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2

생갈비전문 작성일 06.05.19 23: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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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9년 12월 31일.

'야~ 진짜 밀레니엄 분위기 난다. 인간들 완전 많구만.'
'그러게. 아 짜증나. 사람 너무 많아.'
'왜? 좋잖아. 난 이런 분위기 좋은데'

영준과 정현은 꽤 오래된 커플이다.
무슨 이야기던 편하게 말할 수 있고 별로 재미없는 말에는 굳이 억지로 웃어주지 않는
그런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이들이 만난지도 어느새 벌써 6년이 되어간다.
중학교때부터였으니까.

'우리 그냥 딴 데 가자. 여기 너무 시끄러워.'
'안돼 벌써 몇시간을 기다렸는데 아깝잔아.'
'불꽃놀이가 그렇게 보고 싶어? 유치해.'
'야.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너한테 멋진 거 보여주고 싶어서 기껏 데리고 왔더만.'
'칫, 누가 이런거 보고 싶데?'

밀레니엄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여의도를 찾은 그들.
사실 영준은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스킨쉽을 거부하는 그녀.
늘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영준. 이들 사이엔 항상 팽팽한 줄다리기가 오간다.
하지만 영준, 오늘 날잡았다.

'나 정말 딴데로 가고 싶어. 시끄러운거 정말 짜증나.'
'야, 알았다 알았어 쳇 기껏 준비했는데. 그럼 술이나 마시러 가자.'
'술? 그냥 차마시러 가면 안돼?'
'야 그래도 밀레니엄인데. 그리고 오늘이 우리한테 마지막 틴에이지란 말야.'
'하긴. 좀 있으면 20대가 되는군. 쳇, 그래도 만으로 따지면 내년에도 십대라구.'
'아 몰라 암튼 오늘은 무조건 술마시고 싶어.'
'알았다 알았어. 술마시러 가면 되잔아. 남자가 그런거 가지고 삐질라 그러냐.'
'나 안삐졌어. 알잖아 나 안삐지는거.'
'몰르네요. 아저씨~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어찌 됐건 1단계는 성공이다.


술이라는 녀석은 참으로 무섭다.
분위기에 취해 한잔. 사람에 취해 또 한잔. 그리고 그냥 또 한잔.
한잔 두잔 홀짝거리다 보면 어느새 언어장애, 지체장애, 정신장애.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하던
또다른 캐릭터를 이끌어내는 묘한 마력을 지닌 녀석이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영준, 그에 반해 아직 의외로 멀쩡한 정현. 영준, 아무래도 오늘 날샜다.

'야, 너 취했냐? 남자가 술이 그렇게 약해서, 쯧쯧.'
'나 안취했떠. 진자라니깐~ 짜식, 오늘따라 예쁜걸?'
'그게 바로 니가 취했다는 증거야.'
'아니야. 야 솔직히 말해봐. 사실은 니가 취했지?
원래 취한사람 눈에는 취한사람만 보이는 법이야. 바부야'
'이 아저씨 진짜 맛갔구만. 야 안되겠다. 그만 집에 가자.'
'안된다니깐~~!!!'
'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쪽팔리게'
'야! 너 오늘 나랑 밤새 같이 있어줘야돼.'
'또 시작이군. 불가능하다는거 알잔아. 절.대.안.돼.'
'너 도데체 왜그러냐? 넌 스킨쉽이 싫어?'
'싫은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직은 아니야.'
'야 우리 벌써 6년이나 됐어. 그리고 오늘부로 우리 성인이야.
성인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마음 있는데 안고싶고 만지고 싶은거 당연한거 아냐?
나 정말 오래 참았어.'
'기왕 참은거 쫌만 더 참아줘. 가끔은 나도 좀 미안해. 물론 나도 알아.
어쩔땐 내가 너무 심하다는거.그래도 니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아직은...용기가 안나. 아직, 준비가 안됐어.'
'쳇 몰라, 김샜어.나 이번엔 진짜 삐졌어. 나 그만 갈래. 짜증나.'

매우 낙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준. 그런 영준에게 실망감을 감출수 없는 정현.
정현은 일어서는 그를 붙잡을 마음이 없다. 조금 유치한 듯한 그에게 많이 실망했으므로.




술도 마실만큼 마셨고, 여자친구는 항상 안됀다는 말만 하고.
뭔가 상쾌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영준에겐.
취해서 혼자 걷는 밤거리는 참으로 상쾌하다.

툭.
'어머 죄송해요.'
'뭐야? 똑바로 보고 다녀야죠.'
'네? 사실 부딪힌 건 그쪽이 먼저였잔아요.
그냥 예의상 죄송하다고 한 것뿐인데 오히려 화를 내내요.
나참 어이가 없어서..'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신이 저 뒤에서부너 딴데 쳐다보면서 걸어왔잔아.'
'아니 왜 다짜고짜 반말이에요?'
'왜? 반말하면 안되냐? 내가 좀더 나이가 있는것 같은데.
보아하니 고딩같은데 밤늦게 싸돌아다니지 말고 언능 집에 들어가거라, 아가야.'
'야! 너 열아홉이거든? 아니지, 12시 넘었으니깐 스무살이네. 너 몇살이야?'
'야! 난 스물 다섯이다. 오빠라고 불러 임마. 자식이 겨우 스무살밖에 안됐으면서.
어린애가 말야. 으른한테 그러면 못 쓴다잉'
'야, 오빠면 오빠답게 행동을 해야지 오빠처럼 보이지. 뭐? 스물 다섯?
하는짓은 영락없는 열다섯이면서.'
'뭐야? 쳇, 내가 말을 말지. 됐다 됐어. 나 지금 무척 피곤하거덩.
너 오늘 내가 피곤해서 봐주는줄 알아라.'
'웃기시네.'
'에이 몰라 나 갈거야.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알았지?'
'쳇 누가 할 소리?'

세영은 정말 어이가 없다.
어쩜 이렇게나 무례하고 유치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짜증이 났다.
안그래도 저녁때부터 잔소리투성이인 엄마덕분에 기분이 별로였는데,
별 이상한 남자까지 그녀의 짜증을 돋군다.


2000년 2월 20일 진성대학교 입학식.

'신방과 모여라!!! 선배님들 기다리신다. 언능 튀어오지 못하냐'

신방과 피켓 밑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신입생들.
모두들 한결같이 기대감 반 두려움 반 또 한편으로 어리버리한 표정들.
선배들은 신입생들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툭.
'아야.'
'아 미안.'
'아니 괜찬아.'
'어? 너 혹시..'
'어라? 너 지난번에 그 싸가지..'
'뭐? 싸가지?'
'그래. 아! 너 지난번에 스물다섯이라 그랬잔아. 이 사기꾼 같은 놈.'
'뭐? 사기꾼. 아씨 살다보니깐 별 거지같은 말을 다 들어보네.'
'야 솔직히 사기친거 맞잔아. 지두 고삐리였으면서'
'야 너 입이 좀 험하다. 여자애가 무슨 입에 걸레를 물고 다니나.'
'뭐? 아 나 진짜 짜증나네. 이런 싸가지가 진짜 잊을만 하니까 또 나타나서 속을 박박 긁네.'
'킥킥. 그래 나 싸가지다 어쩔래.'
'야야 됐다 됐어.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지.'

'어이 거기 뭐냐 너네들. 첫날부터 싸우냐? 이것들이 진짜. 빠져가지고.'

신방과 군기반장 강인선배.

'아..아뇨. 그냥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야. 동기사랑은 나라사랑이다. 알겠어? 복창해봐. 동기사랑은 나라사랑!'
'어...아..'
'빨리 안해!!!'
'아 네! 동기사랑은 나라사랑입니닷.!'
'너네들 담부터 조심해라. 아직 내가 누군지는 정확히 보여주지 않겠어.
언젠간 알게 될 날이 올거다. 부디 내 성질 돋굴 일이 없길 바란다.'

'야야 오늘 내친 김에 신입생 환영회하자. 어이 신입생들.
다들 집에 전화해 오늘 못 들어간다고.
한놈이라도 낙오자가 있을 시 나머지 동기들이 좀 피곤해 질거야.'

처음 시작하는 대학생활에 다들 어리둥절하면서
몇몇 여학생들은 난생 처음으로 외박을 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전화기를 붙잡고 진땀을 뺀다.

'자,자. 다들 전화 때렸지. 자 가자. 아지트에 자리 예약 해 놨어.'
'오케이~ 렛츠 고~'

영준과 세영은 여전히 서로를 흘겨보며 마음속으로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앞으로 그들에게 일어날 미묘한 감정을 아직 그들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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