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쪽의 백화점으로 선물을 고르러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캐쥬얼 쪽의 마네킹에 걸려있는 코트를 보면서 그 애 생각이 갑자기 났다.
문득, 오늘이 그 애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옷차림도 함께. 그리고 조금 머뭇거렸다. 내가 그 애의 어떤 상대도 아닌데 이런 것을 사줘야 하나. 집을 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데. 그러면서도 왠지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내가 선물을 해주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생각인거야. 애라도 꼬셔서 뭐 어떻게 해보고 싶은 거냐? 네가 외롭긴 외로웠구나. 그녀랑 못해서 굶은 것은 알지만, 좀 참아라.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선물이잖아. 선물 해주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지 뭐. 생일을 안 챙겨 준다고 눈물까지 흘렸잖아. 평소의 너는 그러지 않았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내 속의 마음과 머리가 서로 그렇게 자기주장만 해대고 있는 탓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던 나는 아버지의 선물을 먼저 골라놓고서도 한참동안 그 코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시계를 보니 앞에서 그러고 있은 지도 거의 한 시간하고도 반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몸도 피곤해지면서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 하고 되려 부아가 났고, 조금 후, 결국 내 손에는 그 코트와 몇 벌의 옷이 더 들어가 들려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백화점 문을 나서면서부터 후회되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하고.
그리고 그건 계속 쇼핑백을 들고서 그 애의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담배를 물고 있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대강 시간을 맞춰 와서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 애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지 않은 거야 백번 잘한 거고 당연한 거지만, 차라리 핸드폰 번호라도 있으면 걸어서 어디에 두었으니 찾아가라 이렇게라도 말해주련만 그것도 못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겨울은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언덕의 언저리에서 바람에 휭 하고 실려 오는 냉기에 골이 찡하게 울려댔지만,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이 아가씨는 나타날 줄을 모른다. 그 애의 교복과 같은 교복을 입은 애에게 물어봤을 때는 애저녁에 학교는 끝났던 것 같은데.
그렇게 기다린 게 거진 3시간 정도 되어갈 무렵, 다시 한 번 몰아쳐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최선을 다한 거라고. 인간적 도리를 지키다가는 얼어 죽겠다고. 그리고 애초에, 인간적 도리란 걸 네놈이 지키려고 이렇게 있는 것도 이상한 거라고. 어차피 손에 묻힌 피냄새는 지워지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는 애초부터 양반이 못될 위인이었는가 보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그 아이가 저 밑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대체로 일 관계에서 습득된 직업병 같은 것인데, 사람을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않는 눈썰미가 있어 먼 곳에서도 그 아이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굳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복 외투 위에 그 물 빠진 군복 잠바 같은 걸 입는 애는 그 애뿐일 테니까.
맑은 콧물을 한 번 쓱 닦아내고서는 내가 손을 들고 아는 척을 하려고 하는 순간. 바로 앞 쪽의 후미진 골목에서 한 다섯 명 정도 되는 애들이 튀어나와 그 아이를 둘러쌌다.
또다시 몸에 밴 직업병상, 나는 담장 쪽으로 몸을 숨겨 가만히 그 상황을 보았다. 설핏 보아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둘러싼 아이들의 주먹이 그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는 걸 그 아이가 그걸 뿌리치자, 둘러싼 아이들 중 2명이 그 아이의 팔을 잡았다. 아이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곧 다른 아이들이 나왔던 골목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의 인적을 살폈다. 아무도 오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선물이 든 쇼핑백을 급히 캐쥬얼 가방에 집어넣고는 거기서 도구 몇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늘 가지고 다니던 금속 재료의 너클. 그리고 또 하나는 접근해서 일할 때 쓰는, 안면마스크와 스키고글.
급히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다 가린 후 너클을 끼면서 나는 그 골목으로 들어갔다. 슈퍼맨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맨이 되어주려 하다니. 자칫하면 경찰에게 꼬리를 밟힐 지도 모르는 짓을 왜 사서 하려고 하나 하고 내 이성의 주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요즘 뉴스조차도 흉흉하지 않던가 말이다. 왕따라든가 학교폭력이라든가. 이런 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선물도 주려던 애가 이런 꼴을 당하면 내 맘이 편하지 않을 것이었다. 빠른 동작으로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다짜고짜 큰 소리를 질렀다.
“동작 그만!”
아아아. 그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뺨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하다.
그 때 흐릿한 전봇대 불빛이 비춰준 광경.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케이크와 그 위에 꽂은 초, 그리고 바람을 피해 거기에 열심히 불을 붙이려는 아이들이었다. 군복잠바의 그 아이, 다솜이를 비롯해 모두가 갑자기 뛰어든 나를 놀랄 새도 없이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들과 마주친 순간, 나는 극도로 뻘쭘해 졌다. 상황이 이해가 된 순간, 나는.
“아......안녕하세요......”
라고 말한 뒤,
“저......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너클을 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 후,
“아...저....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말하며 가방에서 생일선물이 든 쇼핑백을 주섬주섬 꺼내서 다솜이의 손에 넘기고는 뒤돌아 나왔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골목에서 뛰쳐나왔다. 스키고글과 안면마스크조차도 그 쪽팔림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아마 그 자리에 당신이 지나가고 있었다면, 사람 하나 없는 동네 골목 언덕을 키 165cm정도 되면서 얼굴은 죄다 가린 채로, 휘날리는 두터운 코트 자락과 함께 언덕을 죽어라 뛰어올라가는 미친놈. 제대로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