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더 깊어져요..>
"집이요? 아니요, 그건 좀 그렇고.. 제가 학교로 갈게요.."
사실 연희가 나에게 빌려간 참고도서는 그다지 급하다거나 한 자료는 아니었다.
더구나 성민오빠에게 필요한 자료는 더더욱 아니다.
그걸 왜 오빠가 빌려갔는지는 어젯 밤 너무 피곤한 탓에 생각따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굳이 필요도 없는 걸 빌려서 줄 이유도 없지않은가?
연주에게 잔소리 듣지 않고 날 만날 구실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나는 표정 연습이 필요했다. 분명 좋은 모양의 얼굴은 아닐텐데,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앞 까페.. 학기 중 그렇게 내가 연주와 함께다니면서 멀쩡한 얼굴로
이 까페에 들어선건 몇 번이었을까?
맨날 울어서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들어서서 그 눈 그대로 나오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성민오빠가 나보다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놈의 심장은 미쳤는지, 오빠 얼굴만 보면 또 마구 뛰기 시작한다.
나도 한심하다...
"일찍 오셨네요.."
"어, 왔어?"
종업원이 가져다 준 물 잔만 손으로 비비적 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로 15분 동안 말이없었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나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꺼낼 화젯거리가 없었다.
그 때 말문을 연건 오빠 쪽이었다.
"얼굴이 많이 안좋다..무슨 일 있어?"
손을 얼굴로 가져가며 네?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또 순간 정적.....두근, 두근, 내 심장 소리만 들린다.
이번엔 내 쪽에서 침묵을 깰 차례다.
"책..돌려주신다고.."
"아 그래 여기.. 고마워 잘 봤어."
"정말..... 책이 필요해서 빌려가신 건 아니죠...?"
"아...그러니까 저.."
알고있어요, 연주 때문이죠? 라고 말할 뻔 했다.
처음에는 참기 힘들었다. 연주로 인해 성민선배를 보는 것이..그치만 어느순간부터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얼굴을 한번 더 볼 수 있으니까, 아예 안보고 잊어가는 것 보단,
잘 지내는걸 지켜보면서 잊어가는 게..
차라리 그게 나에게는 더 공평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네요. 애인 있는 사람은 부럽네요~^^"
"아니..그렇지도 않아.."
..??
난 고개를 들어 오빠를 쳐다봤다.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오빠의 표정..
작은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살펴보듯 난 뭔가라도 찾으려는 심정으로
오빠의 얼굴만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힘드네, 솔직히 연주랑 나랑 많이 안좋아. 헤어질 것 같기도 하고..아슬아슬하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무슨 일 있지? 아무일이 없는 얼굴이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왠지 누가 날 걱정해주고 어루만져준다는 기분에
가슴속에 있는 물고가 터지 듯,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오빠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나에게 건냈다. 하지만 나는 받아 들 수 없었다.
두손으로 입을 막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정말 서럽게 울어버릴 것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참고있었기 때문에..
오빠는 잠시 그런 날 가만히 보고 있더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내 손을 치우고
휴지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무슨 일이야, 이야기 해봐.."
난 마음속에 가득 쌓였던 것을 말로써 다 풀어냈다. 힘들었다.
이야기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빠에게 집안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이를 깨물었다.
손으로 비벼대며 눈물을 닦았더니 눈주위가 쓰리다.
그 순간,
내 입속으로 뭔가 차가운 것이 밀고 들어왔다.
내 귀엔 까페에서 나오던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시간도 멈춘 것 같다. 감각이 없다.
눈이 번쩍 뜨였다. 눈물도 멈추었다.
얼른 내 입술을 오빠 입술에서 떼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울지마.."
난 휘둥그레진 눈으로 오빠를 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상황 자체가 어떻게 된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너, 나 좋아했었다면서..? 연주한테 다 들었어. 니가 날 좋아하는데, 사귀는 건 말을
못하겠고, 간접적으로 눈치를 채게 해야겠다면서, 일부러 너한테 전화해서 자길 바꿔달라고
하라고.."
"오빠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말은...나 포기하지마..너만 괜찮다면,크리스마스 같이 보내자.."
:
:
:
먼저 가게를 나왔다.
심장이 마구 뛴다..쿵쾅쿵쾅쿵쾅쿵쾅..
아니 이건 뛰는 게 아니라 점점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다. 숨도 쉬기가 어려웠다.
온몸으로 피가 제대로 돌고 있긴 한건지 손이 점점 차가워져갔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이게 꿈인가요?'
지하철을 타기위해 길을 걷고 있는데도 내가 제대로 집에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선 슬로우 모션으로 아까의 상황이 반복되어 회상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다.
기뻐해야 하는 일인건가?
그래, 분명 이건 기뻐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순간 다른 한편으로 떠오르는 연주의 얼굴..
그 사람은 친구의 연인이다..
난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집에 도착해서도 난 생각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대충 감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분명 내 생각이 어떤 식으로라도 오빠한테는 전달이 되었고, 오빤 그런 내 맘에 응답을
해온 것이다.
근데 문제는 연주였다.
오빠는 연주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연주와 헤어지겠다는 말을 한적도 없었다.
포기하지 말라니..너무 혼란 스럽다.
'일단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모른 척 하고 있어. 내가 연락할 때 까지..'
뭘 알아서 한단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이건 왠지 아닌 듯 했다.
오빠와 내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아서 연주가 오늘 일을 모른다고 해도,
연주와 오빤 아직 사귀는 사이고 난 연주의 친구인데, 엄연히 봐도 난 나쁜 짓을 한 것이었다.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미 다 잊었다고 연주에게 거짓말을 해버린 이상,
난 이대로는 죄책감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연주에게 전화해서 좀 전의 일들을 다 말해버리기에도 오빠의 입장이 걱정되었고,
그럴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해답이 나오지 않은 채로 몸만 뒤척거릴 뿐이었다.
그 때 엄마가 내 방에 들어오셨다.
"어디 나갔다 온거니?"
"아니, 잠깐..왜요?"
"아빠가 사흘 후에 재판이시다. 니가 재판날에 올 필욘 없지만, 아빠 힘내시라고
말씀 좀 드려라."
"..네.."
돌아서 방을 나가시는 엄마 뒷모습이 왜이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마음속에 또 응어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기운이 나지 않는다.
내 일 따위는 나중에 걱정하자... 일단은 아빠일이 우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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