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와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준영의 목소리에 서둘러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자전거를 탄 순례자는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봐왔던 흔한 풍경이다. 아무래도 속도 차이가 크다 보니 한 번 지나치거나 마주쳤던 자전거 순례자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외향은 대부분 비슷했다. 공기역학적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임을 과시라도 하듯 날렵한 모양의 머리 보호대와 온몸에 찰싹 달라붙은 다양한 문양의 쫄쫄이 옷은 그들이 갖춘 가장 보편적인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빠르지 않은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 가는 자전거 순례자는 지금까지 보던 누구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2인용 자전거,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둥글고 투박한 모양의 머리 보호대와 잠깐 마실 나온 것 같은 헐렁한 반바지와 셔츠 차림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만약 이곳에서 만난 게 아니었다면, 자전거 옆에 튼튼하게 고정된 큼직한 짐만 아니었다면 잠깐 바람이나 쐬러 나온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았다.
“와, 예쁘네요.”
작게 중얼거리는 수정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인들의 나이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낡은 머리 보호대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백발과 깊게 팬 주름만 봐도 70은 훌쩍 넘어 보이는 노부부의 모습은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앞자리에서 핸들을 잡고 방향 조절하는 노인 남자, 뒤에서 함께 발판을 구르는 노인 여자. 그들의 뒷모습이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지금까지 우겨왔던 똥고집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얘기 하는 놈이 제일 먼저 가더라.’
‘네가 결혼 안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고집 피우는 거야. 조금만 더 나이 먹어봐라. 그때도 그러나.’
‘여자는 몰라도 남자는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면 늙어서 추하다.’
‘고자라니? 사지 멀쩡해서 왜 결혼을 안 한다니?’-친할머니의 호통에 가까운 일침이었다.
“딱히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의 주변 반응이다.
비혼주의네 독신주의니 하는 그런 거창한 의사 표현이나 각오는 아니다. 그저 결혼이라고 하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만 가정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에 대한 반기요, 굳이 가정을 이뤄야 하는 필요성의 부재일 뿐이다. 물론, 현재 연인이 없는 것도 큰 이유이긴 하나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이 고집은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점점 멀어져 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가치관의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혹시, 어쩌다, 어쩔 수 없이, 우연에 우연이 겹쳐 기적이라는 것이 벌어져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져 하게 된다면 저런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 그저 그런 생각이 잠깐 마음속에 일렁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뿐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건 아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목적지인 로스아르코스(Los Arcos) 입구에서 친절한 마을 주민에게 알베르게 위치도 듣고, 포도도 한 송이 얻었다. 마을 밖으로 통하는 다리 건너 위치한 알베르게도 쉽게 찾았고 모든 일행이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도착해 어제와 같은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 성당도 가깝고 7시에 주일 미사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제 정비를 마치고 저녁 식사 전까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일만 남았다.
이른 새벽 어둠을 헤치고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선다. 아직 동이 틀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 고요한 마을엔 부지런한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아련하게 울린다. 걸음은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나아간다. 누군가와 걸음을 맞추거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혼자가 된다. 목적지에 도착해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와 빨래 등의 정비를 한다. 그리고 각자의 휴식을 즐기고 함께 저녁을 먹고 이른 시간 잠을 청한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 단순한 일상의 어떤 부분인 걸까? 도대체 어떤 부분이 점점 이 길의 매력이 되어 순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걸까. 샤워와 빨래까지 마치고 정원 의자에 앉아 여행기를 정리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아직 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이제 고작 엿새밖에 지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엿새 만에 이 길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는 게 너무 이른 걸까? 됐다. 고작 엿새 걸어놓고 뭘 찾겠다고……. 생각도 많이 하면 배 꺼진다는데 잠이나 자자.
의미 없는 생각을 접고 막 일어서는데 아침에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앞질러 가던 노부부가 알베르게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한참 멀어졌을 거로 생각했던 그들을 다시 만난 반가움에 인사라도 할까 다가가던 걸음은 이내 멈춰버렸다.
개를 좋아한다. 고양이도 좋아한다. 음… 그냥 털 난 짐승은 다 좋아한다. 때론 사람보다 짐승이 더 좋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인간과 짐승의 영역은 분명히 갈려야 한다. 촌놈에 고지식한 부모 슬하에서 자라온 옛날 사람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집 안에서 짐승을 기른다거나 인간과의 영역이 불분명해지는 것은 불편하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의 아름다운 모습까진 좋았다. 정확히 아침에 지나쳤던 그들의 뒷모습이었고, 내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껑충껑충 뛰며 따라오는 한 마리 작은 개를 보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양놈들은 이런 데까지 개-새-끼를 데려오나?’
내 침대에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식탁에 올라와 음식을 탐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숙소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 그저 마당에서 주인들을 따라온 개 한 마리일 뿐이었다. 문제 삼을 게 전혀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거슬렸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순간만 괜히 심술이 난 걸 수도 있다. 원인이야 어쨌든 서른 살의 고지식한 촌놈은 불쾌한 감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들을 지나쳐 숙소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지만 별거 아닌 편견에 스스로 얽매인 탓인지 피곤함이 덜한 건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을 뒤척이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의 고통이 남아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마을 구경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창가에 앉아있던 수정이 인사를 건네며 손짓했다. 창밖에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녀는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게 창밖에서 벌어지는 알 수 없는 사건의 공유를 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발바닥을 찌르는 듯한 익숙하지만 달갑지 않은 고통이 찾아왔다. 체력 하나 만큼은 자신 있는데, 남들 다 생기는 물집 하나 안 생기는 발인데 어쩐지 남들보다 고통이 더 심한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익숙하지만 적응되지 않는 고통을 이 악물고 참으며 창가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수정의 시선과 손끝을 따라 창밖을 보니 낮의 그 노부부가 숙소 뒷마당에 텐트를 펼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노인 남자는 텐트 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땀을 뻘뻘 흘리며 텐트와 씨름을 하고 있었고 노인 여자는 간이 의자에 앉아 개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밖에 나오면 남자만 고생하는 건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구나. 아침에 그들을 처음 본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들을 향하는 시선엔 짜증과 불쾌함만이 남아있었다.
“아름답지 않아요?”
뭐? 얜 또 뭔 또라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내의 편의와 휴식을 위해 홀로 희생하는 남편의 모습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제 기준에선 저 장면을 아름답고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으로 보는 거야?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이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여자한테 굳이 내 감정을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가? 저 할아버지 텐트 처음 쳐보시는 것 같은데 두 분이 같이하시면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잘했어. 어른스럽게 잘 말했어. 속내를 들키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잘 둘러서 얘기했다며 스스로 같잖은 칭찬을 하고 있는데 수정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네? 아, 오빠 모르셨구나.”
“응? 뭘?”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질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수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순간도 상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말이었다.
“저 할머니 눈이 안 보이세요.”
순간 단단한 무언가로 세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몸속 깊은 곳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올라와 주변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자신의 추악한 편견과 마주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2인용 자전거, 앞자리에서 방향을 조절하는 노인 남자, 절대 놓지 않던 부부의 두 손, 개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손을 뻗고 있고 개가 몸을 비비고 혀로 핥을 뿐이었으며 그녀의 시선은 개도, 노인 남자도 쫓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난 무엇을 보려고 한 걸까? 내게 진실이 필요하긴 했던 것일까? 진실을 보거나 확인할 생각도 없이 한 줌도 안 되는 한심한 편견으로 눈을 막고 상대를 정의하고 있었던 건가? 더는 노부부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수정과 대화도 지속할 수 없었다. 당장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힘겹게 숨기고 있는 내 추억함이 드러나 주변을 물들일 것만 같아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왔다.
지금까지 난 내가 상당히 중립적인 놈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고집도 부리고 고지식한 소리도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갖는 다양한 성향의 발아라고 변명해왔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철딱서니 없는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고 있었는지. 어쩌면 이건 극히 일부분일 뿐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며 세상을 더 많이 보고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자신도 돌아볼 줄 알아야 어른이다. 그런데 난 지금까지 나이만 어른이었을 뿐 나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심한 어른,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빵 한 쪽도 마음 편히 사 먹을 수 없는 주제에 담배를 사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저 마르지 않는 한숨만 자꾸 뱉을 뿐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이제라도 내 한심함과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알게 되었고 이제라도 고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렇게 위로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몸에 잔뜩 배어 있는 이 추악한 냄새는 마을을 휘도는 카미노의 마른 바람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되어야 하며, 어쩌면 이 책의 주제일지도 모를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앞선 글을 읽으며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 완전 쓰레기네.’ 아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젠 아니다. 글을 쓰면서 무수히 많이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내용을 무난하게 수정할까?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예전에 그랬단 거지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닌데.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실에 가깝게, 의도한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과감히 걱정과 불안을 감수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변명을 한다. 지금은 집에서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 집사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작가는 이젠 쓰레기가 아니다. 이제 이 책을 덮어도 된다. 이 사실 하나만 확실히 기억한다면.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벌써 책을 덮으면 안 될 것 같다. 계속 읽어주세요.)
이따금 마주치던 유고(Hugo)라는 이탈리아 친구입니다. 여자친구와 같이 왔는데 알베르게에서 연주를 못하게 해서 인근 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연주 중입니다. 약 20분 정도 이어졌던 너무 감미로운 시간이었네요.
사진은 가급적 글의 내용이 전개되는 시점의 사진을 올리려고 하는데 확실히 처음 저 길을 걸을 때의 사진은 별로 없네요ㅎㅎ 그나마 쓸만한 사진이라고 찾으면 죄다 3년 뒤 두번째 걸을 때 사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