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페에서 써본 글- 001 크레파스

NEOKIDS 작성일 06.09.08 10: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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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크레파스


그 아줌마는 내가 준 사탕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아줌마가 신기한 크레파스를 줄께.”
그리고는 자기가 입고 있는 커다란 외투의 수많은 주머니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놀이터에서 놀림을 실컷 당하고 난 뒤였다. 난 어딜 가든 그랬다. 어눌한 말투와 어릴 때 아버지가 실수해서 다친 뒤 계속 저는 한 쪽 다리. 처음엔 잘해주던 아이들도 수가 많아지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나를 놀려댔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소리 질러서 쫒아내 주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해 주고 들어주고. 그런 아줌마가 너무 고마워서 난 아이들이 밀쳐서 상처가 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건네주었다. 사실 그것만 주는 것도 미안했다. 그런데 또 뭘 주겠다고 하다니. 뒤늦게 난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아줌마. 정말 괜찮아요. 안 그래도 고마워서 드리는 건데.....”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예쁜 꼬마아가씨가 선물을 주었는데 나도 뭔가 선물을 해야 하지 않겠니?”
아줌마는 끝내 손에서 무언가를 집어냈다. 그것은 겉에 크레파스가 그려져 있는, 미닫이로 열리는 뚜껑의 박스 안에 든 12색의 크레파스였다. 이상한 건 그 상자에는 그걸 만든 곳의 상표라든가 KS마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그냥 크레파스 그림만 있는 상자 속의 12색 크레파스. 그걸 받아들고 나는 멀뚱멀뚱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아줌마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이걸로 뭐든지 네가 소망하는 물건이나 모양을 그리면 그게 나타날 거야. 이 크레파스는 그만큼의 댓가가 따른단다. 그리고 그 댓가는 아주 무서운 거에요. 그러니까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된단다.”
“댓가....요?”
“그럼. 그 댓가란 네가 한 일만큼 돌아오게 마련이란다.”
그러면서 아줌마는 또 내 손을 다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쯔쯔, 이런 몹쓸 놈들. 이런 짓을 하다니.”
“괜찮아요. 집에 있는 빨간약 바르면 되요. 하도 많이 다치니까 늘 있어요.”
아줌마는 내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 없단다. 아줌마가 고쳐줄게.”

그리고는 아줌마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한 손으론 상처가 난 쪽의 위를 덮었다. 그런데 느낌이 간질간질한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빼려고 했다.

“안돼요, 가만히 있어.”

그리고 몇 초인가 지나갔을 때, 나는 내 손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처가 없어진 것이었다. 내 손과 아줌마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아줌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야. 크레파스도 그렇고. 특히 크레파스는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단다. 만약 크레파스의 비밀이 밝혀지면 그 크레파스는 쓸 수 없어.”

나는 크레파스 이야기에 옆에 놓아둔 크레파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집어 들어 품에 안고서는 아줌마를 다시 보았다. 하지만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분명히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잠깐 동안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너무 신이 났다. 그 아줌마는 분명 날 좋게 봐준 마법사 아줌마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해리포터나 동화 같은 책에 나오는, 보통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착한 마법사. 나는 신이 나서 절룩거리면서 한 칸짜리 방일뿐인 좁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스케치북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엎드려서 크레파스 뚜껑을 열고, 먼저 무엇을 그릴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생각한 것을 그렸다. 그것은 리본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언제 진짜가 될까 한동안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실망해서 나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에서 뭔가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다시 폈다. 그 안에는 리본이 들어있었다. 마법사 아줌마 말이 진짜였던 것이다. 그 리본을 들고 너무 좋아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는 일어나 앉아서 거울을 보면서 리본을 달았다. 좀 더 이쁘게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 들어오면 자랑해야지.

엄마는 언제나 저녁 늦게 들어온다. 시장 일을 피곤하게 마치고 오실 거야. 나는 밥상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애가 어떻게 밥상을 차리냐고? 요술 크레파스가 있잖아. 나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밥상 위에는 불고기랑 찌개랑 여러 가지 것들을 막 그렸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닫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빛나고 반짝이던 가루들이 스케치북의 종이 사이에서 나와서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그 가루들이 가는 곳을 따라 가보았다. 그것은 바깥 부엌의 상 위로 올라가더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불고기, 찌개, 그리고 그 외에 내가 그린 반찬들이 만들어졌다. 나는 불고기 하나를 집어 맛을 보았다. 너무 맛있었다.

“엄마!”
나는 좁다란 골목길에 난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는 엄마를 보곤 벌떡 일어났다.
“니가 여기까지 왠일이니? 오늘은 애들이 놀리지 않든?”
“응~내가 밥상 차렸어. 식기 전에 얼른 먹으라고~”
“밥상? 네가 밥상을 어떻게 차려?”
나는 순간 흠칫했다. 크레파스를 들키면 안돼.
“으....응.....사회복지사 아저씨가 집에서 했다면서 불고기를 조금 가지고 왔어. 그거랑 다른 반찬들도. 그래서 그냥 상만 차렸지 뭐. 밥은 있던데?”
어차피 사회복지사 아저씨는 아주 나중에나 올 것이다. 그 때쯤이면 엄마도 까먹고 있겠지.
“아유, 오실 때도 안 되었는데 뭐 이런 것까지 다 가지고 오신다니.....우리 혜정이도 많이 컸구나. 어머, 머리의 그 리본은 뭐야? 그거 어디서 났니?”
“으....응......이건 친구가 준거야. 자기는 새 거 살 거라면서. 이쁘지?”
“그 친구도 좋은 친구네. 그래, 어서 들어가서 밥먹자.”

밥을 먹고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잠에 들기 전에 생각했다. 이 비밀을 유지하려면 머리를 아주 잘 써야겠다고. 그러자면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을 것이다. 오늘 같이 질문을 받을 때는 어떻게 머리를 굴려야 할까. 난 그런 것 잘 못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댓가가 따른다는 것도 걱정이었다. 분명히 착한 일을 해야만 좋은 댓가가 나오겠지.

문방구에서 사는 크레파스는 그림 같은 걸 한 장 맘먹고 그리면 굉장히 빨리 닳았는데, 그건 이 요술 크레파스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은 리본이랑 밥상밖에 안 그렸지만 그럼에도 앞부분의 각이 진 부분은 벌써 다 닳았다. 정말 필요한 때만 써야겠다고 맘먹었고, 또 그렇게 썼다. 엄마랑 둘이서 사는 데는 역시 돈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았다.

월세라는 걸 엄마가 내야 한다면서 얼굴이 찌푸려질 때쯤이면 나는 돈을 그려서 엄마 몰래 엄마 지갑에 넣어놓았다. 엄마는 굉장히 그것을 이상해 하면서도 일단 급한 대로 그 돈들을 썼다. 그렇게 우리는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돈도 많이 그리진 못했다. 그럼에도 초록색 크레파스는 한 삼분의 일 쯤 닳아버렸다. 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이사를 가고, 조금 더 나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충분했다. 학용품 같은 것은 엄마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그려서 만들었다. 엄마가 학용품 사라고 주는 돈도 잘 놔두었다가 엄마 몰래 다시 지갑에 넣어놓았다. 그런 식으로 또 돈은 모여 갔다.

그런 식으로 벌써 이 크레파스를 받은 지 1년이 다 되어 갔다. 좋은 일도 많이 했다. 만약 동네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해서 피가 많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병원에 가서 수혈하는 피봉투를 잘 봐뒀다가 피봉투를 그려놓고 오기도 하고, 조금 떨어진 시내에서 노숙을 하는 아저씨 옆에 빵을 그려서 놔두기도 하고, 또 그런 식으로 조금씩, 눈치 채지 못하게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다 보니 크레파스는 벌써 몽당연필처럼 아주 짧아져 버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딱 1년이 되는 날, 나는 마지막 크레파스를 써서 남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크레파스를 다 쓰고 나니 이젠 그게 없다는 게 허전했다. 하지만 이걸로 된거야. 그 고마운 아줌마의 말대로 뭔가 댓가가 따르겠지만, 그것도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까. 엄마랑 나 사는데 쓴다고 쓰긴 했지만 적어도 남 도와주는 걸로 쓴 게 더 많으니까 괜찮겠지 했다. 학교를 마치고 나는 길을 걷다가 그 크레파스를 받은 놀이터를 보았다. 혹시 거기서 기다리면 그 아줌마가 다시 나타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거기의 그네에 주저앉았다.

그네를 타면서 한동안 아줌마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아줌마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바보같은 짓처럼 보였다. 그네는 천천히 멈추고 있었다. 그네를 더 탈 흥도 나지 않아서 그네가 멈추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동네 아이들도 해가 뉘엿뉘엿 져가자 다들 집으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 그런데 옆의 그네가 삐거덕댔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마치 거기 오래 있었던 듯이 아줌마가 나타났다.

“아줌마!”
“잘 있었니?"
그 아름다운 미소는 여전했다. 나이도 먹지 않는 것 같은 그 느낌.
“크레파스는 너무 잘 썼어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구나.”
“저, 그런데.....”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다. 댓가 말이구나.”
“네.....”
“그건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꾸나. 그보다도 그 크레파스 좋았니?”
“네. 덕분에 집도 좋은 데로 이사 갔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도와 줬구요.”
“흐음~그래?”
아줌마의 눈꼬리가 실룩실룩했다.
“그럼 크레파스를 더 줄까?”
“네?”
나는 아줌마의 말에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크레파스를 더 준다니?
“네가 너무나 착하게 써서 크레파스를 더 줄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댓가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고. 어때, 크레파스를 더 쓰겠니?”
나는 잠시 생각했다. 크레파스를 더 쓰면 댓가는 두 배가 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댓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고, 엄마랑 나랑 둘이서 먹고 살기에도 어느 정도 괜찮아 졌다. 이 정도면 되는 거야. 크레파스를 몰래몰래 쓰는 것도 지쳤지만, 크레파스를 더 쓴다는 것도 미안하고 괜찮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결심은 끝났고, 나는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젠 더 쓰지 않아도 돼요.”
“흐응~그래? 그거 유감이구나......”

아줌마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니, 그런 걸 느낀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흉측한 괴물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 괴물들은 내 주위 온 사방에 깔려 있었다. 이미 그 곳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나는 무서워서 아줌마를 보았다. 아줌마의 얼굴은 아까 전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건.....그건.....그랬다. 마치 식탁에 놓인 맛있는 고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줌마의 무섭게 찢어진 입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네가 크레파스를 더 원한다고 말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사실 그 크레파스는 이 세상에는 좋은 물건이 아니거든? 그걸 더 원하기만 했어도 네 속에 있는 어두움을 넌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기회였어......그런데 넌 그것까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너무 착한 거야......착한 아이들의 고기는 이 괴물들이 너무 좋아하는 식사거든.......물론 나도 좋아하고........”

아줌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이......찢겨나가고 없었다.....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뜬 눈으로 내 몸이 괴물들에게 먹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것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내 눈에 커다란 뭔가가 뚫고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내 눈을 뚫은 그것은 아줌마의 길어진 이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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