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P의 대장인 에르가드로 다니르. 그는 황급하게 전용기에서 내려 ECP 한국지부로 돌아왔다. 원래 그는 독일에 있는 ECP본부에 있어야 할 몸이지만. 00367의 문제가 불거진 후부터는 한국지부에 눌러앉아 있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독일인들이 득세인 “Z"에서 타인종인 자신이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실패는 용납되지 않건만. 00367에 관해서 몇 번의 실패를 했던가.
이런 이유로 그의 맘이 급한 건 당연했다. 건물입구를 지키던 군인들이 다니르를 알아보고는 경례를 했다. 다니르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급하게 대장실로 올라갔다. 다니르가 돌아오자 그의 비서인 이지영이 그를 맞이했다.
“대장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가셨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야..최악!! 당장 가서 선미를 들어오라고 해!!”
“예? 오시자마자. 너무 급하신 건...”
“됐으니까. 어서!”
다니르가 숨 넘어갈듯 소리까지 지르자 지영은 볼을 부풀리며 하는 수 없이 대장실을 나섰다. 얼마 후 지영과 함께 선미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사태가 심각해졌어. EXP가 한국으로 들어온다더군. 뭐 그래도 일단 하던 전쟁을 처리하고 와야 될 테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곧 들어 오겠지“
“예에??”
지영과 선미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오기 전에 00367를 제거해야 돼. 알겠나? 우리 ECP의 사활이 걸린 문제야.”
“하...하지만. 대장님... 저번공격의 실패로 타격이 큽니다. 우리 측 ECP도 4명이나 죽었고..”
“그래..가희한테도 소식이 없는 건가? 그녀도 죽은거야?”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로 봐서는...”
다니르는 침통했다.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역시 00367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본부에서부터 대려 왔던 다섯 명의 상위 ECP들도 죄다 죽었고. 원래부터 한국지부에 소속되 있던 다섯 명의 ECP도 선미를 제외하고는 전부 죽어서. 남은 ECP는 가영을 포함 2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아홉 명이나 죽어버린 상황에서. 게다가 그 사망자 리스트에.... 그나마 가장 머리가 좋고 능력 또한 남달랐단 가희(정장A)가 어이없게 폭사해 버렸다는 사실은 정말로 타격이 컸다.
다니르는 괜히 책상을 내려치며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지!! 본부에서 급하게 충원해 올 테니까. 제발 좀...”
하지만 그때 선미가 경직된 얼굴로 다니르의 말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선미를 쳐다보았다..
“가희언니도 없이. 어떻게 00367를 이겨요? 그냥 치고 박다가. 또 죽어버리게 나두시려 고요? 게다가 전...언니가 살아있을 것 같아요. ”
“뭐...??”
“네 어차피. ECP내에선 언니만큼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나도 알고 있지만. 죽은 게 확실하다며?...”
“아니에요. 언니정도의 텔레포트 능력으로- 그깟 폭발 따위를 피하지 못했을 리가..”
“완전 억측이지 않는가?”
“그렇긴 하지만....”
다니르의 지적에 선미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좋아. 일단 본부에서 증원도 해올 테니까. 그동안 총력을 다해서 가희를 찾아봐. 살아있을 것 같다면.... 말만 하지 말고. 찾아오란 말이야!”
“네...네!!”
다니르가 허락하자. 선미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더니. “Z"의 군대를 모아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가희만 살아있다면. 해볼만 하지. 저번에도 빌어먹을 상황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확실히 00367를 제거할 수 있었는데!!!. 빌어먹을...“
다니르는 연신 욕을 해가며 중얼거렸다.
미하네스의 도움으로 선욱은 무사히 레스토랑에 고용될 수 있었다. 미하네스의 오랜 친구인 연석이 기억상실이라는 선욱의 사정을 듣고는... 선뜻 고용하기는 다소 꺼려하는 눈치는 있었으나. 미하네스에게 신세진 것이 많았는지. 결국은 선욱을 고용하게 된 것이었다.
선욱은 서빙을 맡았고. 점점 일이 속에 익어갔다. 성실한 그의 모습에. 처음에는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연석도 마음이 흡족해 왔다. 선욱은 그런 연석의 배려로 레스토랑 건물의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은 돌아 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깜깜한 터널과도 같았다. 선욱은 그 상실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 . . “자네 이것 좀 사다가 주겠나?”
“예?”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석은 개점준비를 하고 있던 선욱을 불러서 메모지와 돈을 넘겨주었다.
“오늘은 야채가 부족할 것 같아서. 좀 사와야겠는데”
“아! 알겠습니다. 갖다오겠습니다.”
“그래. 되도록 빨리 갖다 와 주게”
선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와 돈을 주머니에 쑤셔놓고는 레스토랑의 점원용 뒷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추웠다. 선욱은 입고 있는 두꺼운 파카를 여미며 근처의 할인매장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문득 주의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미하네스의 말대로 제3차대전 같은 무시무시한 전쟁이 일어나가지 직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Z" 라고...
선욱은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꺄악!”
덕분에 바로 앞의 옷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며 뛰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큰길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큰길의 뒤쪽에 줄지어 늘어져 있는 시체조각 또한 보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려갔다.
한산한 할인매장에서 메모에 적힌 물품들을 사서 계산을 하고 나왔을 때. 그의 눈에 상처투성이의 여자가 아무 힘없이 소년들의 무리에게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선욱은 이런 불합리한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칠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너무도 평범한 생활을 하며.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예리를 만나는 일도 없이...말이다.
아무튼 선욱은 무작정 그들을 따라 달려갔다. 도중에 신호등에 걸려 발을 구르며 지체하고 있을 때. 소년들의 무리는 으슥한 건물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곧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선욱도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건물뒤편에 도착했을 때 소년들은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여자주위에 빙 둘러서 막 바지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왠 떡이야.” “그런데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뭐 어때. 아랫도리만 무사하면 되는 거지 키키 안 그래?”
더러운 대사를 자기들 끼리 숙덕거리며 음흉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경찰이다!!”
선욱은 그 모습에 울컥해서 다짜고짜 소리 질렀다. 순간 소년들의 시선이 모두 선욱에게로 몰렸다.
“뭐...뭐야?”
그들은 조금 놀란 것 같더니.
“경찰이 왜?”
“야. 일단 튀어”
라고 외치며 싱거울 정도 쉽게 도망가 버렸다. 한바탕 싸워야 될 줄 알았던 선욱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완전히 바지를 벗어 내리고 제일 먼저 여자를 먹어보려던 한 소년은 미쳐 무리들과 같이 도망가지 못하고 당황하며 외쳤다.
“가...같이가!!”
그리곤 바지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꽁지 빠지게 도망가 버렸다. 15살에서 16살. 그중에서도 별것 아닌. 한번 놀아보겠다는 설치는 뜨내기들이었던 것 같다. 말그대로 양아치 인가.
너무나 쉽게 쫄아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 뻔했다. 게다가 선욱은 야채가 잔뜩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선욱은 급하게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여자의 상태를 살폈다. 원래 반듯한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완전히 너덜너덜해 찢겨져 있었고.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치욕스러움에 감고 있었던 눈을 떳다. 그리곤 선욱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선울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어딘지 허탈함이 배어나오는 웃음이다. 한참을 웃던 여자는 선욱에게 앙칼지게 외친다.
“어떻게 네놈도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까 후련하냐? 아니면. 내가 죽지 않은 게 억울해? 너도 안 죽었으니까 마찬가지 않아?“
“!!!!!!???”
여자의 가시 돋친 말투에 선욱은 어리둥절해졌다.
“저...무슨 소리이신지? 그것보다 괜찮으세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선욱은 여자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선욱을 향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 마!!”
“하지만...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무슨 꿍꿍이야? 쓰레기 따위가 머리 쓰는 거야?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라니... 이 상처를 만든 게 바로 너잖아?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네...??”
“짜증나니까 그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면상 좀 치워....”
여자는 움직일 힘조차 없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입은 살아가지고. 계속 앙칼진 목소리로 선욱에게 쏘아대었다.
선욱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년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도와주었을 뿐인데.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건 대체 뭐람.
혹시 이 여자 나를 아는 건가? 이쯤 되자 선욱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저기...저를 아세요??”
“하...??”
선욱의 말에 이번에는 여자의 표정이 거의 뒤집어져 버렸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
“그만할래? 네놈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죽이던지 아니면 사라져 줄래? 텔레포트 할 힘도 없으니. 저항할 수 없으니까 어디 맘대로 해보라고. 한순간 방심해서 네놈에게 이런 상처를 입었으니 너무 쪽팔려서 살고 싶지도 않아. 그 잘난 00367은 어디에 있지? 불러와서 나를 죽이라고 하라니까?“
“저...죄송하지만... 제가..기억을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보는 게.....“
선욱은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지 말라니까!!”
여자는 계속 소리 질렀으나. 팔을 들 수조차 없는 그녀가 선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욱은 그녀를 업어매고 그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내려놔!! 내려놓으라고! ”
여전히 등 뒤에서는 시끄러웠지만. 그게 다였다. 힘이 없는 그녀로서는 괜히 바둥바둥거리다가. 상처가 터졌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선욱은 야채를 레스토랑에 전해준 뒤에 연석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가까운 병원을 찾기로 했다. 연석은 신분확인 안되면 병원에서 안 받아 줄 것이라며, 남을 도와주는걸 탐탁치 않아 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선욱은 병원으로 가보기로 했다. 신분확인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병원 내 지문인식기에 손만 대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