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한낱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 나와 그의 가십거리는 멀찍이 밀쳐두자. 정작 주목해야만 할 점은, 그때부터 난 김선생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그와의 첫 만남이 있은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함께 자리할 기회가 생겼다. 아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이미 있은 후에야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와 나는 알고보니 함께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동질감이 날 엄습해왔다. 이것은 별 대단한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앞서 내가 치부라 여기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서 확인한 충격과 함께 느낀 묘한 쾌감에 비할 데가 못 됐기 때문이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인간일 것이란 생각이 주(主)를 이루는 가운데,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알고 보니 김 선생님과 저, 담당과목이 같네요.」 「그러고 보니 이 선생님도 국어담당이시군요.」 커피를 마시며 너털웃음을 웃어대는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났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날 닮은 그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편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이윽고, 미안한 듯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내게 커피를 권했다. 「이런, 저 혼자 입이라서 죄송합니다. 이 선생님도 커피 한 잔 하시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피테이블로 가서는 완성된 커피의 희생물이 될 커피, 온수 그리고 설탕을 퍼즐 조각 모으듯 능숙하게 조합한다. 그 조합작업이 끝나고 난 후, 마지막엔 얼마간의 프림까지 잊지 않고 넣는다. 그것을 보고도 미처 대답할 겨를이 없었던 나머지, 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씽긋하고 웃으며 스푼을 젓는 그의 모습을 볼 뿐, 말 한마디 못하고 고목나무마냥 쭈뼛하게 서 있으면서 얼마 후에 그 고마움에 상응하는 진실된 감사의 인사나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제 보니, 교무실의 여러 선생님들 또한 커피를 들고 있거나, 이미 마신 듯 책상의 한 편에는 커피 자국이 선명한 빈 잔이 있곤 했다. 교무실 안에는 나와 그 이외에도 몇몇의 선생님이 더 계셨다. 그들 중 한 선생님은 김선생을 웃으며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턱으로 아랠 갑작스레 찍는 듯한 호쾌한 모션이었다. 김선생은 커피를 주며, 더 못해줘 미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직 제 커피 실력이 젬병이라……」 갑자기 강원도로 여행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여행에서 잠시 들린 주문진 해수욕장에서 정신없이 모래밭을 뒹굴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대해 저항하느라 바닷물에 젖어버린 바지를 씻고, 엉겨 붙어버린 모래를 떨어내느라 수돗물을 찾은 적이 있다. 여름 때가 되면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는 장삿속을 예상한 나는 감히 수돗물을 빌려 씀에도 행여나 돈을 요구하진 않을지 걱정이 됐던 나머지, 한 횟집에서 수도 좀 아주 잠깐만 빌려 쓸 수 없을 까요?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하며 사정한 적이 있는데, 그때 주인 할머니는 그런 부탁을 일소에 무색케 하는 친절함으로 나를 맞았다. 수도를 마음껏 쓰게 해준 것은 물론이고, 한사코 뿌리치는 내 손에 기어코 커피까지 주시고야 말았다. 그때 했던 말이 이와 같았다. 자판기 커피라 맛이 없다느니, 자판기 커피라 미안하다느니……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하얗고 깨끗한 편에 속했지만, 워낙에 많은 커피의 습격을 받은 모양인지, 그의 치아는 전체적으로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강원도 할머니의 커피처럼 달콤 쌉쌀한 김선생의 커피 맛이란.
김선생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그 어떠한 학생의 말도 들어주려 노력하는 선생이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배려의 시작이다. 물론, 그것은 진실 되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 또한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면에서 그는 문제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그만의 병통은 있었다. 방학을 며칠 앞두고, 우리가 해외여행 계획 따위를 말하는 등의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김선생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표정 하게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하던 그의 낯빛이 상기 되다 못해 거무튀튀하게 변해버리기 시작했다. 「너 내가 전화하지 말랬지.」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한다. 상대방의 말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그가 내뱉은 말이 지니는 함의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평소에 내뱉던 고상한 말투 따윈 일소에 날려버리는 충격적인 말투였다. 상대방은 누구고, 그들 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아마도 여자가 아닐까? 그녀를 사랑했던 여자, 시작은 물론 젠틀하고 자상한 김선생에게 반해버린 그녀가 김선생이 쉴 새 없이 날리는 주먹에 제대로 된 방어전을 펼치지 못하고 한 라운드가 끝나기도 전, 적진에 투항을 해버린 거다. 그 후 얼마간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논리를 앞세워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급급하게 되어,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마지막 까지 착한 그 여자는 김선생을 설득해보지만, 그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을 뿐이다. 그것은 제 판단에 대해 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김선생 때문이 아닐까? 어라, 이젠 타이르기 까지 한다. 마치 선생이 학생을 나무라고 윽박지른 후에 갖은 좋은 말을 써서 얼러 달래듯. 「내가 말했지. 이쯤에서 끝내는 게 경우라고. 그게 맞는 거라고.」 물론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어떤 것일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난 이렇게 오빨 사랑하는 데, 절실히 날 원했던 그때처럼만 날 한번만 다시 봐줄 순 없겠어? 제 삼자가 볼 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신파극에 불과하겠지만, 그 여자에겐 더 없이 아프고 답답한 시간의 연속일 게다.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내 상상력은 상황이 절박할수록 더욱 활개를 친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남자가 되었다가 나이 많은 술집 레지가 되기도 하며, 마지막엔 돌연 예쁘장한 여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관계는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이런 씨팔. 선생은 늘 경건 하라 하셨거늘……불현듯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린다. 딸깍하는 경쾌한 소음이 김선생의 한숨과 함께 묘하게 어우러진다. 뒤이어 질려버린 듯한 한숨에 어울리는 협주어(協奏語)가 이어진다. 「쓰레기 같은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