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날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며칠 만에 김선생은 돌아왔다. 핼쑥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에 복귀했지만-동료 선생들도 그에게 드러내 놓고 비난을 가하진 않았지만-이미 그에 대한 인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후였다. 언젠가 그가 진정 사랑했노라고 말한 바 있는 선화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자랑스레 꺼내보였던 그 여자의 사진. 웬지 낯이 익었던 그녀의 얼굴. 모두 식상한 것이 됐다. 그럴싸하게 제 과거를 포장했을 뿐, 그 이면에는 수많은 편력으로 얼룩진 김선생의 일그러진 자유의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자유의지는 기력이 소진된, 그저 거세당한 의지에 불과하다. 한데, 그의 행태는 비단 미진과의 반윤리적인 만남에 대한 죄책감의 발로는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죄의식 그 너머에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으니까. 시니컬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한 나머지 비록 억지에 가깝지만, 기어코 그와의 술자리를 마련하고야 말았다. 술자리에서 만난 김선생이란 인물은 전에 없는 행동으로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연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켜곤, 멍하니 눈앞의 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소주 몇 잔을 들이켰다. 속이 쓰릴수록 판단력은 명확해지는 것일까. 심각한 문제에 고심하는 듯 보였던 김선생의 표정은, 사뭇 더 진지해졌다. 「김선생,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김선생은 교사요. 언제까지 쓸데없는 사랑 놀음에 골몰할 거요?」 내 스스로에 대한 비판의식을 비수로 만들어 김선생의 가슴에 꽂는다. 마치 너와 난 같은 동질감을 가졌음에도 난 너 같이 교직을 위협하는 병통 따윈 없어, 난 내 직무에 충실하다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처럼. 「내 속엔 평생 날 옥조일 감옥이 있습니다.」 벌써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는 김선생의 첫사랑, 선화란 여자의 이야기. 김선생이 갓 신입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동기의 소개로 만나 2년간의 열애, 그리곤 헤어졌다고 했었나? 그래 맞아. 그 후 다른 남자를 만나 얼마간 잘 사귀나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것이라 했었지? 교통사고로. 김선생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잊고, 교사라는 모두가 열망해 마지않는 직장을 가진 이후 그딴 상처를 덧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선화를 잊고 살아간다. 아니, 잊은 줄만 알고 살아간다. 하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임을 맡아 학생들 얼굴을 익히던 중, 선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선화를 꼭 닮은 학생, 미진이 있었다. 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눌렀지만, 미진은 늘 선화의 얼굴로 다가와 살가운 행동으로 김선생을 괴롭혔다. 결국 김선생은 선화란 존재를 속인 채 미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선화를 잊기 위함 또는 육욕 때문이었지, 절대 사랑은 아니었다고 했다. 김선생은 하루 이틀 지나면 미진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갈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고, 그의 허점투성이 하나하나를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바로, 메리였다. 아무 의미 없어지는 습관적인 행동 하나하나도 그녀와 함께라면 어느새 의미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와 함께 노를 저어 강을 건널 땐, 그를 집어삼키려는 모든 억압은 시나브로 수면 아래로 침전되어 결국엔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얌전한 강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래. 김선생의 말에 따르면 메리와 함께하는 그 순간만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존재였다. 교직이라는 무거운 책무, 역마살이 낀 듯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편력.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인 김선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존재. 메리였다.
******************************************* 괜히 전편 조회수 1인거 보니깐...저 혼자 신나서 올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 분이라도 읽어봐 주시는 게 어딜까 하는 생각에 7편 올립니다!! 이제 마지막 한 편 남았군요 다음 거는 한꺼번에 1~8까지 종합판으로 올릴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