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나의 힘 완결편 ^0^(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리고냉이 작성일 06.08.28 22: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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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나의 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갈음하는 것으로서, 왜 수많은 단어들 중 굳이 결핍이란 단어를 사용해야만 했냐는 물음에 대해 아직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날 밤 김선생에게 일어난 몇 가지 사건에 대해 말한다면 얼마간 그에게 존재했던 결핍의 정체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써본다.

그날 밤의 불길한 징조는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날 오후 들어 처음으로 그를 보았을 때 이미 그의 심기가 뒤틀려 있어 무언가 일이 하나 터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종례를 마치고 나오던 그를 우연히 본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니컬하게 질려버린 듯한 그의 형상은 누가 보아도 평소 상냥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얼굴을 표현하자면 뭐랄까, 충혈된 눈과 날렵한 콧매, 경멸적으로 웃는 듯한 묘한 입 꼬리. 내게 보인 그의 낯선 모습은 약간의 비약을 보태어 표현하면-적어도 내가 확인한 그때 그의 단면은-노스페라투를 연상케 할 정도로 괴기스러운 한편 신산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난 그 낯선 이질감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심정과, 도대체 영문을 모를 그의 행동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볼 요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말한 바 있던 그녀의 이야기. 나이와 직업에 걸맞지 않게 치기어린 사랑에 골몰하던 그 자신의 푸념 섞인 한탄이 아닐까 하고.
「김선생,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없을 건 또 무언가.」
물론 그도 생활에 불만이 없을 리는 없다. 그 누구도 고민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 하다못해 갓난 아이 조차도-물론 대게는 경미하지만-스트레스로 발달장애를 등에 업고 자라기도 하지 않는가. 이 또한 마찬가지다. 갑자기 김선생이 전에 없던 시니컬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생활 저변의 환경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아, 심리적으로 매우 날카로운 상태임을 방증하는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오래전부터 김선생은 발달장애를 겪어왔다. 질펀한 편력의 도전?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내가 김선생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본 학교로 발령을 받고, 허겁지겁 첫 출근을 하던 날, 유독 차를 타지 않고 나처럼 걸어서 먼 오르막길을 오르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주변에 여학생들로부터 꽤나 인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몇의 여학생들이 그의 양 옆을 둘러싸고 마치 그를 추켜세우듯 걸었으니 말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하며,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미소는 여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 걸음걸음을 열중하듯 내딛었는데, 나 또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걸었으므로, 우리 사이의 간격은 일정했다. 낯선 사람들이 늘 그런 것처럼. 하지만 보통, 그러한 거리감이 해소되는 계기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사람 사이를 엮어 가깝게 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그들 간의 동질감을 찾는 것이다. 남자 사이엔 군대 하나로, 축구하나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 간의 동질감은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함께 걷던 학생들을 교실로 가는 뒷 건물로 보내고 난 후에 그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이 말을 하거나, 시선을 두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그 사람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관음(觀淫). 그는 물끄러미 앞서간 한 여학생을 지켜보았다. 마치 아기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편안한 표정으로. 욕망은 이렇듯 천진난만하며, 원초적인 것에서 태어나 억압과 금기에 의해 비뚤어져 꽃 피우는 것일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자궁이라는 비좁은 욕조에도 아랑곳 않고, 유영을 즐기는 어른 아이. 교정이라는 금욕의 장소에서 또 하나의 세상, 그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자. 바로 김선생이었다. 그의 첫인상에 웬지모를 호감을 느끼고, 유사성 추정의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처음 본 누군가의 첫 인상이 매우 인상적이라면, 그것은 참 오랫동안 기억된다. 특히나 그와 나같이 일종의 동질감을 확인한 때라면 더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난 우리간의 동질감을 확신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 또한 나처럼 그저 그러할 것이라고.
「학생들이 참 예쁘죠?」
난데없이 나타난 나의 등장에 약간은 당혹스러운 듯 난색을 표하는가 싶더니, 금세 제 신분에 걸맞아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네……그렇죠? 근데 누구시더라……」
「반갑습니다. 저는 이수원 입니다. 오늘부로 이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김한기 입니다.」
반갑게 악수를 받는 그의 얼굴에 비로소 의구심은 사라지고, 낯선 반가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또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서 일종의 들뜬 마음은 있었으나 그것보다도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 그 사람의 속마음이었다. 오류를 채 깨닫지 못한 탓인지 그 또한 생각하는 바는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어느덧 초면이란 데서 오는 약간의 긴장감을 완전히 잊은 듯 방금의 그 아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김선생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학생들과 원래 그렇게 가까우신 가 봅니다.」
물론 처음 하는 인사치고는 조금 격이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욕망이 서려있다고 믿는 나는, 그라는 존재의 궁금증을 쉽게 단정 짓고 싶었다. 단 몇 마디의 질문으로 그를 알아보려 했고, 그라는 인물에 대해 정의해보고 싶어졌다. 그 까닭은 물론 어쩔 수 없는 행동의 이중적인 사고는 제쳐두더라도, 아기 같은 미소와 성적인 욕망에 목말라 하는 탐욕스러운 본능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모순된 태도의 소유자 김선생. 그때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몇 마디의 질문으로 그의 속마음을 알아보려던 계획은 일상적인 그리고 꽤나 격식적인 그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기억한다. 이 같은 한낱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 나와 그의 가십거리는 멀찍이 밀쳐두자. 정작 주목해야만 할 점은, 그때부터 난 김선생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그와의 첫 만남이 있은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함께 자리할 기회가 생겼다. 아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이미 있은 후에야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와 나는 알고보니 함께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동질감이 날 엄습해왔다. 이것은 별 대단한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앞서 내가 치부라 여기는 어떤 것을 타인에게서 확인한 충격과 함께 느낀 묘한 쾌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인간일 것이란 생각이 주(主)를 이루는 가운데,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알고 보니 김 선생님과 저, 담당과목이 같네요.」
「그러고 보니 이 선생님도 국어담당이시군요.」
커피를 마시며 너털웃음을 웃어대는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났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날 닮은 그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편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이윽고, 미안한 듯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내게 커피를 권했다.
「이런, 저 혼자만 마셨네요. 이 선생님도 커피 한 잔 하시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피테이블로 가서는 완성된 커피의 희생물이 될 커피, 온수 그리고 설탕을 퍼즐 조각 모으듯 능숙하게 조합한다. 조합이 끝나고 난 후, 마지막엔 얼마간의 프림까지 잊지 않고 넣는다. 그것을 보고도 미처 대답할 겨를이 없었던 나머지, 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씽긋하고 웃으며 스푼을 젓는 그의 모습을 볼 뿐, 말 한마디 못하고 고목나무마냥 쭈뼛하게 서 있으면서 얼마 후에 그 고마움에 상응하는 진실된 감사의 인사나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제 보니, 교무실의 여러 선생님들 또한 커피를 들고 있거나, 이미 마신 듯 책상의 한 편에는 커피 자국이 선명한 빈 잔이 있곤 했다. 교무실 안에는 나와 그 이외에도 몇몇의 선생님이 더 계셨다. 그들 중 한 선생님은 김선생을 웃으며 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턱으로 아랠 갑작스레 찍는 듯한 호쾌한 모션이었다. 김선생은 커피를 주며, 더 못해줘 미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직 제 커피 실력이 젬병이라……」
갑자기 강원도로 여행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여행에서 잠시 들린 주문진 해수욕장에서 정신없이 모래밭을 뒹굴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대해 저항하느라 바닷물에 젖어버린 바지를 씻고, 엉겨 붙어버린 모래를 떨어내느라 수돗물을 찾은 적이 있다. 여름 때가 되면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는 장삿속을 예상한 나는 감히 수돗물을 빌려 씀에도 행여나 돈을 요구하진 않을지 걱정이 됐던 나머지, 한 횟집에서 수도 좀 아주 잠깐만 빌려 쓸 수 없을까요?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하며 사정한 적이 있는데, 그때 주인 할머니는 그런 부탁을 일소에 무색케 하는 친절함으로 나를 맞았다. 수도를 마음껏 쓰게 해준 것은 물론이고, 한사코 뿌리치는 내 손에 기어코 커피까지 주시고야 말았다. 그때 했던 말이 이와 같았다. 자판기 커피라 맛이 없다느니, 자판기 커피라 미안하다느니……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하얗고 깨끗한 편에 속했지만, 워낙에 많은 커피의 습격을 받은 모양인지, 그의 치아는 전체적으로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강원도 할머니의 커피처럼 달콤 쌉쌀한 김선생의 커피 맛이란.

김선생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그 어떠한 학생의 말도 들어주려 노력하는 선생이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배려의 시작이다. 물론, 그것은 진실되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 또한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당연히 이런 면에서 그는 문제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그만의 병통은 있었다. 방학을 며칠 앞두고, 우리가 해외여행 계획 따위를 말하는 등의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김선생의 휴대폰이 울렸다. 무표정 하게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하던 그의 낯빛이 상기 되다못해 거무튀튀하게 변해버리기 시작했다.
「너 내가 전화하지 말랬지.」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한다. 상대방의 말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그가 내뱉은 말이 지니는 함의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평소에 내뱉던 고상한 말투 따윈 일소에 날려버리는 충격적인 말투였다. 상대방은 누구고, 그들 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아마도 여자가 아닐까? 그녀를 사랑했던 여자, 시작은 물론 젠틀하고 자상한 김선생에게 반해버린 그녀가 김선생이 쉴 새 없이 날리는 주먹에 제대로 된 방어전을 펼치지 못하고 한 라운드가 끝나기도 전, 적진에 투항을 해버린 거다. 그 후 얼마간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논리를 앞세워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급급하게 되어,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마지막까지 착한 그 여자는 김선생을 설득해보지만, 그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을 뿐이다. 그것은 제 판단에 대해 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김선생 때문이 아닐까? 어라, 이젠 타이르기까지 한다. 마치 선생이 학생을 나무라고 윽박지른 후에 갖은 좋은 말을 써서 얼러 달래듯.
「내가 말했지. 이쯤에서 끝내는 게 경우라고. 그게 맞는 거라고.」
물론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어떤 것일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난 이렇게 오빨 사랑하는 데, 절실히 날 원했던 그때처럼만 날 한번만 다시 봐줄 순 없겠어? 제 삼자가 볼 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신파극에 불과하겠지만, 그 여자에겐 더 없이 아프고 답답한 시간의 연속일 게다.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내 상상력은 상황이 절박할수록 더욱 활개를 친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남자가 되었다가 나이 많은 술집 레지가 되기도 하며, 마지막엔 돌연 예쁘장한 여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관계는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이런 씨팔. 선생은 늘 경건 하라 하셨거늘……불현듯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린다. 딸깍하는 경쾌한 소음이 김선생의 한숨과 함께 묘하게 어우러진다. 뒤이어 질려버린 듯한 한숨에 어울리는 한마디가 이어진다.
「쓰레기 같은 년.」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난 우리의 공동관심사인 ‘국어’와 ‘국문학’에 대한 보다 많은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대학 때부터 꿈꿔온 일인 교외 봉사활동을 계획했고, 그에게 함께 해줄 것을 부탁했다. 흔쾌한 승낙으로 돌아온 답신이 고마워 계획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도 할 겸해서 둘만의 회식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이곳엔 문학교사인 조선생도 함께 했다. 조선생 또한 김선생과 절친한 사이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내 계획에 대해 이선생이 가자면 가야지 하며 호탕한 그의 성품답게 응해주었다. 물론 계획을 세우느니 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선생과 만나는 것이 워낙 즐거운 나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으며, 그것은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하루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리를 내 보기도 하였으며, 어떤 날은 카프카의 일생에 대해 말해보기도 하였다.
그날은, 그때는 돌아가며 애창 시조를 하나씩 읊던 중으로서, 내가 막 시조를 읊은 후의 일이었다.
「…… 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난 이 시조가 좋습니다. 부슬 부슬 내리는 봄밤에 참 어울리는 작품이죠. 잠 못 드는 밤, 고즈넉한 밤공기를 마시며 잊혀져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추억해보고, 그 사람 목소리에 한잔을, 말투에 또 이야기에 또 한잔 또 한잔……이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다보면 이야기는 장진주사로 이어지죠.」
「이선생, 그만합시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짜증스런 목소리가 찾아든다.
「그만합시다, 그만해. 모두 이선생처럼 추억이 아름답지마는 않소. 이선생, 그거 알아? 추억은 지랄 같은 거요.」
평소의 김선생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애창시조를 읊었을 것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눈 주위에 결코 숙취(熟醉)로 인한 충혈이 아닌, 피로로 인한 충혈로 보였다. 그 피로는 삶에 대한 피로로, 내 이야기에 비친 세상에 대한 괴리감으로 환멸을 느끼고 역정을 내는 것 같아보였다.
「추억은 부재(不在)요.」
김선생은 도통 알다가도 모를 두루뭉술한 말들을 종종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이때 또한 그러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누군가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알다가도 모를 말을 한마디씩 한다.
우리는 말리지 않는다. 누구나 기억함에 괴롭기만 한 추억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는 한편 김선생의 추억에 있어 부재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있지 아니한 것. 그것은 없는 것이지만은 않지만 지금 있는 것이지도 않다. 난 얼마 전 그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을 떠올려본다.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잊어버리고 싶은 부재한 사람 또는 사랑에 대하여.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애써 상관없는 일로 돌리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술자리가 시들해질 무렵 거나하게 취한 김선생은 우리를 어딘가로 무작정 이끈다. 주저 없이 이끄는 것으로 보아, 그가 자주 찾는 분위기 그럴싸한 술집이겠거니 하며, 녹초가 된 몸을 옮겨 그를 따랐다. 조선생 또한 몹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함께 거나하게 마셔보자는 식의 오기로 김선생을 따랐다. 조금은 먼 곳. 한참을 걸었다. 외진 길 끝에 명물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한데, 불빛이 불그스름한 것이 충혈된 눈을 순응하게 할 듯이 비춰대는 것이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다. 요정의 겉모양을 한 한낱 매음굴(賣淫窟)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길 말하는 건가?」
조선생의 표정은 거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호기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근원적인 무언가를 갈구 하듯이. 여차하면 동료를 따라 슬그머니 출입해보고파 하는 욕정이 피로에 뒤이어 덕지덕지 찌든 얼굴로 겸연쩍게 웃었다.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 바알간 빛이 가슴아래에 뜨겁게 용솟음치는 욕정을 부채질 했으므로 하릴없이 그를 따랐다.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깊은 곳으로 온 나머지 분위기에 도취해 버린 것이다. 김선생은 꽤 자주 이곳을 드나든 것 같았다. 잘 아는 집처럼,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이내 포주로 보이는 눈웃음이 예사롭지 않은 한 여자와 함께 우리에게 왔다. 무언가에 대해 긴히 말하는 가 싶더니, 제 파트너는 지금 일이 있다며, 우리에게 먼저 방에 들 것을 권했다. 표정으로 보아,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 계집을 무척이나 아끼는 것 같다. 안타까움과 설렘으로 점철된 그의 얼굴은 꽤나 초조해보였다. 그 일이라는 것은 다른 남자를 받고 있는 것일 게다. 제 것같이 예뻐하던 계집을 선점하지 못한 슬픔. 점령당한 제 것에 대한 상실감. 훗날에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김선생의 그러한 소유욕이 여성편력에 기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인간적이고 따스한 김선생이란 인간 내면에는 욕구불만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어쩌면 그는 겉으로는 수많은 여성을 거느리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 같지만, 제 것 하나 가지지 못하고 어긋난 궤도의 간극을 조정할 수 없는 자. 그것은 상실의 인생이요, 결핍(缺乏)의 일생이 아닐까?
재촉하는 듯한 그 여자의 억지 웃음에 강박을 느끼며 방에 들었다. 작은 방. 수많은 남자들이 거쳐 간 그곳. 술과 정액이 뒤범벅이 된 후 극도의 허무감으로 끝을 맺는 그곳. 한번의 사정에는 수억 마리의 정자가 있듯. 한 번의 사정에는 그들의 꿈이 들어있다. 물론 현실 속에서의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욕구를 감내하고 좀 더 고차원적이고 진취적인 무언가로 탈바꿈하길 원한다. 한데, 욕정과의 놀음 속에서 사랑이니, 추억이니 하는 모든 것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유희로 바뀌어버린다. 욕정의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하고 춤을 추던 학문적 자세도 그 방을 거쳐 간 수많은 남정네들의 늘어짐과 같이 그 절정의 순간에는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지리멸렬한 것이 되고 만다. 욕정은 그래서 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마력을 지니는 유희(遊戱)이다. 그들의 행동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욕정에다 그럴싸한 명목을 세운다고 해도 어쨌거나 그것은 여자는 돈을 벌기위해 남자의 사정을 부추기고, 남자는 사정을 하기 위해 몸을 달구고 제 몸을 유희의 도구로 삼아 열심히 공허한 적막의 기류를 갈라대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짐승과 같은 성적 욕망의 원형(原型)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선생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빌어먹을 그 쓰레기 같다는 년을 잊기 위해 그리고 점찍어둔 그 여자를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그 부드러운 짐승을 소유할 수 있는 쾌감을 만끽하기 위해 그 또한 열심히 탐닉할 것이다. 조선생이 달뜬 얼굴로 뭐라고 열심히 말을 걸었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되는 건, 김선생과 함께 세 명의 여자가 들어왔을 때부터였다. 의무적으로 말을 해야만 하는 내 파트너도 괴로웠겠지만,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대답을 얼마간에 한 번씩은 해야겠다는 내 스스로의 강박관념이 그 자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조선생과 김선생은 꽤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조선생은 제 계집을 입안에 혀 다루듯 적어도 그 순간만은 교사라는 사회에서의 직분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그녀를 탐닉하는 듯했다. 김선생은 그 좋아하던 술과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놓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무릎에 그가 그토록 바라던 계집의 머리를 베게하고,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제야 보인다. 김선생의 그 계집이. 얼굴만 봐서는 전혀 화류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동그랗게 드러난 이마하며, 보슬보슬하게 자라 있는 아미. 길고도 촉촉하게 젖어 있는 속눈썹과 그 아래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처럼 윤이 나는 눈동자까지. 거기서 그칠 수 없다. 알맞게 솟아올라 있는 반듯한 코와 작고 도톰한 모양의 그 작은 살덩이, 입술까지. 잘 빗어 넘긴 머릿결에다 귀 옆은 맑은 가을 하늘 어느 산, 깊은 산자락을 향해 쉼 없이 흘러내려가는 가는 물을 닮은 머리칼까지……그 얼굴만으로도 이미 넓은 빨판을 가진 문어발처럼 그 누구라도 흡입력 있게 빨아들일 것 같은 사람이었다. 김선생에게 안겨 있던 그녀. 그녀의 이름은 메리라 했다. 본명인지, 그저 작부들 사이에서 불리는 가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김선생에게 안긴 메리의 얼굴. 형언할 수 없는 끌림이 있는 여자였다. 메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욕정이 치밀어, 치근덕대던 내 곁의 여자를 거칠게 다루었던 것 같다. 그날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얼마 전의 일이다. 교무실에서 모자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봄의 한 가운데에 온 세상은 온통 나른하다. 신이 봄을 맞아 온 세상에 최면을 거는 것이 분명하다. 치명적인 최면의 계절이다.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봄은 나른한 세상일 수밖에 없다. 최면에 정면으로 대항해, 보기 좋게 패한 나는 열심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른한 세상, 낮잠으로 만끽할 수밖에. 엎드려 자는 나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언제부턴가, 옆 반의 박선생과 조선생 그리고 몇몇의 선생이 모여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내 수업시간엔 별다른 일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 외라도 이상한 기미가 없었나요? 박선생은?」
뭐가 어떻게 됐단 말이지? 낮잠과 궁금증의 대결 속에 기어코 난 잠을 깨고야 말았다. 능숙하게 커피 한잔을 타 그들의 대화에 합류하길 기대하며 다가섰다. 늘 맛있는 커피를 타주던 김선생은 오늘도 결근했다. 오늘로써 3일째. 난데없는 김선생의 결근에 대한 의혹에 빠질 새도 없이 난 그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긴즉슨 이러하다. 3반에 미진이란 예쁘장한 학생이 있다. 그 학생은 평소 교우관계가 좋고 속이 깊은 아이었다. 편모슬하에서 근근이 생활하는 정도로 좋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그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여 이끄는 데는 늘 별다른 이견이 없을 만큼 리더쉽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 애가 친구들 말에 의하면 요 근래에 많이 힘들어 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오빠가 있었다고 했는데, 잘 안된 모양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 게, 제 동맥을 끊으려 했다고 한다. 물론 자살은 쉬우면서도 쉬운 것이 아니다. 손목 또한 누구나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알지만, 피부 깊숙한 곳에 있는 동맥까지 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손목 가운데만 자르면 쉽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섬뜩한 생각이 든다. 그까짓 사랑이 무어라고 자살을 해? 그깟 사랑이 무어라고 죽고 죽여? 내 경우를 비추어 본다면 세상의 비정함을 알고, 사랑의 본질은 집착과 일종의 자기 최면인 것을 깨달은 후에야 그것은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었고, 사랑 또한 믿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비겁한 도피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을 온전히 살아가기엔 나와 같은 사고가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진이란 아이는 아직도 순수한 열망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부러웠다. 내 생각은 어쩌면, 옹색한 자기변명일 뿐이니까. 애써 제 속내를 가면으로 감추고 위선과 악수하는 자. 난 이미 속물이 되어버린 탕아에 지나지 않는 존재는 아닐지.
미진은 김선생의 반 학생이었다. 김선생이 결근하여 안 나오는 동안, 반 학생은 손목을 그어 자살을 결심했다. 김선생은 결근으로서 그의 무책임함을 대변한 것이다.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종적을 알 수가 없는 김선생의 묘연한 행방을 곰곰이 되짚어보다가, 도움이 절실한 미진의 병문안이 순서임을 깨닫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미진의 병실을 찾아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미진의 어머니와 친구들이었다. 어머니는 별말씀은 없으시고, 그저 갑작스런 미진의 사고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퍼하기만 할 뿐이었다. 미진의 친구들 또한 별 말이 없었다. 병실을 들어서서야 보게 된 미진의 얼굴은 모든 기력을 소진한 한 앳된 소녀에 불과하였다. 무척이나 예쁜 얼굴. 이제 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미진은 먼저 김선생의 안부부터 물었다. 역시나 병석에서도 이어지는 김선생의 안부. 이 일에 대하여는 무책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인기는 병원에서도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가보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은요?」
「음. 무슨 사정이 있어서 며칠 안 나오셨네. 것보다 몸은 괜찮아?」
「……」
미진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 작은 가슴에 누가 이런 멍을 들인 것일까? 문득, 드레싱한 손목이 보인다. 그래도 아직 손가락은 퉁퉁 불어있고, 미세하게나마 보이는 피는 손목으로부터 흩뿌려져 말라붙어있었다. 누가 제 몸뚱이를 찢고 싶어 할까? 그 후로 미진은 울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다. 더구나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이때에,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인사와 함께 시집 한권을 두고 나왔다. 어떤 도움도 안 될 것이 뻔하지만, 가본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며 자위했다. 아니, 가보는 것을 그의 어머니나 친구들이 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김선생이 말한 쓰레기는 내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에 병원을 나서는데, 미진의 친구 중 한명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저, 드릴말씀이 있어요.」
몇몇의 친구들이 그 뒤를 쫓아오더니, 난색을 표하며 한사코 입을 막아 그의 이야기를 저지하려들었다.
「왜 그래. 말해봐, 어서.」
한사코 말리는 그 친구들의 행동에 반해, 난 그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그의 친구들은 그저 안절부절 못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난 몹시 그 학생의 말이 궁금해졌다.
「……」
무슨 끽긴한 이야기를 하려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쉽게 말할 용기가 없어보였다. 나는 잠깐 자리를 옮겨 어디 앉을 곳을 찾았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제야 결심한 듯한 매서운 표정으로 앙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미진이가 저러는 건, 사랑하는 남자 때문이에요.」
그건 안다. 오빠라면서? 치기어린 대학생쯤 되었겠지.
「그리고 그 남자는 우리 담임선생님이고요.」

이제 그날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며칠 만에 김선생은 돌아왔다. 핼쑥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에 복귀했지만-동료 선생들도 그에게 드러내 놓고 비난을 가하진 않았지만-이미 그에 대한 인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후였다. 언젠가 그가 진정 사랑했노라고 말한 바 있는 선화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자랑스레 꺼내보였던 그 여자의 사진. 웬지 낯이 익었던 그녀의 얼굴. 모두 식상한 것이 됐다. 그럴싸하게 제 과거를 포장했을 뿐, 그 이면에는 수많은 편력으로 얼룩진 김선생의 일그러진 자유의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자유의지는 기력이 소진된, 그저 거세당한 의지에 불과하다. 한데, 그의 행태는 비단 미진과의 반윤리적인 만남에 대한 죄책감의 발로는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죄의식 그 너머에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으니까. 시니컬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한 나머지 비록 억지에 가깝지만, 기어코 그와의 술자리를 마련하고야 말았다.
술자리에서 만난 김선생이란 인물은 전에 없는 행동으로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연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켜곤, 멍하니 눈앞의 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또 소주 몇 잔을 들이켰다. 속이 쓰릴수록 판단력은 명확해지는 것일까. 심각한 문제에 고심하는 듯 보였던 김선생의 표정은, 사뭇 더 진지해졌다.
「김선생,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김선생은 교사요. 언제까지 쓸데없는 사랑 놀음에 골몰할 거요?」
내 스스로에 대한 비판의식을 비수로 만들어 김선생의 가슴에 꽂는다. 마치 너와 난 같은 동질감을 가졌음에도 난 너 같이 교직을 위협하는 병통 따윈 없어, 난 내 직무에 충실하다고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처럼.
「내 속엔 평생 날 옥조일 감옥이 있습니다.」
벌써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는 김선생의 첫사랑, 선화란 여자의 이야기. 김선생이 갓 신입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동기의 소개로 만나 2년간의 열애, 그리곤 헤어졌다고 했었나? 그래 맞아. 그 후 다른 남자를 만나 얼마간 잘 사귀나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것이라 했었지? 교통사고로.
김선생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잊고, 교사라는 모두가 열망해 마지않는 직장을 가진 이후 그딴 상처를 덧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선화를 잊고 살아간다. 아니, 잊은 줄만 알고 살아간다. 하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임을 맡아 학생들 얼굴을 익히던 중, 선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선화를 꼭 닮은 학생, 미진이 있었다. 제 감정을 억누르고 억눌렀지만, 미진은 늘 선화의 얼굴로 다가와 살가운 행동으로 김선생을 괴롭혔다. 결국 김선생은 선화란 존재를 속인 채 미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선화를 잊기 위함 또는 육욕 때문이었지, 절대 사랑은 아니었다고 했다. 김선생은 하루 이틀 지나면 미진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갈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고, 그의 허점투성이 하나하나를 사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바로, 메리였다. 아무 의미 없어지는 습관적인 행동 하나하나도 그녀와 함께라면 어느새 의미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와 함께 노를 저어 강을 건널 땐, 그를 집어삼키려는 모든 억압은 시나브로 수면 아래로 침전되어 결국엔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얌전한 강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래. 김선생의 말에 따르면 메리와 함께하는 그 순간만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존재였다. 교직이라는 무거운 책무, 역마살이 낀 듯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편력.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인 김선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존재. 메리였다.





하지만, 메리를 만난다는 것은 백화점에 들러 맘에 두고 있던 물건을 쇼핑하고 나오는 정도의 문제의식이 결여된 상태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또한, 그런 반윤리적인 행동은 언제까지나 허용되는 관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선생이니까. 어떤 행동을 해도 자유롭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선생이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생활 전반을 둘러싼 하나의 보이지 않는 막은 끊임없이 나를 옥죈다. 그리고 난 늘 그것에 발맞춰 비상을 열망할 뿐이다.
한참의 대화가 오고 갔을까. 너무 깊은 사랑은 관념으로 귀결되고, 술자리가 길어지면 목적과는 달리 유희로 치닫는 법이다. 그날의 모든 것이 유희로만 끝나버리길 경계한 탓인지, 유희를 실재(實在)한 것으로 바꾸는 수고가 필요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의 그 요정 집을 찾았다. 변함없는 늙은 포주는 우릴 반겼다. 김선생은 메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손님이 없던 메리는 건넌방에서 김선생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돈을 주고 매음을 산다는 것이 또 한 번 도덕적 의식을 위협했지만, 왠지 그날만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늙어가는 포주의 행동이며, 메리의 자극에다, 김선생의 소원(所願)함 그리고 나 스스로의 끌림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었다. 모든 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악보에 짜여있던 것처럼. 협주곡은 어느새 변주된다. 난 숙취로 말미암아 세상이 가물가물해졌다. 그 와중에도 김선생과 메리의 모습은 단연 이채를 띤다. 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한데, 조금은 달랐다. 어렴풋이 보이는 방 저편의 그들은 무언가가 맞질 않아 보였다. 김선생은 분명 당황해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칭찬하듯 보듬어 줄때 그는 몸서리 쳤으며, 급기야는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그 표정으로 무겁게 몸을 들어, 메리의 배 위를 군림하는 가 싶더니,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쯤 그의 얼굴빛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의 손은, 퍼렇게 날이 선 정맥이 미친 듯 꿈틀대는 그의 손은, 메리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흐느끼며 입 맞추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미친 듯한 그의 사랑을. 갈구함을. 꺼져가는 선화의 몸부림을.
정신을 차렸을 무렵. 이미 김선생은 사라진 후였다. 난 엉금엉금 기어가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몸에 옷가지를 걸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토해낼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안녕을 고한다. 거울 속의 나는 일그러져 있다. 변기에는 나처럼, 하얀 사기 틀과 함께 오물이 엉겨 있었다. 문득 요의(尿意)를 느끼고 지퍼를 내린다. 엉긴 오물을 청소하면 한결 내 마음도 나아질 것 같았다. 백열등에 빛나는 오줌 줄기로 하얀 변기 틀에 끼인 찌든 때를 그리고 덕지덕지 엉겨 있는 오물을 깨끗이 씻어낸다. 아랫배를 밀어가며 열심히 닦아낸다. 비로소 변기는 깨끗해졌다. 향연은 끝났다. 선화가 왔었던, 김선생이 떠났던 그리고 그들이 함께했던-그를 묶고 있던 족쇄를 풀어헤친 장이 된-그 요정 집은 고요했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마다 삶을 지탱해주는 관념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설령 부재한 추억이 되었을지라도-값지고 의미 있는 의식이다. 역설적인 문구로 치장한 한낱 보잘 것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지라도, 내 글이 김선생의 선택과 용기를 존중하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가 되었다고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결핍은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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