이다. 검찰은 그를 배임죄로 기소했고, 그는 해임 무효소송을 제기했으며, 지난 2월 최종심까지 그의 6전6승으로 끝난 이른바 ‘정연주 재판’의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검찰 수사자료가 한 6000쪽이 온 거예요. 그걸 다 읽어야 돼요. 그때부터는 완전한 자유인이고 뭐고 없는 거죠. 1심 재판 한 1년 하는 동안에 아무것도 못 했어요. 정치검찰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이더라고요. 황폐하게 만들어요. 민간인 사찰 물꼬를 튼 김종익씨와 요새 형님아우하고 지내는데 수면제 없이 못 잔다고 해요. 자살충동이 아직도 있습니다. 정혜신 박사가 그랬어요. 삼풍백화점 붕괴됐을 때 지하에 있었던 사람하고 같은 정신상태라고요.”

정치검찰과의 싸움, 그의 전투(?) 목록에 추가된 또 하나의 적이다. 자신이 싸움을 놓을 수 없는 까닭을 그는 부인의 표현을 빌려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1심 무죄 받고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언론인으로 돌아와서 글을 다시 쓰는 게 참 행복해요. 이명박 정권이 워낙 모든 걸 뒤집어놓았고, 특히 그런 언론 상황에 대해 제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아요. 예전에 집에서 재판 준비할 때 산더미 같은 자료를 놓고 혼자서 낑낑대는 걸 보고 제 집사람이 그랬어요. 당신 고시공부해요? 요새는 자주 전국을 다니니까 아침에 (가져온 가방을 가리키며) 이거 하나 들고 나옵니다. 이제는 집사람이 그래요. 당신 꼭 무슨 독립운동하러 다니는 사람 같다고요. 맞다, 내가 언론 독립운동하고 있다고 했죠.(웃음)”

전임 사장으로서 KBS 파업사태를 지켜보는 심정이 어떻습니까.
“KBS 있을 때 경영은 아주 쉬웠습니다. 왜냐. 자율로 해버리면 되니까. 간섭 안하면 돼요. 파업하는 KBS 후배 만나보면 그런 얘기를 해요. 사장님이 자율을 맛보게 해놔서 기자·PD·아나운서들이 못 견딘다고요. 자율을 누리다가 그것을 빼앗아가고 발제해도 다 잘라버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검열을 하는데 어떻게 견디겠어요. 요새 꼭 파업 현장에서 불러요. 즐겁게 가죠, 저는.”

방송 3사(KBS·MBC·YTN)와 국민일보·부산일보, 거기다 연합뉴스까지 이렇게 주요 언론이 한꺼번에, 그것도 장기간 파업을 하는 예는 언론사에서 흔치 않을 텐데요.
“처음입니다. 파업으로 보면 제일 오래 하는 데가 국민일보죠. 100일 넘었고요. 각기 성격은 좀 다르죠. 부산일보는 유신의 유령과, 국민일보는 종교집단과 편집권 독립을 놓고 싸우는 것이죠. 나머지는 전부 정권이나 그 친위세력의 문제예요. 그런데 전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편집권 독립입니다. 언론의 두 가지 핵심 기능이 사실보도와 권력에 대한 감시·견제·비판기능인데 그걸 다 못하게 하니까요. 옛날에는 KBS 애칭이 고봉순, MBC가 마봉춘이었어요. 그렇게 예쁘게 봤어요. 요새는 김비서, 명박씨라고 조롱을 해요. 기자·PD·아나운서들이 더 이상 못 견디는 거죠.”

KBS 사장 재직 시절 탐사보도가 활발했고, 그때 유명했던 김용진 기자가 뒤에 좌천된 것이 기억납니다.
“예, (KBS의) 황금기라고 하죠. 그때 탐사보도팀을 만들었거든요. 그 친구들 첫 작품이 뭔지 아세요? 고위공직자 재산검증입니다. 그때 고위공직자가 누굽니까. 거의가 참여정부 사람이에요. 지금도 가끔 이해찬 전 총리 만나는데, 미안하죠. 1탄이 이해찬 전 총리였거든요. 당시 장·차관, 청와대 수석 등 권력 쪽에서 굉장히 불편해했죠.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마운 거예요. 저한테 압박을 가하거나 전화해서 이거 섭섭합니다, 그런 적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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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인) 사인조차도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적어도 기분은 나빴겠지만 언론이라는 기능은 인정을 한 거예요. 김용진 기자는 우리나라 탐사보도의 큰 지평을 연 친구예요. 특종도 어마어마하게 했고, 상도 무지무지하게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딱 그만두자마자 부산 발령 나고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울산으로 쫓아버렸잖아요.”
정 전 사장은 무죄가 확정된 형사재판, 승소한 행정소송 외에도 KBS와 관련된 또 하나의 민사소송에 걸려 있다. ‘KBS의 하나회인 수요회를 아시나요?’라는 <오마이뉴스> 기고와 관련된 것인데,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수요회와 관련해서는 1심에서 패소하지 않았습니까.
“수요회 실체를 제가 증명을 못 했다는 거예요. 비밀조직인데 어떻게 실체를 보입니까. 당시 보도본부 게시판에 수요회라 해서 다 나오고 각종 언론에도 보도됐거든요. 제가 적극적으로 수요회의 실체를 증명하려면 후배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야 될 것 아닙니까. 그거는 못 하겠더라고요. 이 체제에서 그 친구들이 불이익을 볼 게 뻔하잖아요.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감수하겠다고 각오를 한 거예요.”

항소심도 불리한 상태에서 진행이 되겠군요.
“첫 재판이 4월 18일에 있는데 뜻밖에도 엉뚱한 데서 도움이 왔어요. 민간인 사찰문건에 수요회라고 하고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나와요. 확실한 증거가 생긴 거죠.”

KBS 사장에 임명될 때 코드인사 논란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는 “전 정권에 임명된 기관장은 임기가 남았더라도 물러나는 게 도리”라는 말이 나왔고요. 지금 KBS 김인규, MBC 김재철 사장 등은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봅니까.
“먼저 한 가지 팩트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가기 전에 ‘특보 사장’이라고 해서 먼저 임명된 사장이 물러난 일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개혁적 KBS 사장 선임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돼서 3명의 후보 중에서 저를 한 표 차로 사장으로 뽑은 거예요. 그래서 낙하산 사장이라는 비판은 수용할 수 없고, 다만 코드인사는 맞습니다. 1970~8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던 분들의 삶과 가치와 생각은 대강 비슷합니다. 그건 매우 자연스럽다고 봐요. (김인규 사장처럼) 정치적으로 완전히 대통령후보 집단에 들어가서 한 멤버로 일한 것과는 다르죠.”

코드인사와 관련해 생각나는 게 그 용어의 뜻과 쓰임새다. 코드는 영어로 세 단어가 있다. 기호체계(code), 줄(cord), 화음(chord)이다. 코드인사의 코드는 보통 ‘code’를 의미한다. 정치·이념 성향이나 사고체계 따위가 같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첫 번째와 세 번째 의미의 코드인사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의 코드(cord), 즉 연줄인사일 것이다.

KBS·MBC·YTN·연합뉴스 등의 파업사태는 다 사장 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참 고민스러운 문제예요. 구조 자체가 정치적으로 임명하게 돼 있어요. 이 정권뿐만이 아니라 과거 정권도 마찬가지고, 세계 어느 나라 공영방송을 봐도 다 비슷한 구조입니다. KBS 사장 시절에도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장 선임 절차를 연구도 시켜보고 고민도 해봤지만 정답이 안 나와요. 어떤 제도를 갖다놔도 권력 가진 자들의 입김이 들어가게 돼 있거든요. 그냥 상대적으로 독일의 체데에프(ZDF)와 같이 사장을 뽑는 사람 숫자를 좀 늘리는 정도가 낫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는 60여명 되거든요.”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사장들이 사퇴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오늘 아침에도 누가 묻던데, 쉽게 못 하죠. 사퇴하면 정권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테고,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의 새누리당이나 초록동색인데 통제가 안 되는 카오스 상태로 가는 건 원하지 않죠. 그러니까 저렇게 무리를 하잖아요.”

파업하는 기자·PD·아나운서들의 고통이나 피해가 더 커지겠습니다.
“저는 파업하는 후배들한테 ‘쫄지’ 말고 싸우라고 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다, 싸우다가 해직당하고 정직당하고 봉급 깎이는 것 너무 겁내지 마라, 옳은 일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1970년대는 끝이 안 보였잖아요. 지금은 끝이 있어요. 어쨌든 5년이 지나면 선거를 하거든요. 국민이 깨어 있어서 정권을 바꾸면 다 복권됩니다. 바꾸자,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제가 이번 총선에 멘토도 하고 글도 쓰고 강연도 다니는 겁니다.”

정 전 사장은 조국 서울대 교수, 작가 공지영, 시인 김용택 등과 함께 4·11 총선에서 야권연대 단일후보를 지원하는 멘토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유난히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사건이 많았습니다. 평생 그 문제와 치열하게 부딪친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사건 등 수도 없이 많죠. 제가 굉장히 심각하게 보는 건 G20 포스터에 쥐 그렸다고 잡아가는 거예요. 그걸 용납 못하는 겁니다. 방송 프로그램 가지고도 시비 걸잖아요. 빵꾸똥꾸 사건처럼… 김제동을 비롯해 자기들 싫어하는 연예인 쫓아내고… 그게 다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거거든요. 대학에서 강연해보면요, 제 얘기는 복잡해서 이해를 잘 못 하는데 김제동이 이야기하면 그냥 빵 가버려요. 역설적으로 이 정권은 20대를 가장 쉽게 정치교육시켰어요. 제가 김제동 사건이 이 정권의 운명을 바꿔놓는 변곡점이라고 쓴 적 있어요. 실제로 그 말이 맞았던 게 그때부터 이명박 정권의 인기가 거꾸러지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깨어 있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반드시 복권된다는 그의 말이 묘하게 가슴을 찔렀다. 그는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최근 민간인 사찰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워터게이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흉포한 사건입니다. 워터게이트는 사실 단순합니다. 도청하려고 도둑을 가장해서 들어갔다가 그게 들통 나니까 거짓말하고 은폐했어요. 딱 그거예요. 국가기관이 돈 댄 것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민간인 사찰은 총리실만이 한 게 아니라 그 정보를 권력기관이 공유했고, 청와대와 연결된 게 다 나오고, 그걸 감추기 위해 온갖 공작을 하고, 돈까지 주고, 그런 문건이 발표되니까 청와대는 물타기 한다고 엉뚱한 것 가지고 시비를 걸고…, 범죄행위로 보면 워터게이트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책임이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안 하고… 완전히 (요즘 시쳇말로) 멘붕이라니까. 멘탈 붕괴…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4101736101&code=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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