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내 첫 연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였고,
그 후 짧게는 2개월,
길게는 1년동안 약 여섯 번의 연애를 했었다.
금방 싫증나서 헤어진 적도 있고,
정말 뜨겁게 사랑한적도 있다.
남자는 군대갔다오면 어른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전역하고 나서 처음 만난 그녀가 내 마지막 여자가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그해 말,
사귀면서 알게된 엄청난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A항공사 승무원 이였으며,
나를 만나는 동안은 교육 대기기간이였던 것이다.
교육 대기기간이란,
입사시험에 합격을 하면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 개월 뒤 입사하게 되는데,
그 기간을 교육대기기간이라고 한다.
유니폼 입은 승무원 언니와의 로멘스...
그리고 혹자의 머릿속 혹은 많은 남자의 머릿속에 스치는 유니폼 플레... 컥!!. 이건 아니고
사실 덜컥 겁이 났다.
승무원이란 직업.
참 말도 많고 구설수도 한푸데기씩 쏟아지는...
지금 이 싸이트에 유니폼 입은 언니사진 한 장만 올려놔도,
답글이 수십개씩 터지는
논란의 잭팟
그 직업을 가진 여성.
상당히 눈도 높을 것이고,
내가 모르는 사생활도 있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혹은 내가 겪은 그대로,
참으로 순수하고 착해서,
통장이 잔고 7,000원인 내가 불쌍해서,
집에가는 버스비도 손수 찍어줬고,
티비에 나오는 조인성의 팬이면서도,
빈말이라도 니가 안아주는게
조인성 손한번 잡는 것 보다 훨씬 좋다고 열변을 토해내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가 승무원이란 것을 알게 된 후로,
그녀가 더 좋아져 버리게 됐다.
그녀가 돈을 많이 벌고,
누군가는 부러워 하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서 더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준 남자가 최고의 남자라고 금강석으로 코팅해 버리는 그녀가
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몇일 뒤 그녀는 교육을 들어가게 되고,
나는 약 5개월간 노가다로 모은 뭉텅이 돈을 들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아마 그녀와 내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 중 가장 긴 시간이 아니였나 싶다.
<승무원 교육은 굉장히 힘들어서 3개월 동안은 매일 울다시피 하고,
잠도 하루에 두세시간 밖에 못잡니다. 고로 내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는 겁니다.>
처음 외국에 발을 디뎠을 때는,
내가 밟고 있는 이땅이,
세계사 시간에 종교전쟁이 터졌던 그 나라라는 점에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엔 그녀만 생각났고,
약 한달 1주를 계획했던 나의 배낭여행 계획은 3주부터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녀가 보고 싶었다.
여행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하다가,
내가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쓴 그녀의 이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더는 고민 안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그녀에게 가는 것이 더 큰 의미라고 생각했다.
여윳돈이 별로 없어서 좋은 선물은 못샀지만,
각국을 돌아다니며 하나 둘 사서 모은 잡다한 기념품을 들고,
꼴에 명품이라고 산 샤넬 립스틱 하나 더 챙겨서,
여행이고 뭐고, 에펠탑이고 자시고 다 접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과 마음을 실었다.
미리 전화도 안했다.
아니 전화할 여유도 없었다.
그냥 굉장히 뜨겁고 벅찬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였다.
한달동안 떨어져 있으면,
어렸을 적 연애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불장난처럼 서서히 식어갈 것이라고 걱정했는데,
떨어져 있는 내내 숨쉬는 것 빼고는 그녀 생각을 안해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식기는커녕 더 단단하고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초인종 소리에 슬며시 문여는 그녀를 보고 다짜고짜 덥석 껴안고 키스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연애”라는 것은 말 뜻 그대로 사랑의 연결을 뜻한다.
세상 모든 연인들은 사랑을 하기 때문에 연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애라는 것이 끝을 결정짓고 시작하면 그 깊이가 굉장이 얕다.
하지만 그 끝을 생각하지 않으면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쉽게 말하면 이 여자와 평생을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그 연애의 분위기는 굉장히 진지해 진다는 것이다.
1부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그녀와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딱히 계산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막연히 선생님을 좋아하던 그 짝사랑의 기분으로
그냥 좋다고 쫓아 다니기만 했다.
나는 학생이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시간 밖에 없었고,
그녀가 외국에 나가 있는 날에는
잠시 정신이 돌아왔던 것 같다.
여기서 정신이 돌아온다는 말은,
복학생이 흔히들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 정도.
복학생이였던 2년동안,
나는 그녀에게 보여준 것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4년짜리 대학교,
별볼일 없는 공돌이.
혹자처럼 상위 대학교에 나와서 번듯한 자격증 준비 그런 것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하되,
그냥 운 좋아서 대기업 들어가면 그것이 다라고 생각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앞길 막막한 청년이였다.
그 막막한 청년은 준비고 뭐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뭐고,
그냥 마냥 자기만 좋다고 칭얼대는 어린 대학생이였단 것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2년이 넘게 흘러,
졸업할 때가 됐고,
그녀는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남자..
나를 너무 사랑해주는 이남자.
자신의 말에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아닌 죽을 수도 있는 이남자.
다 좋은데,
미래가 걱정이다.
밥벌이야 하겠지.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생각하는 그녀는
당신들께서 생각하는 그녀는 너무 이쁜 딸이라서,
남들이 어려운 결정해서 보내준다는 해외여행도
이젠 지겨워서 싫다고 할 정도로 자주 보내주고,
임용고시 준비하는 언니 학자금도 내주고,
키도 크고 늘씬한 내 이쁜 막내딸을
별볼일 없는 잡대학 잡과 대학생한테 내주려니,
무척이나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내내 비밀아닌 비밀연애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바보같은게,
왜 그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끈기도 근성도 없는 그냥 마냥 착한 모습만 보여줬을까 싶다.
사랑한다고 모든 것이 다 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너무 이기적으로 그녀에게 사랑만 구걸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깨달음은 졸업장을 받는 동시에
나에게 사람구실 혹은 남자구실이라는 억압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준비해서 대기업은 못가더라도,
그냥 이름 있는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취직한 나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준 그녀는 눈물로 안아줬고,
나는 이제 순탄하게 그냥 같이 살 수 있는
믿음직한 남자가 되었다는 착각만 한 것 같다.
애초에 그녀,
나에게 억대연봉을 바란 것도 아니다.
둘이서 알콩달콩 살면서 돈도 모으고,
나중엔 번듯한 집도 사서
같은 취미를 가지고,
그녀가 혼자 해외나가서 구경하는 좋은 것들을 같이 보고,
그녀가 혼자 해외나가서 먹는 맛있는 것을 같이 즐길 수 있는,
늘 같이 있고 싶어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결혼”이란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뭐든지 늘 쉽게 생각한다.
“결혼?”
식올리고 단칸방부터 세수대야 하나만 사서 모으면 되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일하면서 받는 쥐꼬리 봉급으로는,
돈을 모으기는커녕 나 혼자서도 먹고 살기 빠듯하며,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은 있었는지,
여자가 버는 돈 가지고 먹고 사는건 안된다라고,
어떻게든 내 봉급으로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한달에 돈 100만원 저축하면 한달은 풀죽으로 연명해야 되는 초년생의 돈벌이는,
신속하게 한 가정의 꾸림을 꿈꾸는 스케일에 부합되지 않는 원대한 허풍이였을 것이다.
당장.. 결혼식장 예약할 돈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그리고 이런 잡생각은 그녀와의 격차에 자격지심을 불러,
회사를 그만두는 불상사를 일으키고 만다.
1년을 백수로 보냈다.
영어도 공부하고, 진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도 하면서,
돈은 남자가 벌어야 된다는 자존심만 입으로 살리면서,
정작 그녀를 만날 때는 커피값도 벌벌 떨 백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면목도 없고 극단적인 고민도 했다.
혹시 내가 지금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그녀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이 아닌가 하는 바보같은 생각...
피토할 때까지 노력이나 해놓고선 그딴 생각했으면 “바보”라는 단어를 붙이진 않겠지만,
고민만 할 뿐,
부모님이 주신 학원비로 영어학원이나 다니는,
진짜 바보가 되어,
동기들 친구들 사회에 발가락이라도 한 개 집어넣어보려고 발버둥 치는 그 와중에
친구한테 빌붙어 술이나 얻어먹으면서,
고민이나 하는 그런 바보...
머리털이 다 빠질 지경이였다.
빨리 같이는 살고 싶고,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그러던 중 나를 자극하는 일이 터졌다.
그녀를 만나고 집에 오는 버스안에서
사람들 많은 그 버스안에서 다큰 남자놈이 질질짜면서
아랫입술을 피날 때 까지 물어뜯는 그 일...
그날도 여느때처럼 그녀의 집앞에서 집에가기 싫다고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징징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 돈은 없었고....
정말 어쩔수 없이 비참하게 그냥 나 집에 갈게 하며 돌아서는데,
그녀가 잠시 기다리라면서 집에 올라갔다.
그리고 큰 가방 한 개를 가지고 내려왔다.
“오늘 저기가서 자고 가자”
집 앞에 있는 숙박업소, 모텔이라고 부른다.
평소 어두침침하다고 피씨방, 노래방도 안가는 그녀였다.
물론 연애 4년차에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는 “동침”은 여러번 있었지만,
그녀랑 숙박업소에 가서 뒹군 적은 없었다.
그녀의 철칙이자 소신으로,
숙박업소는 불륜사이의 남녀나 찾는 납득이 어려운 곳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집이 비거나,
일찍 결혼한 그녀의 언니 집이 아니면 살을 섞을 장소도 없었다.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셈으로 나 또한 가고 싶어서 가끔,
진짜 이상한 곳 아니라고 그녀를 설득해 봤지만,
그녀의 친구들도 가끔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못가겠다는 그곳을
남들 다 덮는 이불이 싫고,
남들이 그곳에서 뭔 짓을 하는지도 알아서 자꾸 싫다고 생각하는 그곳을..
그날밤 같이 가서 자자고 나온 것이다.
내 주머니에 모텔비 4만원도 없어서
가도 고민이였던 나의 손을 잡고
카운터 앞에서 몰래 카드를 주머니에 넣어주며
“니가 계산해”
라고 한발짝 뒤에서 얘기하던 그녀,
첫 번째로 그 상황에서 같지도 않은 자존심에 상처 받았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내 티셔츠, 그녀의 잠옷, 칫솔, 비누 등등....
모텔은 가기 싫지만 나랑은 있고 싶기 때문에 나름 고심해서 챙긴 그것들을 보았다.
도대체..
내가 왜 좋은 것일까...
내가 남들보다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놈도 아니고,
내가 남들처럼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들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며,
내가 막말로 그녀에게 환상의 밤일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했고,
너무 서러웠고,
너무 한심했고,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를 집에 보내고,
집에 가려고 탄 버스에서 지갑을 열었을 때,
꼬깃하게 접혀서 카드 꼿이에 들어있던 만원권 두장과 수표한장...
버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집에서도 울고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그녀를 향한 복잡한 심정이 나를 자극했다.
1년간 공부했다.
진로도 정했고 그것을 위해 공부했다.
내나이 27살.. 슬슬 장가가는 친구놈이 나타나고,
조바심도 나기 시작했지만,
항상 옆에서 내 궁둥이 툭툭 쳐주면서 응원하는 그녀를 위해 공부했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필요한 고시공부였는데,
애초에 1년만에 붙을 수 없는 시험이였지만,
열심히 했다.
그리고.. 보기좋게 떨어졌다.
ㅎㅎ
하지만 1차합격과 공부한 경력이 인정되어,
회사에 입사를 했고...
입사한 후 6개월 만에 그녀의 가족들 틈에 껴서 휴가를 갈 수 있었다.
5자매 중 막내 딸.
언니들 네명이서 합심하여 내편을 들어준 덕택에
미래 장모, 장인어른이 될 분들을 처음 정식 인사를 하게 된 것이였다.
그날 밤에 미래 동서들과 술을 퍼먹고,
장모님 선물입니다 하며 폭죽을 손에 들고 돌려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아침에 밤에 주은 소라를 같이 삶으면서 장모 옆에 붙어 살살 거리기도 했다.
무뚝뚝한 동서들 틈에서
혹 막내사위가 될 놈이 잘난건 없어도,
사랑스럽기라도 해야되기 때문에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했다.
그 결과,
한번씩 두 번씩 그녀의 집에 놀러가게 되고,
급기야,
같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방을 허락해줘
이른바 “성지”라고 여겼던 그녀의 방에서 잠을 자고 출근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느 예비부부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서로의 부모님께
“아버님, 어머님” 하는 묵언의 결혼할 사이로 진전을 하게 되며,
경상도인 우리집과 전라도인 그녀의 집 부모님 식구들이,
남과 북의 정상회담에 이르는 상견례에 이르게 됬다.
옛 사람들의 성격상 두 지방의 어른들이 행여나 안좋은 감정으로
안좋은 이야기를 하실까 걱정도 했었지만,
한시간만 더 있었다가는 우리 아버지가 장인께 형님이라고 하실까봐
급히 마무리 하는 훈훈한 상견례로 성공리에 끝나고,
2009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날,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도 사랑만으로는 니들이 제일 잘나가라는 한쌍의 바퀴벌레가
부부가 되어버리는 역사적 예식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날 같이 있었던 친구들 여섯명은
촌스럽게도 빨간 나비넥타이를 메고
노래를 잘 부르든 못부르든 남들이 부러워하는 축가를 불러주었고,
예식내내 고지식한 집안 어르신들은 제발 신랑 입좀 다물라고 핀잔을 주셨지만,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모든 사진에 헤벨레하게 찍혀버린 내가 있었다.
2011년 10월 27일 현재,
이제는 슬슬 아이를 만들어 단란한 가정을 완성하자고 노력하는
모자란 남편과 이쁜 승무원 아줌마가,
생기라는 애는 안생기고 사랑만 더 깊어지는
용인의 아파트 한 전셋집에서 오늘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