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 0003 -저격-

NEOKIDS 작성일 06.05.19 05: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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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리 성당에서의 종소리.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유사하게 흘러가는 겨울 뉴욕의 풍경. 그렇다. 적어도 내가 이 곳으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내가 이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사실은 조금의 시간 이후, 그 거리의 그 시간이 적어도 다른 날과 유사하지 않고 아주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사실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저격용 PSG-1의 스코프를 매만졌다. 이 스코프는 누군가가 특별히 제조해 준 것이었다. 특수한 도료에 반응해서 그 특수도료를 밝은 색으로 표시할 수 있었고, 그것은 조명 상황이 어떻든 간에 그 특수도료의 색을 돋보이게 해준다. 물론 그 도료는 이런 스코프로 보지 않으면 묻은 것조차 모를 정도로 투명한 것이다.



이 스코프를 건네준 자는 나와 거래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전화로만 통화했을 뿐이고 만나본 적은 없다. 그는 복수를 원했고 나는 돈을 원했다. 그가 가진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고 내가 가진 기술은 그의 복수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청부살인이 이번으로 스무 번째다. 스무 번을 하면서도 꼬리조차 잡히지 않았던 건 증거인멸에 관한 한 세심하게, 그리고 이탈에 관한 한 신속하게 해치우는 내 철저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죽일 때마다 돈은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몇개의 위장계좌에 돈을 나누어 넣고 있을 수 있을만큼.



이라크전 이후 델타포스팀을 제대하면서 나는 바로 해외 파견 근무지에서 본토로 이사했고, 따뜻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본토의 사정은 부시가 떠들어댄 것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어떻게 겨우겨우 안정된 직장을 찾는가 싶었다. 유수의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회사는 부도가 나버렸고,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 상태로 5년이 지났다. 그런 일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연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차피 근무일수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것으로 아내와 딸아이 교육까지 해결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올해로 스무살이 된 딸아이는 착실하게도 자신의 처지를 일찍 깨닫고는 열심히 살아주었다. 아내도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그런 딸과 아내를 보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 내 전공을 살리기로 했다. 저격으로 살인하는 것.



지난 날의 상대가 이라크의 게릴라 간부들이었다면 이번엔 타겟이 누군가가 죽여주길 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조금 다를 뿐이었다. 어차피 누구나 다 죽게 되어있고, 그걸 내가 조금 앞당겨줄 뿐이다. 아내와 딸은 아직도 내가 새로운 직장을 잡아서 많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줄 안다. 연봉과 관련된 세금계산서 등의 서류를 꾸며대던 골치아픔도, 사무실 하나를 잡아놓고 번듯이 일하는 것처럼 꾸며대고 있는 거짓들도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비하면 참아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딸아이를 대학도 보내고 따로 시내의 공동주택까지 세를 들어주어 독립해서 편히 자신의 생활을 챙길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일만 해결되면 또다시 당분간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또다시 위장된 사무실로 위장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다음 일거리가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스코프는 어느 정도 조율이 되었다. 아주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이런 특수 스코프와 PSG-1 저격소총, 그에 맞는 수작업된 마운트링까지 구해주려면 여러모로 수완이 있어야 할텐데, 이 사람은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안된다는 듯이 일주일 안에 무기는 물론 저격 장소와 퇴각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타겟이 그 시간에 그 곳을 꼭 지난다고 하니 놓치지 말라는 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주면서. 그 특수도료를 타겟에 바르는 것 역시 물론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다. 난 그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방아쇠를 당기고는 총을 그대로 놓은 채 도망나오면 된다. 이전 열 아홉번의 일에 비하면 비용도 들지 않고 귀찮은 일도 없어 손바닥 뒤집기였다. 시계는 오후 정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엎드려 사격자세를 잡았다.



어깨에 개머리판을 견착시키고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컨디션은 충분했다. 스코프의 레이저 거리측정으로 나온 정도는 800여m 정도. 십자선 영점은 1000m로 조준해놓았으니 십자선의 중심선 위의 눈금 2번째 정도 사이를 조준하면 될 것 같았다. 풍향은 좌우로 0.5 정도의 편차. 기온은 낮으니까 공기밀도가 높아져서 탄도 포물선의 상하변화는 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에서 아래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중력과 탄의 무게에 따른 계산까지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스코프에서 최적의 조준점을 정하고는 목표가 그 거리 인도의 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그만큼의 예측까지 어림잡아서 사격을 하는 이미지 훈련을 시작했다. 목표는 8시 20분 경에 지나간다고 했다. 바람이 갑자기 살을 에일 듯이 불어왔다. 이런 높은 곳의 바람은 저격에도 몸에도 좋지 않다. 사격 시에 바람이 불어 탄도를 휘게 하지 않도록 사격 순간을 조절해야 할 것 같았다.



드디어 목표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코프 안으로 머리를 예쁘장하게 마무리한 뒤통수가 보이는 것이 여자인 것 같았다. 그 묶은 머리의 뒤통수에는 그 특수도료가 잔뜩 묻어있다. 스프레이 같은 것으로 뿌린 것 같았다. 아니면 스프레이로 위장된 그 도료를 자신이 직접 발랐든가. 어쨌든 상관없다. 나는 들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후,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방아쇠의 압력은 전에도 확인했듯이 여전히 좋을 것이다.



타겟은 얼핏 비춘 빛으로 보기에 진홍색 파카를 입은 채 어두운 거리의 길을 가고 있었다. 스코프 안에서 조금씩 도료가 묻은 뒤통수의 움직임이 보였다. 바람은 아직 줄지 않았다.

좀더 인내심을 가져야만 했다. 천천히 안전장치를 단발로 놓았다. 타겟은 뒤통수만 보인채 계속 걸어가고 있다.



예상한 스코프의 지점에 도료 묻은 뒤통수를 갖다 놓았다. 바람이 너무 오래 불고 있다. 다시 계산을 했다. 조금더 스코프의 조준점을 움직였다. 방아쇠는 나도 모르게 당겨졌다. 반동까지 이어지는 게 깨끗한 느낌이었다.



제대로 날아갔다! 그리고 역시 제대로 맞았다. 방아쇠를 당기고나서 1초 후, 타겟이 쓰러진다, 밝은 색으로 빛나던 도료의 한가운데 뻥하고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타겟은 허물어졌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타겟의 이마 앞은 모조리 함몰되어 뇌수가 튀고 피가 넘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짧은 시간 명복을 빌고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총은 그들이 처리해 주기 전에 좀 더 철저히 하기 위해 총신의 나선강들에 특수한 꼬질대로 모두 흠집을 내고.



뛰다가 숨이 좀 가라앉을 때가 되었을 때는 어느덧 그 거리에서 다섯 블럭쯤은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딸이 나와 살고 있는 블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가면 딸아이가 사는 집이었다. 지금은 별로 때가 안좋은 것 같았다. 딸를 보기엔 옷차림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다지 썩 좋지는 않은 셈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죄책감 같은 것을 좀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딸아이를 보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갔지만 딸은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그래도 집엔 있겠지 싶어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딸아이의 공동주택 현관이 보였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이른 시간인데 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면서, 나는 가서 지긋이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른 것뿐인데도 방금전의 한 일에 대한 흥분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불이 켜지고, 딸아이가 문을 벌컥 열어주면서 함박웃음을 짓겠지. 아니면 어떤 남자애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걸 나에게 들켜버리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든 간에, 나는 딸을 보면 방금 전 내가 했던 짓일랑은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재차 벨을 눌렀다. 하지만 공동주택 안쪽으로는 불조차 켜지지 않았다. 집에는 없는 것 같았다. 실망을 안고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서 세 블럭쯤 떨어져 주차된 차로 가면서 차 열쇠를 찾았다. 그런데 그 때, 내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혹시 딸아이가 건 것이 아닐까 싶어 기대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이미 기절해서 실려간 뒤였다. 나도 정신이 없어 운전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왔다. 나는 정신없이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어딘가 긴 복도를 달려가서 어둑한 골목으로 꺾어졌다. 그 끝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제꼈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고는 팔을 뻗어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뛰어온데다가 나이를 먹었다고는 해도, 10년을 다듬어온 내 기운을 사람들이 이겨낼 수는 없었다.

실갱이가 벌어졌고, 담당형사가 조용히 손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막았다. 그제서야 나도 진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손은 덜덜 떨려오고 다리는 풀리고 입 속에선 침이 말랐다. 담당형사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뭔가 유류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앞에 딸아이의 피에 젖은 신분증과 면허증을 건네주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주저하는 듯 하다가 마지못해 피투성이의 천을 걷었다. 얼굴이 이마부터 턱까지 모두 날아가 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시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도서관에 다녀오다가 당했습니다. 따님의 친구가 증언해주더군요. 아주 지독한 프로인 것 같습니다. 단 한 발에 먼 거리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을 자주 해온 자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원한관계라고도 생각하기 힘든 것이 이제 20살인데 프로를 고용해서 저격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혹시 아버님은 짚이는 데가 없으십니까?"

형사의 질문이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늘어지고 공간이 늘어지고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흐릿해져 버리는 듯 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랬다. 그것을 보는 순간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그 시체가 입은 진홍색 파카를 보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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