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잖아.....우린 벌써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잔아. 너도..나도..' '그래. 그렇지..오래전부터..그치만...' '나 그만 갈게.. 더 있을 필요 없는 것 같아.'
세영의 말을 끊고 일어서는 영준을 잡을 용기가 없다. 영준이 앉았던 의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가 없다. 오늘, 사랑은 죽었다.
4년전-
'여보세요? 응. 아니? 나 지금 도서관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야. 아지트에? 정말? 우와. 나도 갈래. 아니, 지금은 안되고 이따가. 아냐 공부하러 가는거 아니라 책만 빌려서 나올거야. 응 오케이.'
세영은 왠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평소같지 않게 아침마다 짜증을 돋구던 알람이 울리기 전에 미리 눈이 떠진 까닭에 모처럼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상쾌하게 학교에 온 탓일까.
'어머, 세영아! 민주한테 연락받았어? 애들 아지트에 모여 있데.'
방학동안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와 오랜만에 만난 진희.
'기집애, 들어왔으면 연락이라도 좀 하지. 남자라도 만나서 아예 눌러 앉은 줄 알았잔아.' '안그래도 들어오기 싫어서 죽는 줄 알았어. 킥. 아무리 눈씻고 찾아 봐도 진수만한 애가 있어야 말이지.'
진수는 같은 과 동기 진태의 동생이자 이번에 우리과에 새로 들어온 02학번 후배이기도 하다.
'영어공부는 많이 했어? 어때? 외국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겨우 4주일 연수갔다와서 해결될꺼면 누구나 영어 다 하게? 그냥 쉬다 온 거야. 머리도 식히고. 근데 민주한테 연락받았냐니까? 너 아지트 소식 들었어? 거기 알바생이 모델 뺨친다던데?' '그래? 안그래도 방금 민주한테 전화받고 도서관 잠깐 들렀다가 가기로 했어. 넌 지금 갈거야?' '아니, 나도 어디 들를데가 있어서 좀 늦을 거 같아. 암튼, 이따가 보자.' '응, 그래.'
아지트는 대학 신입생때부터 줄곧 친구들과 온갖 수다를 떨며 시간을 죽이던 학교앞 카페 겸 호프집이다. 원래 처음에는 우리 00학번 동기들의 각종 스터디모임이나 회식장소로 쓰이다가 어느새 우리들의 동아리방처럼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아지트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민주야~~~!!!' '세영아! 너무 오랜만이다~ 방학동안 뭐 하느라 그렇게 얼굴 한번 안 비쳤냐? 그러다 돈독 오르겠다 야' '헤헤 그냥 알바 몇개 하다보니깐 그렇게 됐어, 그나저나, 이야~ 너 되게 이뻐졌다. 쌍꺼풀 너무 자연스러운거 아냐? 킥킥' '에이, 뭘, 원래 본판부터가 남달랐잔냐, 근데 어색하진 않아? 잘 된거 같아?' '응, 상상했던 거 보다 훨씬 예쁜걸? 칫, 기집애, 살도 많이 뺐는데? 시집가려고 작정한 거 같다?'
'야, 세영이 너는 민주밖에 눈에 안 들어오냐? 우리한테도 신경 좀 써 주시지?'
휴학하고 지금은 유학준비를 하고 있는 진태와 그 옆에 방학사이에 진태의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미진. 그리고 우리의 범생이 박준용.
'아 미안~~!!! 다들 만수무강 하셨습니까? 근데 너희 두사람! 도데체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되긴 뭘. 보면 모르냐? 외로운 솔로들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뭐.' '쳇, 이제 너네들 아지트 출입 금지얏.' '그런게 어딨냐? 니가 여기 사장도 아니면서. 우리 사귀는데 니가 보태준거 있어?' '히히 농담이야, 근데 의외로 좀 그림이 사는데? 묘하게 잘 어울린다 너네들~' '당근 잘 어울려야지. 너같으면 안 어울리는데 사귀겠냐?' '참 나, 예의상 해준 말 갖고 거들먹거리기는. 준용아~ 왜 말이 없어? 나 안 보고 싶었어?' '그냥..훗. ' '참 너 토익 900점 넘었다며? 진짜야??' '겨우 넘은거야, 운이 좋았지. 저번 달에 문제가 좀 쉬었었어.' '우와, 그래도 정말 대단해, 우리 친구들 중에서 니가 제일 대학생답다, 야 히히.'
방학이 끝난 후의 아지트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언제나 조용할 날이 없다. 특히 가장 큰 이슈는 역시나 진태와 미진.
'야, 너네들 한턱 크게 쏴야 되는거 아냐? 너네들 커플된 거 어떻게 보면 우리 공이 큰 거 알지?' '웃기시네~ 너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맨날 훼방이나 놓고. 미진이한테 몰래 작업하느냐고 나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음흉한 자식, 다같이 맨날 술먹을 땐 미진이같은 스타일 별로라고 핀잔줬던 거 다 뻥이었단 말야?' '짝사랑의 고독함을 너희같은 무지한 중생들이 어찌 알겠냐. 쯧쯧.'
'세영아, 화장실 가자.' '그래'
민주가 화장실에 같이 가자고 할 때는 으레 뭔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너 그거 알아?' '뭐?' '다음주에 영준이 휴가 나온데..' '...아..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뭐야. 그 말은.. 다 잊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글쎄..잊었다기 보다는..버렸다는 표현이 맞겠지...' '...기집애, 그렇게 난리브루스를 칠 때는 언제고, 암튼 잊었다니 다행이네. 난 또 니가 괜히 또 신경쓸까봐 걱정돼서.' '아니야, 다 옛날 일인걸 뭐. 이젠 괜찬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그렇다니까. 걱정 마셔. 천하의 김세영님을 뭘로 보고, 짜식.'
영준은 나를 사랑했었다. 물론 예전에. 나도..사랑했던걸까..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현실적인 느낌을 안겨준 사람. 그리곤 떠나간 사람. 그 사람이...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