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이란 적이 생산한 집이란 말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집을 말한다.
손혜원의원이 어릴적에 적산가옥에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집이 거의 많이 사라졌다.
손의원이 목포에서 적산가옥들을 발견하고 어떤 느낌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나도 어릴적에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국민학교3학년때 부터 고2때까지.
부산 대신동은 일제시대 초량, 수정동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역 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적산가옥들이 남아있고 거리가 특유의 큰길을 마주하는 집들과 그 집을 돌아들어가는 작은 골목들이 남아있다. 이 집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예전처럼 다다미라든가 아궁이가 없는 집은 없을 것이다. 국민학교 5학년 무렵(1975년)에 동네에 액셀파이프로 시공되는 연탄보일러가 유행이었다. 우리 집도 그때 다다미를 걷어내고 보일러를 설치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네에는 다다미를 만들어서 깔아주는 가게가 있었다.
기억을 더 더듬어 보면 다다미방들은 전부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미닫이 문만 걷어내면 그냥 방 하나로 만들수 있었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뒤안에 작은 화단이 있었고 작은 연못 같은게 있었다.
화장실과 방은 방과 마루로 연결되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 비 맞으며 똥 싸러 가는 일은 없었다.
방마다 이단으로 된 벽장이 있었서 바퀴벌레들이 어마어마했다. 우리 집은 큰길에 면해 있었는데 큰 길이라고 해봤자 작은 승용차가 겨우 엇갈려 지나갈수 있는 정도 였다. 그 집을 포함해서 너댓채의 집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집들의 뒤쪽으로 작은 골목길이 있어서 또 다른 집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방형의 길을 만든 다음에 큰길에 집을 짓고 나면 그 다음에 작은 골목으로 연결되는 집을 지었다고 한다.
손의원이 말하는 일층에는 가게를 하고 이층에 주거를 하는 집은 우리 동네에는 별로 없었다.
그런 동네는 주로 상업지구에 많았는데 국제시장이라고 불리는 부평동이나 초량, 보수동, 충무동등에 많았다. 중학교때 친구네 집이 부평시장에서 기름집을 했는데 그 친구집이 딱 그렇게 생겼다.
개인적으로 손의원의 인간적인 추억에 대해 나는 공감한다. 시대가 남겨준 공간에서 어린시절을 살았고 꿈을 꾸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다음세대에 남겨서 그곳을 살다간 사람들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가끔 대신동에 가게되면 그 공간에서 그때의 그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추억이 응답하라시리즈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손의원의 노력도 그와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