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3

생갈비전문 작성일 06.05.21 12: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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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 다들 앞에 잔 하나씩 들어. 신방과 새내기들 정말 진심으로 환영한다.
우선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올 한해동안 신방과 학회장을 맡게 된 95학번 문동준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들 잘하고 그냥 쌩가는 녀석들은 혼날 줄 알아라.
암튼 그동안 공부하느라 다들 고생했다. 오늘은 집에 기어들어갈 생각말고
다들 먹고 죽어. 학교앞에 잘 데 많으니까 걱정말고. 자 원샷이다.
무한창조 신방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대학생활의 첫 발을 술과 함께 시작하게 된 신입생들.
시끌벅적한 가운데 소위 좀 놀아본 듯한 녀석들은
홀짝홀짝 주는데로 잘 받아마시며 선배들한테 농담도 건네면서
벌써 몇몇은 형 동생하며 죽이 착착 맞는다.
반면 한 쪽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셔보는 친구들이
이미 얼굴이 시뻘개져서 눈이 풀리고 오바이트를 하러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하고
한 쪽 구석에서는 벌써 예비역선배들의 타겟이 된 예쁘장한 여자 신입생들은 남자선배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달싹 못 한채 술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다.

'너는 집이 어디야?'
'네. 저 창동에 사는데요.'
'어? 그래? 나도 그 근처에 사는데. 우리집 쌍문동이야.'
'아. 네.'
'창동 어디 사는데?'

환영식이 시작될 때 부터 줄곧 세영의 옆에 앉아 줄곧 한없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세영에게 말을 건네는 96학번 준식선배.

'아. 저. 그 성당 있잔아요? 피씨방많고 쪼그만 시장같은 골목 있는데 그 근처에요.'
'어? 그럼 쌍문동이나 마찬가지네. 이야, 여기서 지역주민을 만나다니. 인연인걸.'
'아. 네.'

고등학교때 몇차례 술을 마셔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작정하고 마시는 것은 처음이라서 이미 자신의 주량을 한참 넘어선 세영은 눈앞이 핑핑 돈다.

'자 한잔 마셔.'
'아..저..한번만 쉬면 안 되요..? 쫌..힘들어서요.. 술 잘 못하거든요..'
'아? 그래? 그럴래? 그럼 딱 이거 한잔만 먹구 그만 먹어. 그래두 선배가 권하는 건데.
이것만 먹구 쉬어. 내가 딴애들도 너 못먹이게 해 줄게.'
'아...네.. 감사합니다. '

한잔만 더 먹으면 오바이트 할 것 같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그 잔만 먹으면 쉬게 해준다는 말에
마지못해 잔을 들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술을 넘기는 세영.

그때.

우당탕.

'야 뭐야? 쟤 누구냐? 취했나보다. 쟤 좀 가서 부축해봐.'

벌써 남자애 하나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카운터에 쓰러져 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신입생이라서 술이 좀 약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지트 사장님께 인사하기 바쁜 학회장 동준선배.

'준식아. 우리집 키 줄테니깐 쟤 좀 내 방에다 좀 재우고 와라.'
'어? 나? 나 형네 집 어딘지 잘 몰라.'
'뭐? 너 우리집에서 술 한두번 먹었냐. 왜 몰라. 알잔아 임마'

세영을 두고 가는게 못내 아쉬운 준식.

'야 강인아 너 동준이형내 집 알지? 너가 좀 가라.'
'아 싫어 니가 가 그냥. 난 이따가 여기 이 녀석들 우리집 델꾸 가서 술한잔 더 하기로 했어.
야 그리고 어차피 너도 오늘 동준이 형네 집 가서 자야돼. 우리집 자리 없어.
거기 소망슈퍼 골목으로 쭉 가다가 두번째에서 좌회전, 첫번째에 우회전해서
전봇대 바로 옆에 초록색대문 있잔아. 가다가 몰르면 전화해.'
'알았다 임마. 에이씨.'

마지못해 준식이 쓰러진 녀석을 부축해서 가게를 나서는 찰나.

'아 씨발 진짜 좆같네.'
'뭐? 너 뭐라 그랬어? 이 새끼가 미쳤나'
'아 씨발 진짜 좆같애 이 개새끼들. 다 뒤지고 싶냐? 좆만한 것들이 뒤질라구.'

느닷없이 신입생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욕설에 너무 기가 막혀서
준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

'야 지금 저새끼가 욕한거야?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야 너 다시 말해봐 뭐라고?'

다혈질 강인선배. 여차하면 때릴 듯한 기세로 달려와 신입생의 멱살을 낚아챈다.
술판이 벌어진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 싸움판에 이미 많이 취한 학생들은
그저 재밌다는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고
몇몇 선배들은 그 욕이 자신을 향했다고 생각이 드는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야 강인아. 얘 지금 취했어. 봐봐. 완전 정신 나갔잔아. 잠꼬대하는거야 잠꼬대.'
'야 씨발 아무리 취했어도 그렇지. 남자새끼가 이렇게 인사불성 되서
선배들있는 자리에서 욕짓거리나 해 대고.
이런 새끼는 초장에 잡아야 돼. 지금 봐주면 계속 골치아프다니까.'
'야야. 너도 지금 좀 취했어. 다들 취했는데 지금 문제 일으키면 점점 더 커져.
나중에 깨어나면 맨정신일때 때리던지 잘 타이르던지 해. 지금은 정말 안돼.
그리고 다른 신입생애들도 다 보고 있는데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 응? 내가 가서 재우고 올게.'
'아 나 씨발 진짜 어이없다. 넌 씨발 내일 아주 뒤졌다고 생각해라. 이 새꺄.'

그때.

우웨엑.
우욱. 우에엑.우욱.

갑자기 들려오는 오바이트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테이블쪽으로 돌아가고
맨 구석자리 소파에선 세영이 과일화채그릇에 대고 오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우웩. 욱. 켁켁. 쓰읍. 퉷.

그리곤 이네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버리는 세영.
세영이 오바이트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던 몇몇 신입생들은
자신들도 구토가 쏠리는지 화장실로 뛰어가고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한 녀석들은 비닐봉지나 쓰레기통을 들고 곳곳에서 오바이트를 시작한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린 신입생환영식속에서 동준선배를 비롯한 학회 집행부들은
여기저기 하나둘씩 널부러지는 신입생들 챙기랴 오바이트한 흔적들 정리하랴
이리저리 바빠진다.

'형 어떡해요?'
'강인이보고 술 더 먹겠다는 애들은 집에 데리고 가서 한잔씩 더 하라고 해.
난 내일 약속있어서 가야돼. 술 먹기 싫다는 애들은 집에 보내고
저기 자고 있는 애랑 저기 저 망나니새끼는 우리집에다 재우지 뭐.
준식아, 너는 집에 가는 애들중에 상태 좀 안 좋은 애들 있으면 좀 챙겨주고.'
'아 근데 형 혼자 얘네 둘 어떻게 델구 가요. 저 여자애는 업고 가야 될 거 같은데?
제가 형네 집까지 업어다 줄게요.'
'너 혹시. 쟤한테 관심있냐?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딴 애들이나 챙겨 임마.
내가 알아서 갈테니깐.'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안그래도 늦겨울의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
창밖은 더욱 스산해 보인다.
허름한 주택가에 반지하 자취방이 으레 그렇듯 비가 오는 날이면
방바닥은 찝찝하리만치 눅눅해지고 얇은 콘크리트벽에선
차가운 공기가 새어들어와 몸을 찌뿌둥하게 만든다.

'아...머리 아파...죽겠네...'

어릴적부터 침대생활에 익숙했던 세영은
딱딱하고 눅눅하기까지 한 방바닥에서 오래 견디기가 힘들다.

'어머? 여기가 어디야? 아....집에 못 들어갔다....큰일났네...'

입학식날부터 외박을 해 버린 탓에 깨어나자마자
엄마의 잔소리가 눈에 선해 벌써부터 인상이 찌푸려진다.
저 구석엔 아직도 술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침까지 흘려가며 달팽이처럼 웅크려 자고 있는 영준이 보인다.

'아, 씨 저 자식이랑 같이 잔 거야? 아 기분 찝찝하네. 짜증나.'

지난밤에 오바이트를 한 탓에 목이 따끔거려 냉장고를 찾는다.
냉장고에는 동준선배의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난 아침부터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점심먹고 2시쯤 들어올 거야.
너네들 일어나면 분명히 12시 넘었을텐데
밥솥에 밥해놨으니까 렌지위에 북어국 끓여논거랑 냉장고 뒤져서 반찬 꺼내서 차려 먹어라.'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 나니 좀 살 것 같다. 핸드폰을 보니 어느새 정말 12시가 다 되어가고
전화기에 찍힌 부재중전화는 8통.

'아...어떡하지.'

선배가 기껏 북어국까지 끓여놓고 나갔는데 안 먹고 갈 수도 없고
혼자서 먹자니 저기 자고 있는 영준이 눈에 거슬리고
사실 별로 입맛도 없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깨워서 같이 먹자고 해야 하나. 저 놈이랑 같이 밥먹기 싫은데.
그렇다고 혼자만 먹고 나가긴 쫌 치사한데.
에이 모르겠다. 쟤는 어차피 선배 들어올때까지 안 일어날 거 같은데.'

솔직히 세영은 반지하방도 맘에 안 들고 괜히 지저분한 것 같은 느낌에
이런 곳에서 별로 밥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냥 대충 조금만이라도 먹은 티라도 내야지 하는 생각에
국그릇에 북어국을 담고 냉장고를 열고 밑반찬 두어개를 꺼낸다.

'야, 나 물 좀 갖다줘.'

아얏-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국그릇을 그만 바닥에 엎어버리고 말았다.

'물 갖다 달라니까 국은 왜 집어 던지고 난리야'
'야!! 넌 손이 없냐 왜 자다 말고 갑자기 사람 놀래키는 거야!
술 취했으면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사실 영준은 아직도 술이 안 깨서 눈은 다 풀려있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한쪽 양말은 발가락에 반쯤 걸쳐져 있는게
완전히 영락없는 반주정뱅이 몰골이었다.

'아 씨.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국 내가 엎었냐?
그거 빨리 안 닦으면 바닥에 얼룩져. 물 내가 먹을테니깐 그거나 닦아'

영준의 거만한 말투도 그렇고 자꾸 저 이상한 녀석하고 엮이는 것도 그렇고
그냥 모든 게 맘에 안들어 자꾸 짜증만 난다.
걸레를 빨아 바닥을 훔치며 밥이고 뭐고 빨리 대충 정리하고 이 집에서 나갈 생각뿐이다.

' 아 시원해. 인제 좀 살겠네. 으..속 뒤집혀 죽는 줄 알았네. 야. 여기 선배 집이지?'
'그럼 우리 집이겠냐?'
'참나 기집애가 좀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무슨 말만 하면 쏘아붙이니 무서워서 말이나 걸겠냐.'
'뭐? 싫으면 서로 말 안하면서 살면 되잔아.
어차피 너랑 나랑 원래 모르는 사이니까 학교다니면서도 서로 신경쓰지 말자구'
'야야 그래도 인제 같은 과 동긴데 어떻게 그러냐. 인생 좀 둥글둥글하게 살아봐 임마,
그렇게 까칠하게 굴면 정신건강에 해로와.'
'그럼 너나 둥글둥글하게 살아서 오래오래 백살까지 살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난 집에 갈 거니깐
너 밥차려먹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선배오면 나 집에 갔다 그래.
그리고, 학교에서 보면 아는척 안 해줬으면 좋겠어.
난 니가 정말 싫거든? 나 갈게. 안녕.'

가방을 챙겨서 부랴부랴 집문을 열고 나가는 세영.
영준은 그 와중에도 세영의 뒷모습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쳇. 기집애 말하는거 하고는. 성격이 저렇게 사나워서야 어디 남자친구는 있을래나?'

은근히 세영에게 남자친구가 없기를 기대하는 영준.
자신이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잠시 잊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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