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악의 클럽
“학생,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그거 뭔가 착각하고 있어. 학생 말처럼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란 건 그런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고. 물론 학생 말대로 사람이란 살아가면서 그것들을 어기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지. 게다가, 자네들도 살아오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이 묶은 것 좀 풀어주고 더 이야기를.....”
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둔탁한 소리와 강렬한 고통. 말을 하던 사람의 턱이 부서졌다. 피를 흩뿌리면서 쓰러진 그의 몰골을 깔아 보면서 때린 ‘학생’은 비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꽤나 시끄럽구만.”
일부러 기묘하게 뒤틀어서 내는 목소리가 울렸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도서관으로 올라가기 전. 식사를 마치고 현제는 으슥한 창고 용도의 교실로 들어섰다. 꼭대기에 있는데다가, 요 근래에는 잠그지도 않고 별 일이 없으면 사람들이 들르지도 않는 곳. 자주 오지는 않지만, 담배를 피우기엔 딱 적당한 장소였다. 물론 노는 놈들은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도서관에 올라오지도 않는다. 현제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자신에겐 묶여있는 것도 많았거니와, 창문 너머의 산과 교문 밖의 가을 풍경이 보이는 것도 현제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구석에 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난 후에야 라이타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현제의 나른함은 짜증으로 변했다. 다시 여길 내려갔다가 산꼭대기의 도서관으로 올라가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치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불이 들이밀어졌다.
“불, 없지 않아?”
당황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현제는 불을 켜준 사람을 올려보았다. 안 그래도 당황한 마음이 그 사람을 보고서 더해졌다. 불을 켜 준 사람은 석인이였다.
“너도 담배 피우냐?”
“아니. 그런데 불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긴 하더라고.”
“그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할려고? 전교 1등 이미지가 확 날라갈 텐데.”
“뭐 둘러댈 방법은 많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의 공기가 감돌았다. 그런대로 아직까지는 범생의 면모를 잘 지켜왔다고 자부했던 현제였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현제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겨버렸다는 불편함이 현제의 기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현제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배는 빨리 타들어갔고,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면서 현제는 석인을 노려보았다. 아직 남은 연기가 현제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알지? 꼰지르면 디진다는 거.”
“푸훗~”
“비웃냐? 씹새야.”
현제의 말투가 험악해졌지만 석인이는 그런 것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말했다.
“너도 꽤 자격이 되는 구나. 좋아. 너도 끼워줄게.”
“자격?”
“그보다도, 너도 잠깐 함께 할래? 여기서 모임이 있거든.”
“뭐?”
석인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현제는 어리둥절했다. 그 궁금증은, 이후 하나 둘씩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더욱 커졌다. 그 아이들은 현제를 보고는 잠시 의아해 하다가 같이 있는 사람이 석인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더 이상 가지지 않는 눈치였다. 현제는 그 아이들의 면면을 보고 더욱 놀랐다. 하나같이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좋은 이미지의 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들 보시기에’.
다음날, 담임의 훈계가 이어지는 종례시간.
“너희들은 고3이다. 선생님이 늘 말하는 거 알지? 사고 치기도 쉬운 때란 말이다. 특히 여기는 남자고등학교라서 더해요. 그럴 땐 너거들 부모님을 함 생각해봐라. 그러면 너희 본분이 바로 생각날 거다. 사고도 대학교 들어가서 쳐라. 그래도 엔간한 건 다 용서된다. 그러니까 대학부터 먼저 들어가는 게 지금 너희들 인생의 차례다 이 말이야. 선생님은 너희들을 믿는다. 반장.”
그 선생의 말을 예전 같았으면 현제는 흘려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말들만으로도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 모든 혼란은 어제의 그 창고 속 모임이 원인이었다.
“임시 멤버가 생겼습니다. 소개하죠. 백현제입니다.”
현제는 갑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석인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자....잠깐....난 뭔가 모임을 하겠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이건 뭐지?”
누군가가 현제가 비벼 끈 꽁초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말했다. 현제와 같은 반 아이이면서 반에서 10등 안에 꼬박꼬박 드는 재혁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그런 재혁이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또 하나 뭔가 재미있는 것이 걸려들었다는 듯한 표정들이 현제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석인이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아직 여기엔 담배연기가 남아있네. 꽁초에는 침이 아직 마르지 않았어. 이건 현제가 피웠다는 이야기밖에 안되는데.”
“그래서 뭐?”
현제의 찡그린 미간에도 아랑곳없이 재혁이는 현제를 마주보며 말했다.
“이런 협박할 좋은 꺼리가 걸린 이상 넌 어쩔 수 없이 임시멤버가 되어줘야만 된다는 이야기지.”
현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한마디만 더 하면 제대로 한 방 날릴 듯한 심산으로 재혁이를 노려보고 있자 현제의 기분을 깨달은 석인이가 그 뒤를 이었다.
“여러분, 강요는 좋지 않아요. 현제야. 네가 맘에 안 들면 오늘만 참여하고 오지 않아도 좋아. 다만 여기는 우리가 사용하는 장소이고, 공교롭게도 너도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 오늘은 그냥 참관만 하는 걸로 하지. 이걸로 됐냐?”
현제는 그 말을 듣고서도 주먹을 바로 풀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들킨 게 좀 두렵기도 했다. 자신이야 이래저래 조금 괴롭힘이나 당하고 끝날 테지만, 어머니께는 이 일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컸던 탓이다. 잠깐의 시간 후, 그 말대로 한다면 자신도 손해는 없다고 생각해서, 모두들 걸상을 가져다 자리를 잡을 때 자신도 멀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현제의 그런 행동을 보고 석인은 그것을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임을 시작했다.
“자, 또 한 주가 지났습니다. 다들 어떤 일을 하셨는지 돌아가면서 말해볼까요?”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재혁이가 일어났다.
“저는 이번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에이, 너무 약한데요?”
다른 한 아이의 말에 재혁이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노인이 저를 욕하면서 머리를 때리더군요. 그래서 그의 뒤를 쫒아갔습니다.”
“그리고요?”
“그리고는 적당한 곳에서 주변에 있던 벽돌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찍었죠. 피가 옷에 많이 튀어서 처리하느라고 고생은 했습니다만, 뭐 그런대로 할 만 했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잘했다며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현제는 자기가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재혁이가 말한 대로 그게 사실이라면 그 놈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걸 태연히 말하고, 박수를 받다니.
하지만 그런 충격은 말 그대로 시작일 뿐이었다. 그 뒤로 한 아이씩 일어나서 하는 이야기들은 더더욱 현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누구의 다리를 꺾어 놨대는 둥, 동네폭력배를 몽둥이로 수십 차례 갈겨버렸다는 둥, 죄다 끔찍한 이야기들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인이의 차례가 되었다.
“회장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석인이 그 모임의 회장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면서 석인의 말을 기다렸다. 석인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아마 여기도 다니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선영교회라고. 거기 목사를 가해했습니다.”
“목사!”
아이들은 놀라면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아까워하는 분위기였다.
“한 번 전도한다면서 다녀가더군요. 그 때 뒤를 추적해서 집을 알아놨습니다. 집에 들어가는 것도 쉬웠죠. 그리고 그에게 마취제를 썼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걸로. 그리고는 묶어놓고 이야길 했죠. 역시 깨어 있지 않은 자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응징을 가했죠. 그 가증스런 입부터.”
“잠깐.......”
현제가 끼어들었다. 현제는 모두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둘러보면서 말했다.
“너희들....지금 자신이 무슨 짓들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물론 알고 있지.”
현제 쪽에 등을 돌린 자세로 있던 석인이 대답했다.
“너희들 미쳤어? 그건 범죄라고!”
“범죄?”
석인이는 그 단어에 등을 돌려 현제를 노려보았다. 아까 전의 여유로움과는 다르게 기세가 등등한 눈빛이었다. 현제는 그런 석인의 눈빛에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범죄야. 사람을 때리고 상처를 입히고, 그런 건 상해죄라고.”
“휴, 일단은 좀 설명이 필요하겠네......”
석인은 한숨과 함께 길고 긴 말을 시작했다.
가방을 챙겨 도서관에 올라가면서도 현제는 어제 석인이에게 들었던 그 논리를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애썼다. 부정할 수 있는 예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만났던 아이들을 마주칠 때면 의미가 있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어제 모였던 그 일에 대해서 현제가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그런 시간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 창고에 아이들이 모여 있지 않을 것이다. 그 클럽은 한 주에 한 번만 모인다고 석인이가 그랬다.
현제는 도서관에 지정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하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을 잡으려 하면 할수록 석인이의 그 논리는 강렬하게 현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현제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석인이의 말들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우리 클럽의 이름은 악의 클럽이야. 왜 악의 클럽이 이름이 되었을까?”
“그럴싸하네. 그런 짓만 하고 다니니 악의 클럽이지.”
현제의 말에 석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웃기만 할 뿐 아무도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푸훗. 아니. 악이란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선이란 것에 대비해 규정한 거지.”
석인은 아예 몸을 돌리고 현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선 같은 건 너무 허술하고 심지어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이라고 생각해. 어른들을 봐. 그들은 우리에게 어릴 적부터 윤리를 주입시키고 법 개념을 익히라고 하지. 그것이 선이라고 말하고. 가장 간단하게, 손을 들고 신호등이 켜지면 길을 건너는 상황을 생각해봐. 하지만 어떤 어른도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도 무단횡단을 해본 경험들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해.”
“하지만 사람을 때리는 거랑 길을 건너는 건 다른 문제 아냐?”
“그건 기본적인 문제일 뿐이야. 아주 작은 건 이런 거지만, 더 큰 물 위로 올라가면 상태는 모든 것이 심각하지. 웃기지 않아? 법 개념을 가지라면서, 선한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그것을 어기는 존재들. 윤리를 지키라면서 스스로 그것을 어기는 존재들. 왜 우리만 그런 존재들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거지? 또 그들과 왜 똑같아 져야 하는 거야? 과연 선이란 것을 지킬 생각은 있는 건가?”
“그건......모두가 그렇지 않잖아.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현제는 뜻밖의 말들에 당황했다.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연쇄적으로 튀어나오는 석인의 달변에 대해서. 석인의 말은 하나같이 평소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부정이었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야. 왜냐하면,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거든.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돌아가는 거야. 누군가는 이용하고, 누군가는 이용당하지. 그러면서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게 만들어놓은 복잡한 시스템들 속에 사람들을 우겨넣고. 원래부터 자기애와 이기심에 충만한 인간들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순식간에 이타심을 발휘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상당히 순진한 거야.”
“그래도.....”
“그럼 뒤집어서 말해 줄께. 지금 밖에 나가서 어떤 어른이든 붙잡고 물어보라고. 왜 이 윤리나 도덕이나 법이 지켜져야 해요? 왜 이것들이 옳은 거라고 생각하죠?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조차 못하는 지경이 되어 있어. 아무도 윤리나 선에 대한 개념 없이 그것들을 스스로 행동에 옮기든가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거야.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어른이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도 피해가 오지 않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동의어. 그렇다면 결국 그것도 이기심이야. 왜 이기심을 나쁜 것으로 규정해 놓고 가르치면서도 그 이기심을 대놓고 발현하는 수없이 많고 썩어빠진 어른들에 대해서는 왜 누가 아무런 가르침도 하지 않지? 웃기잖아. 스스로가 선을 만들어 놓고 그걸 어겨야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란.”
“도대체 그럼 네가 하는 행동에 들어간 생각은 뭔데?”
“좋았어. 이제야 네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구나.”
석인이 현제를 보는 눈빛이 다시 애초의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우린 그저, 좀 솔직해져 보자는 거야. 그렇게 자신들을 속이고 사느니 조금이라도 그것을 벗어나 보자는 것이지. 그렇다고 어른들의 그런 틀린 법이 원래 옳았다는 것 따위를 깨달으려는 것도 아니야.”
“그럼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새로운 윤리관을 만드는 거지. 어른들의 것이 아닌, 우리들의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실험들이 필요하기도 한 거고.”
“너희들. 미쳤구나!”
“하하하하핫!”
석인이 크게 웃어 제꼈다. 현제는 그런 석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석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전했다.
“미안하게도, 우린 아주 제정신이야.”
다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어른을 혐오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이 하는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건 결국 어른들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꾸 뇌리를 자극하는 그 논리들에, 현제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강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말들과, 그 논리들이. 초조함에 돌리고 있던 볼펜이 손을 벗어나 데구르르 굴렀다. 그 볼펜을 주으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자신을 맞은 편 책상 밑에서 몸을 굽혀 쳐다보는 재현이가 보였다. 재현이는 씨익 웃으면서 현제에게 쪽지를 하나 건넸다. 현제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굽혔던 등을 다시 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 그 창고에서.’
현제는 앞에 놓인 칸막이 너머로 재현을 바라보았지만 재현은 공부에 열중해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척하는 건지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제는 그런 재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쪽지를 구겨 쥐었다. 결심이 서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고, 현제는 눈앞의 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번엔 그 아이들이 먼저 와 있었다. 문이 열리고 현제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석인은 예의 그 여유로운 눈길로 현제를 맞았다. 다른 아이들도 각자 웃음으로 현제를 반겼다. 하지만 현제는 그들을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 주춤주춤, 현제는 아이들이 마련해 놓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웬일인지 석인이 먼저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하나의 사진을 앞에 꺼냈다. 아이들은 사진을 돌려보았다. 현제도 그 사진이 궁금해서 받아보았다. 학교에서 불량스러운 놈으로 찍힌 한 학생이었다.
“이 놈이 일주일 전, 옆 학교의 1학년 여학생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한숨소리와 욕지기가 현제의 귀를 울렸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하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만, 결국은 규칙에 맞게 처리해야만 했죠. 강간이란, 힘센 자가 힘없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탐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더러운 짓거리라고 할 수 있다는 거,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보가 잘못되었을 까봐, 모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놀랍게도, 사실이더군요.”
석인은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시선을 보냈다.
“불합리란 단어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대명제이고, 그건 우리 주위의 환경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조항,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에게 거세의 형벌을 내렸습니다.”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자기가 거세를 당한 것 같은지 몸을 한 번 떠는 아이도 보였다.
“다시는 학교에 나오지 못할 겁니다. 만약 여러분도 주위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접하거든, 나와 똑같거나 그에 준하는 형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우리의 이념을 비웃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우리 나름대로의 앙갚음을 하는 것이란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현제는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무 기준도 없이 테러만 하고 다니는 아이들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현제는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의 충격 따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에나 있었고, 그들은 용의주도했다. 어찌나 이야기들이 실감이 나는지 모험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짜릿함마저 현제는 느꼈다. 그게 실제든 실제가 아니든 현제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 자신을 깨달았을 때, 현제는 자신이 이 모임에 와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했다. 시간이 흘러 회의는 끝났다.
“석인아.”
“응?”
아이들은 각자 다른 길로 도서관을 향했고, 석인과 현제는 같은 계단을 통해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현제는 석인을 부른 후 멈춰 서서 물어보았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이건 일종의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석인은 현제 쪽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는지 아냐?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는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어서야. 그래서 최단거리의 길이면서도 효과적인 수단들을 선택하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무 힘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무슨 힘이든 낼 수 있는 거고.”
“이해가 안 되는데.”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뜻이 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거라는 이야기지. 하지만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을 악으로 규정해. 윤리, 도덕, 법, 모든 것이 흑백으로 나뉜다는 말이지. 그럼 왜 백만 옳은가, 라는 것에 우리의 최종목적이 있는 거야.”
“그런 거라면 그냥 불량스런 행동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건 가장 바보 같은 축에 속하는 거야. 인간은 머리를 쓰라고 존재하는 거라고. 불량스런 행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 자신의 의지가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른 채 되는대로 행동하다가 어른들의 함정에 빠지는 거야. 그건 두 가지의 길이 있지. 낙오자가 되든가, 회개하고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되든가. 우린 그렇지 않아. 우린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식들을 배우면서도 그 지식들과 전혀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지. 그런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하는 거야. 차라리, 그게 훨씬 합리적이라는 이야기지. 그렇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법 같은 것보다는.”
“그럼 너희들에게 정의란 건 뭐야?”
“우리에게 정의란 건 없어.”
“뭐?”석인은 현제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기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정의를 말하려 하는 거라면, 이렇게 불합리한 세상의 모습들을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난 생각해 봤지. 역으로 정의란 것이 아무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정의란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신 정의가 빠진 자리에 우리가 새로이 써 넣는 거야. 그리고 이 모든 건 그것에 대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지. 악의 클럽 이 자체가.”
현제는 석인의 말에 이제야 조금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은 뒤틀어져 있다. 그렇지만 뒤틀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할 뿐이다. 그것은 현제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 정의가 있다면 -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을 리도 없고, 어머니가 혼자 남아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도 지겨운 일상 속에 매여 숨어서 담배나 피는 짓거리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만들어져 온 것들.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들. 그것이 왜 폭력이라는 상황이 끼어들어야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모든 혁명이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으로 일어날 리는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현제는 명확히 결심이 굳었다.
“나도 끼겠어. 악의 클럽.”
석인은 미소를 띄었다. 왠지 꾸며대던 여유로움과는 달리 진짜 기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느낀 현제도 마주 보면서 웃었다.
“좋아, 좋아! 오늘로써 임시멤버 딱지는 끝이야. 일단은 이 클럽이란 게 입단식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제대로 준비를 해야 하겠는데.”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려가는 석인의 모습을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현제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 두근거림이 현제를 사로잡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늦게까지 고생이 많구나. 밥 차려놨으니까 먹어라.”
“네.”
“오늘은 별일 없었니?”
언제나 같은 대화. 같은 표정, 같은 시간. 같은 어머니. 하지만 지금의 현제는 달랐다. 입단식으로부터 다섯 번의 일요일을 거친 후이기 때문이다.
“네. 별일 없었어요.”
“그래?”
현제의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현제가 식탁머리에 앉자, 어머니가 말했다.
“요즘 우리 현제가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예?”“넌 모르겠지만, 네 표정에 쓰여 있단다. 예전엔 맨날 인상만 쓰고 있었는데.”
현제는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고, 아니라면 아닌 일들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변한 것 같았다. 좀 더 자신감이 있달까. 아니면 뭔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랄까. 그런 것이 요즘 무의식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던 것이다.
“뭔가 재밌는 걸 하니?”
재미. 재미라. 현제는 생각했다. 그런 건 재미로써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가 알기에 좋은 일도 아니지.
“아뇨. 별로요. 그냥 요즘 기분이 상쾌해졌어요.”
“다행이구나. 밥 먹고 일찍 자라. 상쾌해진 몸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게 최고지.”
“네.”
현제는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책가방의 주머니 하나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다음 목표가 나와 있는.
“여러분의 활동으로 날로 우리의 사상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저는 그 비어있는 정의에 써넣을 뭔가 새로운 것에 조금씩 근접해간다는 느낌입니다. 그럼 오늘은 색다른 일을 해보겠습니다. 이건 우리 사상에 맞지 않는 어떤 사람입니다.”
석인이가 꺼낸 사진 속에는 한 중년남성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이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이번 우리 학교의 새로운 강당을 짓는 공사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석인이는 다른 정보들을 보여주었다. 모두에게 브리핑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되어있는 서류들이었다. 아이들에게 한 부씩 돌려준 후 석인이는 제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 서류에 쓰여져 있는 내용들을 보면서 치를 떠는 한 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온갖 관급 공사 등에서 저지른 비리들이 모두 쓰여 있으면서도 그 비리상의 액수까지 자세히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도대체 이런 정보가 어디서 났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회장. 이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은 겁니까? 얻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텐데.”
한 아이의 말에 석인은 재혁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재혁은 석인과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석인은 마치 허락을 구했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을 꺼냈다.
“이번 목표는 김재혁님의 힘과 결단력이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바로 재혁군의 아버님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놀라서 재혁이를 바라보았다. 재혁도 모두를 한 번 둘러보았다.
“저번에 강간한 아이를 처단했다고 하면서 회장이 꺼낸 말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만일 그 논리대로라면, 자신의 친족이라고 해서 그 불합리가 용서되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과연 우리의 부모님은 괜찮은 건지. 그런데, 괜찮지가 않더군요.”
재혁은 서류를 뒤적여 어느 페이지를 펼쳤다.
“5페이지의 결론 부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이 사람의 비리와 불륜까지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총비용들, 그리고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의 피를 빨아먹은 짓거리들까지. 몰래 조사를 하면서도 고통스러웠습니다만, 우리의 사상을 위해서라면 이런 불합리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혁은 숨을 한 번 들이삼켰다. 아이들은 최악의 발언을 떠올렸고, 재혁은 그것을 그대로 따랐다.
“우리 아버지를 죽여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현제는 침대에 누워서 사진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조차도 재혁의 발언을 그다지 충격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 인간은 죽어도 싸다. 자신의 아버지도 그런 인간들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하지만 계속 맘에 걸려오고 있는 것은 재혁이였다. 과연 이놈이 자기 아버지가 테러당할 때 평정심을 유지하고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석인은 이번의 거사에 재혁이가 참여할지 안할지는 본인의 판단에 맡긴다고 했고, 재혁은 꼭 참석하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을 때 재혁이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계획대로라면 그것은 끔찍한 광경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현제가 아이들이 모인 곳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어서였다. 그 곳은 공사가 오래 전에 중단되어 버린 곳이었다. 현제의 눈에 바로 들어온 것은 콘크리트 가루가 자욱한 바닥과, 아이들의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남자였다. 눈과 입이 모두 헝겊 같은 것으로 막혀있었고, 두 손과 발은 그냥 가볍게 봐도 피가 통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었다. 먼저 그를 데려온 행동조의 아이들은 현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현제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의식이라도 치루기 직전의 기운. 그것이 서로에게 비춰졌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현재는 아직 재혁이가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재판을 시작하죠.”
일부러 짐짓 목소리를 다르게 내면서 석인은 말했다.
“지금쯤이면 깨어났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석인은 바늘을 꺼내서 남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조금 전만 해도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자였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석인은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너....너희들은 뭐야! 대체 왜 나를......”
“당신은 1997년부터 현재에 걸쳐 20여 차례 공사권을 따낸 관급공사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공사권을 취한 것과 근로자들의 임금을 갈취한 것, 그리고 각종 부정한 방법으로 당신의 이득을 취해온 것을 인정합니까?”
“대체 누구야? 누군지 말하기 전에는 대답하지 않아!”
석인은 웃으면서 이번엔 칼을 꺼냈다. 서바이벌 나이프의 칼날이 섬뜩한 반사광을 비추자 아이들의 눈빛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악의 클럽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칼까지 써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이었다.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먼저 아셨으면 합니다.”
석인이 눈짓을 하자 한 아이가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석인은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상체를 숙이고 칼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꾸로 고쳐 쥔 다음 빠르게 팔을 향해 찔렀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탁 하고 손과 살이 부딪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재갈 너머의 입으로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석인의 칼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석인은 느릿느릿 칼을 돌려 뺐다. 그리고 뒹굴고 있는 남자에도 아랑곳없이 천천히 준비해두었던 수건으로 칼날의 피를 닦아냈다. 석인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피 때문에 아이들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숨을 몰아쉬어야만 할 지경이 된 아이도 있었다.
“이제 대답할 기분이 되셨습니까?”
남자가 계속 비명을 지를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석인은 칼날을 가만히 다른 곳에 갖다댔다. 이번엔 심장 근처였다. 그것을 느낀 남자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인은 웃으면서 다시 서류에 쓰인 죄목들을 읊어댔다. 남자는 고개를 계속 끄덕여 대면서도 어떻게 그것들을 알았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거기까지 진행되고 있었을 때 현제의 어깨를 누군가 쳤다. 재혁이였다.
“와.....왔냐?”
“응. 시작했냐.”
“이제 막.”
모든 죄목이 인정되었다. 남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재혁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일말의 동요도 없는 재혁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현제는 억눌렀던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피는 붉었고, 흥건히 넘쳤다. 남자는 연신 신음소리를 내고 있고, 칼은 어느새 재혁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석인이 유죄를 인정하고, 재혁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이제, 당신 같은 불합리와는 결별이군요. 제사는 잘 지내주죠.”
그 말을 뱉자 분명히 남자는 자신의 가려진 눈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듯 했다. 남자가 상체를 일으켜 뭔가 웅얼거리는 찰나 재혁은 자신의 아버지가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머리를 잡고 남자의 등 뒤에서 칼로 목젖께를 깊숙이 그었다. 피가 확 쏟아져 나왔다.
차마 그 광경을 더 보지 못하고 구토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석인이나 재혁이나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보고 있었다. 이미 뭔가에 심취한 표정. 그런 모습들에 현제는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봐야만 했다. 이것은 옳은 것을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심장을 찌르는 역할이 현제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석인이는 여기까지 모든 것을 생각해 놓고 있었다. 이건 그들의 규율이었다. 가장 늦게 들어온 멤버가 마지막 처리를 해야 한다는.
현제는 피가 방울져 떨어지는 칼을 들고 그 남자 앞에 다가갔다. 그 남자는 아이들이 한 번씩 찌른 상처로 인해 이미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과 피비린내만으로도 현제는 남자의 심장을 찌르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놔둬도 죽을 것인데다가, 이미 기절까지 한 상태이므로 찔러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건 찔러봤자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의식이 있을 때 고통을 안겨주어야죠.”
“어차피 신입이 해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그냥 ‘처리’하세요.”
석인의 말에 현제는 다시 칼을 고쳐 잡았다. 이미 고인 피에 절어 있는 남자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오그라든 듯이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몸을 펴는 것도 힘들었지만, 막상 그 심장에 칼을 박아 넣기 직전에 현제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자신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건 누굴 때리고 가두고 하는 문제와는 너무 차원이 틀린 문제였다.
현제의 칼을 든 손이 높이 치켜 올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현제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도록 만든 사람들을 떠올렸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그 가증스런 얼굴들을. 뻔뻔하게도 자신의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서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던 그 개자식들을.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사상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자 조금 해볼 만한 기분이 되었다. 되도록 한 방에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의 무게가 칼을 쥔 손에 실렸다. 눈으로 잠시 겨냥을 한 후 현제는 힘을 주어 경쾌하게 팔을 휘둘렀다. 칼날은 살갗과 근육을 뚫고 들어가 정확히 그의 심장을 망가뜨렸다.
손이 갈빗대 근처와 부딪히는 충격 때문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 천천히 현제의 손에 전해져 왔다. 칼에 훼손된 심장의 근육들이 아직도 피를 보내기 위해 움찔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제는 그 느낌의 정체를 깨닫게 되자마자 손을 황급히 칼손잡이에서 땠다. 하지만 바로 다음, 석인의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비틀어서 빼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처리가 되죠.”
현제는 석인을 얼빠진 채로 서 있다가 석인의 말을 듣고서는 퍼뜩 칼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여전히 그것은 미약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현제는 이를 악물고 칼을 비틀어 뽑았다. 칼날이 빠짐과 동시에, 움찔거리던 심장의 근육이 칼집을 낸 틈으로 뜨거운 피가 확 뿜어져왔다. 현제의 얼굴과 어깻죽지는 그것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고 말았다. 현제와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 이맛살을 찌푸린 아이들과는 다르게 석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제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려 석인을 바라보았다. 현제의 얼굴에서는 현제 자신이 흘리는 것처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갈아입을 옷은 내가 가지고 왔어요.”
현제가 석인에게서 옷이 든 쇼핑백을 받아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재혁은 공사가 덜 된 창가 쪽으로 뒤돌아서 있었다.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던 녀석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곳 뿐 아니라 온 사방을 뒤덮은, 희미한 빛만 느껴질 뿐인 어둠 속에서.
“재혁이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재혁이는 당분간 학교에 오지 못한다. 너희들 중에서 재혁이에게 문상을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함께 오늘 밤에 가자. 병원은 재혁이네 집 근처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재혁이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꼬치꼬치 묻지는 말아라. 선생님도 그것은 말해줄 수 없다. 다만, 그냥 재혁이에게 위로만 해주고. 절대 묻지는 마라.”
대다수의 반 아이들은 담임의 말을 들으면서 의아해 하면서도 참석을 신청했지만, 현제는 그 장례식장에 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인 자의 장례식장이란 것도 좀 기분이 그렇지만, 그보다도 아직 손에 남아있는 그 벌떡거림이 지금보다 더 강하게 떠올려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현제는 물끄러미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사실, 현제의 손은 오늘 하루 종일 ‘그 느낌’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직도 손이, 얼굴이 모든 것이 그 남자의 피로 적셔진 듯 했다. 끈적하고, 비린내가 나는 그런 느낌. 현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방을 챙기면서 현제는 도서관과는 반대방향의 계단으로 향했다. 내일 선생에게 혼이 나든 어쩌든 그게 현제의 발길을 잡지는 못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늦게까지 일을 하다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현제는 어둑해져 있는 집안이 싫어 불을 켰다. 처음엔 마루, 그 다음엔 자신의 방. 그러다 전혀 상관없는 안방과 화장실까지 모두 불을 켰다. 그 조그만 공간 속에서 이제 어둠이란 건 남아있지 않았다. 현제는 막혀서 내쉬지 못할 것 같았던 숨을 겨우 내쉬면서 작달막한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있을 때 이번에는 또 한 가지가 거슬려졌다. 적막. 이번엔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멍하니 뉴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뉴스에서 자신이 가봤던 공간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 공사장이었다.
-어제 저녁 8시경 **동 인근 폐공사장에서 52살 김모씨가 여러 군데 칼로 찔려 숨져 있는 것을 그 곳 관리자가 발견해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은 김모씨가 관급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원한관계에 의한 살해일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동네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사건들에 대한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 본다고 수사당국은 전했습니다.
현제는 멍하니 뉴스를 쳐다보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조그만 공간에서 자신의 실소는 뉴스의 소리들과 섞여 공간을 울렸다. 뉴스에서 그렇게 말로 만들어놓고 보니 썩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시간, 정황, 의미들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자신들의 생각을 알아주기는 할까 하는 궁금함과 짜증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현제는 다시 팔을 들어 눈앞에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리고는 양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 뒤로도 현제는 계속 악의 클럽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 일주일 간 자신들이 한 일을 말했다. 현제는 들으면서도 때론 멍하니 듣고 있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석인은 그런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날도 그렇게 흘러갈 듯 싶었지만, 결국 그냥 넘어가지는 못했다. 현제가 멍해져 있는 그 때 한 아이가 현제를 향해 말했다.
“현제군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요근래 통 말이 없군요. 그러고 보니 회장도 별 실적이 없구요.”
현제는 황급하게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뭘 말해야 할 지 난감한 상황에서 석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저는 따로 준비하고 있는 큰 ‘이벤트’가 있습니다. 그 이벤트를 하기 전까지는 좀 자제하면서 기다리려구요. 그렇죠, 재혁군?”
“아아, 뭡니까. 재혁군 하고만 일을 벌이고. 저희도 끼워주시죠.”
“아뇨, 이 일은 관여한 사람이 적을수록 효과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구경만 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절대로 여러분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까요.”
석인의 입에서 여전한 미소가 번졌다.
현제는 회의가 끝나고 나서 조용히 석인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감에 대해 털어놓았다. 석인은 간단히,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일소에 부쳤다.
“어차피, 우린 이 교육제도에서 배운 ‘죄책감’이란 것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야. 아주 지독하게 중독되어서 인이 박혀버린 그런 것들 말이지. 그런 건 실험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전혀 가질 필요가 없어. 아니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겼을 수도 있지. 당분간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의 실험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만 기억해. 우리는 할 수 있어.”
현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석인의 행동이 단번에 현제의 불안감을 사라지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석인의 들뜬 모습과 뛰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는 반대로 자신 속의 어두움은 더 커져간다는 것.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현제는 석인이 사라지고 난 뒤 잠시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처음엔 작기만 했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조만간 석인이에겐 말할 때가 올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라면서.
재혁이의 빈자리를 흘낏 본 후, 현제는 기말고사 시험지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공부한 것은 거의 나와 있었고, 어차피 선생님이 시험에 나온다고 했던 부분들은 전부 머릿속에 쌓여있다. 답안 작성이 끝났을 때쯤 시간은 10여분이 남아있었다. 현제는 시험답안지를 뒤집어 놓고 시험지를 접었다. 그리고 잠시 엎드렸다. 감독하는 선생님은 그런 현제를 한 번 흘낏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상시의 이미지로 따지면 현제도 꽤 우등생 축에 속했으니까. 현제는 엎드려서 석인이 한 말, 기말고사 기간에서 겨울방학 직전까지의 휴식기 동안 벌이겠다는 이벤트에 대해서 생각했다.
“경찰의 수사 폭이 꽤 커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시험기간이고 하니 모임은 잠시 동면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음 모임은 겨울방학 직전인 수요일 다시 모이기로 하구요. 거수로써 동의를 표시합시다.”
석인의 제안에 모두들 손을 들어 동의를 표했다. 석인은 모임을 마치려 하다가 잊어버렸던 걸 떠올린 듯 갑자기 말을 꺼냈었다.
“아, 그리고 이번 휴식기 동안에는 제가 어떤 이벤트를 하나 벌려보겠습니다. 다음 모임이면 보고해 드릴 수 있을 듯도 하니까 기대해주시고요.”
모두가 석인에게 기대에 찬 눈빛과 대답으로 응원을 보냈다. 재혁도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현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석인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완곡하게 이 모임을 빠져나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기도 벅찼다. 그리고 모임은 끝났었다.
현제는 엎드려서 계속 생각했다. 뭔가 석인의 그 마지막 말에서 이상함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현제는 자신이 느낀 그 위화감이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석인이 ‘무엇을 할 듯하니까’라는 표현을 그동안 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언제나 딱딱 끊는 말투와 명확한 사실이 아니면 이야기도 하지 않던 녀석이 ‘할 듯하니까’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벌려보겠습니다’, 이 말도 걸렸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긴 한데, 만약 그랬다면 이벤트를 하나 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말은 모임의 아이들 역시 관련이 될 수 있는 그런 행동이란 말이었을 지도 몰랐다. 현제는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심드렁해짐을 느꼈다. 부질없는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없었으니까. 점심을 먹고 바로 시작한 시험. 아직 식곤증이 다 가시지는 않았다. 현제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학교의 소화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현제는 퍼뜩 선잠에서 깼다. 감독하는 선생님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듣고 잠시 있다가 문 밖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표정이 확 변했다. 아이들이 무슨 일인지 보려고 웅성거리며 일어나려 하자 선생은 호통을 치면서 일단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 어디서 불이 난 모양이다. 전에 소방훈련 한 번 했었지? 그거대로 하는 거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 쪽으로 둘러서 줄을 서라. 그리고 신호하면 문밖으로 바로 뛰어서 건물 밖으로 가는 거다. 비상로는 알다시피 저 앞쪽 계단이다. 절대 중앙계단 쪽으로 가지 마라. 선생님이 뒤에서 계속 보고 있을 테니까, 문을 나갈 때는 천천히, 그리고 문밖에서는 빨리 뛰어라. 알았지?”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남의 시험답안을 훔쳐보다가 선생님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아이들도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입들이 확 다물어진 것은 교실 입구에서 밖을 보았을 때였다. 진짜 불이 난 것이다. 검은 연기가 학교건물의 중앙계단 쪽부터 꽉 뭉쳐서 올라오고 있었고, 그 연기는 누가 보아도 이미 꽤나 불이 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실 안의 아이들은 갑자기 닥쳐온 상황에 긴장하고 흥분했다. 누군가는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필시 시험을 망친 놈이었으리라.
“자, 지금 가! 빨리 뛰어!”
몰려오는 연기를 보면서 아이들보다 더 당황한 선생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한사람씩 뛰쳐나갔다. 다른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교실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한꺼번에 나가긴 했지만, 질서를 지켰기 때문에 그다지 계단이 혼잡하진 않았다. 현제는 그 뒤에서 서서 자기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밖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 소름이 끼치는 소리들에 현제는 무슨 일인지 보려고 줄 뒤에서 문 앞으로 아이들을 제치고 나아갔다. 현제가 문 앞에 왔을 때 갑자기 뭔가가 문으로 들어와 현제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뜨겁고 숨이 막혀 반사적으로 현제가 밀쳐버리고 나서 보니, 그건 온몸에 불이 붙어 뒹굴고 있는 아이였다. 교실에 남아있던 몇몇 아이들이 옷으로 그 아이의 몸을 덮어 황급히 불을 껐다. 그 아이는 부반장이었다.
“나.....가지.....마..........누가 바닥에 석유를......으으으.......”
불에 그을린 부반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의식을 잃고 고개를 떨군 부반장을 보면서 현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들은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현제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이런 짓을 누가 했는지 바로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떠올림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자신의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다. 불합리다.
어찌되었든 일단 거기서 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현제는 재빨리 셔츠를 벗어 교실 구석의 걸레 짠 물이 남아있는 양동이에 담고는 걸레자루를 빼들었다. 다른 아이들도 허둥지둥 자신이 살 궁리를 했다. 창문 밖의 조그만 베란다로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현제는 더러운 물이 스며든 셔츠를 입 주위에 두르고 교실 문 밖으로 나갔다. 이미 연기는 교실 바로 앞까지 꽉 들어차 있었다. 악취와 연기의 매캐함이 입과 코로 비집고 들어왔고, 눈은 따끔거렸다. 현제는 그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유리창을 걸레자루로 마구 깨부쉈다. 조금은 살 것 같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현제는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헤매던 그 때, 그 검은 연기 사이로, 현제의 눈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서서 감상에 빠져있는 듯한 포즈의 사람이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한 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이내 현제는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석인이였다.
“야!”
현제는 석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석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 왔어?”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콜록.”
“뭘 하긴. 내가 계획한 일의 성과를 즐기고 있지.”
석인의 목소리가 가려진 방독면 안에서 웅얼거렸다. 현제는 그 말을 겨우 알아들었다. 그리고 알아듣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그럼....이게 네 짓이란 거냐?”
“그럼.”
“어째서! 왜 이런 짓을 하는데! 이런 건 네가 싫어하는 불합리 아냐?”
“아니, 매우 합리적인 것이지. 넌 언제나 좀 깨닫는 게 늦어.”
방독면 유리 너머로 석인의 눈이 웃고 있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가 뭘까?”
“이제 와서 무슨 개소리야!”
현제의 말에 석인이 혀를 쯔쯔 하고 찼다.
“재혁이가 한 일이나 내가 한 말들, 거기에 모든 힌트가 있었는데도 너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건 이 부조리와 엉망진창인 세상을 만든 가장 근본적인 곳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었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나와 함께 할 수 없고, 그래서 재혁이가 선택된 거야. 나머지 애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고.”
“그럼....”
“그래. 바로 학교. 그리고 교육제도. 이게 모든 불합리의 원천인 거지.”
“다른 아이들은 아무런 불합리가 없잖아! 어째서.......”
“아니,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석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이미 9년이나 배워왔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계획도 없어. 자신의 배부른 앞날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거야. 아니,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일시적이고. 똑같은 인간들의 양산일 뿐이라고. 그런 불합리한 인간들의 싹을 잘라버리는 거지.”
석인은 현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때, 이제 너도 알았고, 아직 살아있으니까 나와 함께 할래? 그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어.”
현제는 걸레자루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학교에 불을 지른 거냐?”
“그래.”
“야이 개새끼야~~~~~~!”
현제가 달려들면서 걸레자루를 휘둘렀다. 석인은 겨우 그것을 피했다. 자세를 잡지 못하면서 쓰러진 석인이 쪽으로 현제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설명해 봐. 친구와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괴롭히면서 네가 지키려는 그 합리가 뭔데. 그 사상이 뭔데!”
“합리성을 비웃지마! 그것으로 이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어!”
“불에 타죽은 애들한테 말해봐, 이 개새끼야! 네 합리가 그 애들을 죽였어!”
현제가 바닥의 석인을 향해 걸레자루를 내리쳤지만 그것도 석인은 피했다. 걸레자루가 바닥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났고, 석인은 잽싸게 기어가서 굴러간 한 쪽을 손에 쥐었다. 부러진 쪽의 뾰족한 부분을 석인이 현제 쪽으로 겨누었다. 석인의 눈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방독면의 보안경 너머로 보였다.
“너도 나와 논쟁을 하고 싶은 거구나.”
불은 이미 그 층까지 타고 올라왔다. 꼭대기 층까지 피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온 사방에서 불꽃의 넘실거림이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현제와 석인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둘 다 걸레자루를 쥐고 계속 싸우다가 어딘가로 뛰쳐 들어간 곳. 그 곳은 모임을 가지던 그 창고 용도의 교실이었다. 이미 둘의 옷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습군. 결국은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하나.”
석인이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넌 빠져나갈 데나 있냐?”
“있긴 하지만, 말해 줄 수는 없지.”
“그럴 줄 알았다.”
숨을 몰아쉬면서 현제와 석인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맞붙었다. 석인이 피하고 내지르면 현제가 피하고 다시 걸레자루를 휘둘렀다. 잠깐의 시간 후, 석인이 조금 유리해졌다. 석인의 뾰족한 막대 끝이 현제의 팔을 찔렀던 것이다.
“아아악!!!!!!!”
격렬한 고통으로 현제가 무기를 놓치면서 석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석인은 느긋한 몸짓으로 걸레자루 끝에 묻은 피를 보았다. 현제는 팔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자신의 팔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양의 피가 손과 웃옷 양복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네가 틀렸다는 게 입증된 거지?”
석인이 한걸음씩 다가오면서 비웃고 있었다. 그 때 현제의 눈에 틈이 보였다. 현제는 발을 뻗어 석인의 발목 근처를 거세게 걷어찼다.
“윽!”
석인이 비틀거리다가 창고 안의 걸상 같은 것들에 걸려 넘어짐과 동시에 현제가 빠르게 석인의 위로 타고 올라왔다. 현제는 방독면을 벗김과 동시에 피가 흐르는 팔의 주먹으로 석인의 얼굴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나중엔 양손을 이용해 있는 힘을 다해서 석인의 얼굴을 내리쳐댔다. 석인의 콧대가 부서져 움푹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제의 양쪽 주먹도 모두 찢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현제는 천천히 미동도 없는 석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숨이 차올랐다.
“네가 틀렸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지? 개새끼야.”
현제는 걸레자루를 집어들고 석인의 쪽으로 다가왔다. 석인의 눈은 풀려 있었다.
“너 자신을 그 잘난 합리성으로 구원해봐라, 이 씨발 새끼야!”
현제가 내리찍은 자루의 부러진 끝이 석인의 뱃속 한가운데로 후비고 들어갔다. 석인이 충격과 고통에 몸을 꿈틀댔지만 의식이 떠난 상태라 신경의 반사작용일 뿐이었다. 현제는 그런 석인의 미동마저 사라졌을 즈음에야 내질렀던 자루를 빼서 팽개쳐 버리고는 힘겹게 걸상에 걸터앉았다. 불과 연기는 문 밖까지 번져 왔고, 숨은 턱까지 찼다.
현제는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 쪽으로 보이는 동산들이, 퍼져 오르는 연기 사이로 오후의 햇살에 앙상한 가지들과 그 사이의 낙엽들을 드러냈다. 현제는 넋을 놓고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이미 내려갈 수도 없고, 다른 길도 없었다. 연기가 이제 그 꼭대기 층까지 모두 채우고 있어서 기침이 계속 나왔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시원하게 현제의 폐로 들어왔다. 베란다로 나와서는 아래를 보았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바닥. 입에 묶은 셔츠에서 아직도 풍기는 썩은내.
‘나도 어차피 똑같은 존재였지 않은가.’
현제는 팔을 벌리고 난간 위에 올라선 다음, 앞으로 한 발자욱을 뗐다. 뒤집히는 풍경들과 아찔한 속도감에 눈을 감자 몇 초의 간격 이후 평생 맛보지 못한 충돌감이 온 몸에 몰아쳤다. 현제는 의식을 잃었다.
현제는 기계음과 고통에 눈을 떴다.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자신의 몸에는 여러 개의 관이 꽂혀 있었다. 거기가 독실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다. 현제는 시선을 옮기다가 엎드려서 잠들어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현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몸에 힘이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뒤척이는 낌새에 잠이 깬 어머니가 눈을 뜬 현제를 보고 의사선생님을 불렀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한 번 걸려서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가벼운 뇌진탕 정도로만 증세를 판단했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하지만 충격을 꽤 받아서 당분간은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현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경찰이 올 거라고도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전부야?”
“네, 그렇습니다.”
현제는 윗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현제를 바라보고 있는 형사가 수첩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다른 애들은 다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학생 혼자 꼭대기로 올라갔다는 게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군. 그 위에 있던 또 다른 시체 한 구의 내용도 그렇고. 뭐 당황해서 그랬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아, 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혹시 학교에 방화를 한 학생에 대해서 짚이는 데가 있나? 평소에 왕따를 당했다든지, 아니면 뭐 비슷한 고민이 있었던 애나.”
“없습니다.”
현제는 잘라 말했다. 형사는 그런 현제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리고 나가려 했다. 그 때 현제가 형사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
“그.....학교와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학교는 완전히 전소했고, 아직은 결과가 제대로 나오진 않았지만 추산했을 때 너희 학교 학생들은 거의 다 죽었다고 봐도 돼. 선생들이 웃겼지. 그 시간에 시험 감독을 하고 있던 몇몇 책임 교사들 빼고는 전부 먼저 살겠다고 아귀다툼하면서 도망 나왔으니까. 그들이 처신만 잘 했어도 더 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는데, 지들 살겠다고 먼저 도망가다니.”
형사는 뒤이어 이를 갈면서 말했다.
“하지만 더 악랄한 건 방화범 개자식들이야. 어떤 새끼들인지 아주 계획적이더군. 그 정도로 방화계획을 세우려면 그 학교 선생이든가 학생 외에는 없겠더라고. 평소 동선이라든가 이런 걸 전부 머릿속에 넣어놓고 꼼꼼하게 계획해서 사람이 내려올 때쯤 불을 번지게 만든 것 같아. 그런 짓을 하려면 한 사람 가지고는 택도 없지. 거기다 시험시간 때여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도 계획에 들어있었던 것 같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을 거였거든. 어쩌면 학생이 위로 올라간 것도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르고.”
현제가 형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시선을 피하자, 형사는 현제를 계속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방화범이라면 아무래도 자기가 먼저 살려고 하지 않겠어? 그래서 말인데, 학생 말고도 아직 몇몇이 살아있더라고. 그 애들에게도 가볼 건데, 뭐 학생 상황 봐서 어딘가로 돌아다닌다든가 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 나돌아 다니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가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번 일은 특히 상부의 지시가 강해서,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하니까.”
형사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몸조리 잘 하라고.”
현제는 형사에게 누가 살아있는 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의심을 사게 될까봐 묻지는 못했다. 그저, 악의 클럽 애들 중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석인의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전하고, 다시는 악의 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이야기해 두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간호사가 문을 벌컥 열었다.
“현제 학생. 친구가 문병 왔는데?”
현제는 눈을 부릅떴다. 간호사의 등 뒤로 다가오는, 가방을 메고 온 자신의 친구라는 자는 재혁이였다. 재혁이는 누워있는 현제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야 이 자식, 몸은 좀 괜찮아? 천만다행이다~”
다가와서 재혁은 소곤거렸다.
‘얌전히 있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현제는 그 말을 들으면서 진정하려고 애썼다. 간호사는 몇 가지 챠트를 챙겨 보더니 곧 나갔고, 재혁은 그제서야 현제에게서 등을 돌려 병실 구석진 쪽의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다행이군, 혹시 다른 사람들이랑 쓰는 병실이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독실이라서.”
“너도 도왔지? 학교에 불을 지른 거.”
현제가 노려보며 말하자 재혁이는 현제를 보기만 할 뿐 잠시 가만히 있었다. 마치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태도였다.
“여긴 왜 온 거야? 석인이의 복수?”
현제의 그 말에 비로소 재혁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네가 석인이를 죽였던 거군. 하지만 그건 상관없어. 왜냐하면 석인이는 자기가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거든.”
“뭐?”
“그도 일종의 가능성으로 이야기했던 거지만. 주절주절 말로 하는 것보다는 그의 유언을 직접 들어봐.”
그리고 재혁은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내어 건넸다.
“네가 이걸 부술지도 모른다고 석인이가 말했었지. 동영상 씨디는 증거물이 되니까, 이 노트북 채로 내가 다시 가져갈 거고. 그럼 잘 보라고.”
그리고 재혁이 노트북과 동영상 프로그램을 켜서 현제의 허벅지 께에 놓았다. 윗몸을 일으킨 채 현제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석인이 화면 한가득 나오고 있었다.
-현제, 네가 이걸 볼 때쯤이면 난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사실, 이번 일은 그것까지도 각오했어. 시험적인 이벤트라서, 잘 안될 수도 있거든. 그래서 말하는 건데, 난 아직 널 믿고 있다. 네가 심장에 칼을 박았을 때 나를 바라보던 네 모습을 보면서 난 이미 눈치를 챘어. 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네가 내게 그런 떨림에 대해 말했을 때도 일부러 난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너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어. 그래서 이번 이벤트에 너를 끼워 넣지 않은 거야. 여차하면 네가 내 파트너로써는 적격이었겠지만, 재혁이는 이미 내 뜻의 모든 부분과 일치하고 있었어.-
현제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 석인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일의 파트너라니. 석인의 말은 계속 되었다.
-교육이란 것은 모든 불합리를 낳았다. 전의 세대가 후의 세대에게 주입시키는 수많은 모순과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체념을 넘겨준 것은 모두가 이 교육이라는 시스템이었어. 그래서 난 용단을 내려야만 했지. 좀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리고 내 뜻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인터넷에서. 내 홈페이지의 내용들을 보고 이미 수많은 악의 클럽 점조직이 생겨났어. 조만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루어진, 기본교육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시스템은 전부 나의 이벤트와 같은 공격을 받게 될 거야. 그 연락책과 준비는 재혁이가 맡게 될 거고. 재혁이는 현재 대학교 수시에 합격한 상태이니까 움직이기도 수월할거다.-
현제의 얼굴이 감출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석인의 동영상에는 자신이 만든 그 홈페이지의 모습도 삽입되어 있었다. 편집된 화면에는 그 뜻에 동조하는 아이들의 모든 리플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수준이 심각했다. 모든 학교가, 자신이 당했던 꼴들을 답습한다는 생각에 현제의 손이 떨렸다. 재혁은 그런 현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너의 과거와 배경은 모두 내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적인 형태와 합치하고 있었어. 배신당하고 죽은 너의 아버지, 혼자서 너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 그 현실들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감. 너라면 충분히 나보다 더 나은 악의 클럽 회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네게 부탁할게.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내 뒤를 이어서.....-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현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현제는 노트북을 벽에 던져 버렸다. 노트북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재혁은 잠시 현제를 바라보다가 부서진 노트북들을 앉아서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현제는 사로잡혔다. 자신이 본 그 현실들이 악몽이기를 원했지만, 그 현실은 도리어 질척하고 더 큰 어둠이 되어 현제의 심장으로 스며들어왔다. 그것을 더하게 만든 것은 재혁이의 말이었다.
“거절의 뜻이라고 알아둘게. 난 애초부터 네가 석인의 뒤를 이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아, 그리고 다음 주, 여의도 쪽에서 먼저 봉화가 피워질 거다. 그 다음엔 차례차례, 하나씩 처리하는 거지. 경찰도 손을 쓰지는 못할걸? 지금까지도 우리의 꼬리조차 잡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증언을 한다든가 하는 것도 헛수고가 된다는 것만 명심해.”
재혁은 나가기 전, 몸을 돌리면서 현제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충격에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현제에게 말했다.
“다시는 보지 못하겠군. 그럼, 잘 살아라.”
찢어지듯 울리는 현제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재혁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얼마쯤 가자 간호원들이 현제의 병실 쪽으로 급하게 뛰어가는 것을 지나쳤다. 아마도 뭐 선 같은 걸 쥐어뜯었으리라, 재혁은 추측하면서 병원의 정문에 섰다. 밝은 햇빛이 강렬하게 재혁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재혁은 그 전화가 누구한테서 왔는지 수신번호를 잠시 들여다보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실행일은 정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