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건데기만세 작성일 11.11.30 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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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5살 우리 아버지.

한달 동안 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수십번 발을 옮겼다.

 

우리집,

굉장히 평범한 집안이다.

아니 남들보다 조금 잘사는 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군에 속해 있으셨던지라,

누나, 나, 부모님 이렇게 네식구

누릴꺼 다 누리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누나도 시집을 가고,

나도 장가를 가고..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참 많이 맞았다.

교과서 잃어버렸다고 맞고..

학교 끝나고 학원 재꼈다고 맞고..

어머니 말 귓등으로 듣는다고 맞고..

담배 피운다고 죽을 듯이 맞고..

아버지 차 몰래 끌고 나갔다가 들켜서 맞고..

 

키가 작으신 아버지는

내가 당신보다 더 커지기 시작하자

더 굵은 몽둥이로 더 심한 발길질과 주먹질로 나를 다스리셨다;;

 

나이든 사람들 늘 말하는 것이지만,

전부 나 잘되라고 때려 주신거니까

지금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울 나이가 되니까,

어느 순간 몽둥이로 나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진다.

 

장가가고 3년,

자주 집에 못 들려 죄송스러운 마음이 한푸데기다.

 

그날 부모님 뵈러 가는 차 안에서

와이프와 다툼이 있었다.

둘다 폭팔했고,

침을 앞유리에 튀어가며 설전을 벌인결과,

부모님댁에 도착해서는,

하나는 질질짜고,

하나는 씩씩 거리면서

둘이 두갈래길로 갈라져서

나는 집으로 올라가고

와이프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며느리는 어디갔노?"

"어..어..요앞에 잠깐..."

부끄러웠다.

행복하라고 전세집 마련해 주시고,

김장 하자마자 도와주지도 않은 아들 내외 불러서

팩이 터지도록 김치를 싸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방글 거리며 들어와도 모자랄 판에,

둘이 싸워서 인상쓰면서,

마누라 도망이나 가게 만들고 ㅎㅎ...

전화 했더니 받지도 않는다.

찾아오겠다며 집 근처를 뒤졌더니,

케익 한상자 사들고 눈물을 닦으며 털래 털래 걸어오는

키가 참 큰 저 아줌마...

어르고 달래서 집에 손잡고 들어가니

아버지는 무안하신듯 허허 거리시고,

어머니는 찔끔 거리는 며느리 쇼파에 앉히면서

같이 우신다;;;;

"엄마는 왜 울어"

"시끄럽다 이세키야"

발길질까지 하신다...

둘이 의견 충돌로 싸웠지만,

며느리 편 부터 들어주시는 어머니께 그냥 감사할 뿐이였다.

그런데..

"느그 아버지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니까지 와카노"

 

어젯밤에

아버지와 친구분의 통화 중에 우연히 엿듣게 됐다는 아버지의 검진결과.

며칠전 아버지 친구분 주치의가 친구 따라 우연히 병원에 들어간 아버지도 덩달아 피검사 받아보시라고 해서,

그냥 피 조금 뽑아 검사했던 결과가 안좋게 나오셨다고 한다.

손끝과 발끝에서 저림이 느껴졌다.

목 뒷덜미에서부터 머리털이 서는 느낌이였지만,

나까지 당황하면 어머니 통곡 하실까봐 담담한 척 아버지께 물었더니

어머니 질타하시면서

검진 결과표를 내미셨다.

정상수치가 나열된 검진 결과를 지나,

췌장수치, 갑상선, 전립선 수치가 무척 높게 나오셨다.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결국은 어딘가에 병이 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너무 빨리 나에게 힘든 시기가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한 것은,

가족들 걱정할까봐,

큰병원 검진 예약을 몰래가서 다 잡으시고 계산까지 마치시면서도

일말의 눈치 한번 안주셨던 것이다.

경상도 남자,

아니 이시대의 아버지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던가.

시골에서 고모 네분 밑에 두고 서울로 상경하셔서,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 중매로 어머니 만나시고,

일년에 제사 아홉번 모시면서,

아들놈은 말 더럽게 안들어 쳐먹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맨날 오락실 다니고

좀 크면 알아서 하려니 했더니만,

학교 성적표 받아오는 꼬라지 보니 예체능 점수만 일등급이다.

아들놈이 붓과 물감과 운동복 보다

책과 친하여 사회의 두뇌에 섞이길 바랬던 아버지는,

클 수록 실망만 주는 아들에게

어느순간 남한테 피해나 주고 살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가족에겐 언제나 무뚝뚝하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씀 못하시는 가장이라는 무게 중심의 위치에서

어찌보면 악역이란 중책을 맡으셨고,

그 결과 노년엔 피와 땀, 아니 목숨을 바쳐 기른 자식놈들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듣기 조차 어색한 우리의 아버지들...

 

이제는 행여 짐이 될까봐

당신 스스로도 자신의 검진결과에 겁이 나셨겠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겁난다라는 표정한번 내지 못하시고

그냥 대인배적 기질 발휘하시며 혼자 삭히려고 하셨을 것이다.

 

원래,

평소대로라면 집에 운전해 오는 그 차안에서

아까는 어쨌느니 저쨌느니 하면서 와이프와 2차전을 벌였을 지도 모르지만,

그날은 그냥 목놓아 울었다.

운전도 못할 지경으로 그냥 넋놓고 울었다.

장가갈 때 전세집 비용 주시면서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셔서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우리집 제사가 너무 많아서 우리집은 왜 이러나 생각하는 것도,

왜 저렇게 무뚝뚝하셔서 가족들 힘들게 하나 생각하는 것도,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투정이였던 것을

아버지 65살 생신이 일주일이나 지난 후에

나이 33살이 되고 난 후에나 알게 된 내가 너무 못나서 화가 났다.

 

검사는 CT, 피검사, 조직검사 등등 한달동안 수차례 지속됐다.

그 때마다 회사에서 조퇴하거나 연차를 내서 아버지 옆에 묵묵히 따랐다.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아버지 가슴은 타들어 갈 것이다.

그냥 아무말 없이 아버지 겉옷이나 챙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못오시겠다고 했다.

아버지 또한 병원은 같이 갈곳이 아니라면서

굳이 쫓아오겠다는 며느리 집에 앉혀놓고,

아버지보다 키만 한뼘 더 큰 나이들고 철없는 아들만 데리고 검사를 다니셨다.

 

그리고..

어제 검사에 대한 모든 결과가 발표됐다.

아무 이상 없다고 했다.

검사기간 한달 사이에 몰려있던 제사만 네번이였는데,

정성스럽게 소원을 빌었던 것이 이뤄졌는지 몰라도

연세 때문에 나타나는 일종의 약간 이상 증세만 있다고 했다.

 

"아버지"란 존재.

나도 아버지란 존재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적어도 철없을 시절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고 떠벌렸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다.

그냥 아버지 만큼만의 위인이 될 수 있어도 나는 정말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아버지 손한번 잡지 못했다가,

검진 결과 있는 날 저녁에 아버지 손을 처음 잡아봤다.

거칠고 듬직한 그 느낌.

오늘 저녁에 싱거운 아들은 아버지한테 전화를 또 드릴 것이다.

솔좀 그만 드시라고 타박하겠지만,

아버지도 나도 그 타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즐거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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