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껍절한 사랑이야기 1장(4)

NEOKIDS 작성일 07.01.05 01: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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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다음 날의 눈부신 햇빛을 받으면서 내가 묵는 자취방의 이불 속에서 잠이 깼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넘어가 버렸다. 그 쪽팔림을 잊느라고 밤새도록 내가 쓴 글들을 모아보고 정리하고 그러느라 늦게 일어난 것이다. 어쨌거나 선물은 전해주었으니 다솜이와는 더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별 일도 없었다. 내일은 목요일이라서 가기 싫은 아버지 생일잔치에 들러야 하니까. 그렇게 해가 기울 때까지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방 안에서 빈둥대다가 시계를 보니 9시. 배가 고파졌다. 먹을 것을 찾아보니 있는 게 없어서 귀찮은 마음을 누르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나이키의 빨간 트레이닝 솜바지와 두툼한 파카는 이런 때 유용하다. 모자를 하나 푹 눌러쓰고는 언제 일거리 전화가 올지 모를 핸드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동네 가게로 향했다. 가게는 내가 사는 언덕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렇게 내리막을 향해 가고 있는데, 거의 언덕 내리막 끝자락의 전봇대에서 누군가 서 있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직업병이 도진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코트가 어디서 많이 본 것이기도 했지만.

어제의 악몽이 다시금 뇌리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나는 한순간 가게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딱히 다른 곳으로 돌 수 있는 길도 없었거니와, 뱃속의 꼬르륵 거리는 위장이 닥치고 가라고 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 탓에 나는 이를 악물고 터덜터덜 그 전봇대 쪽으로 내려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때 얼굴은 모두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 애가 날 모를지도 몰랐다.
그 확실하지 않은 사실 하나만 믿고, 모자를 눌러쓰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야지, 이렇게 결심하면서 조금 거리를 두고 걸으려고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느닷없이 심장이 널을 뛰었다. 그 애가 갑자기 달려들어 내 팔을 덥석 잡았기 때문이다.

“어어어.....”
놀라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나에게 다솜이는 매서운 눈초리를 쏘아보냈다.
“모자 눌러쓰고 모른 척하고 지나치면 될 줄 알았어요? 아저씨?”
“왜.....왠일이에요.....이런 시간에.”
“핸드폰 내놔 봐요.”
버벅거리는 내게 낮게 으르렁대는 그 애의 단호한 말투. 나는 고양이 앞의 쥐 같은 심정이 되어 급히 핸드폰을 꺼내 넘겼다. 그러자 그 애가 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내 핸드폰으로 발신을 하는 것이다. 아뿔싸. 당했구나.
“지....지금 뭐하는 거에요?”
“이러면 약속 잡고 이렇게 추운데서 안 기다려도 되잖아요!”
가만 살펴보니 진짜 오래 기다렸는가 보다. 뺨은 뻘개져 있고 코에서는 맑은 콧물이 흐르는 걸 여러 번 닦았는지 문지른 자국이 코 밑쪽으로 남아있었다.
“나....날 왜 기다려요?”
“어제 그러고 그냥 도망가면 모를 줄 알았어요?”

어두운 공간이 샛노랗게 변했다. 어떻게 들켰는지는 몰라도 시치미는 한 번 떼보고 나서나 볼 일이었다.

“무....무슨 소리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가리면 목소리 못 알아들을 줄 알았어요? 아저씨 되게 웃긴다.”

이 때의 내 심정은 몽크의 절규라는 그림 그 자체였다. 이젠 더 이상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아....미안해요....그게....”
“도대체 왜 그 꼴로 갑자기 나타난 거에요? 손가락에 꼈던 건 뭐고. 어제 친구들이 얼마나 날 놀렸는지 알아요? 남친이냐고. 정말 죽고 싶었다고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변명은 해봐야지.

“아니...저기...그....불량한 학생들한테 당하고 있는 줄 알아서....”
“하!”
이젠 실소를 터뜨린다. 그 실소에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그럼 내 친구들이 불량한 애들인 줄 알았단 말이네요. 그 애들은 반에서 몇 명 안 되는 친한 애들이란 말이에요.”
“아...그랬군요....”

마구 쏘아붙이는 다솜이에게 나는 어정쩡한 대답을 건넸다. 애초에 오해를 살만한 일을 하질 말든가,라는 따위의 말을 했다가는 일이 더 커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다솜이도 씩씩대면서 나를 빤히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저...죄송해요....그럼 이제 먹을 걸 사러 가봐야 해서....”
어제보다 더 뻘쭘한 상황을 피하고자 말을 꺼내는 순간 다솜이가 또 다시 팔을 덥석 잡았다. 아니, 팔을 잡았다기 보다는 팔짱을 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어설프게 뿌리치려고도 해 봤지만, 꽤나 완강하게 잡고 있어서 잘 뿌리치질 못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에요? 남들이 보겠어요.”
“같이 가요.”
“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런데 다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호빵 사줘요.”
“네?”
“아우, 아저씨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에요!”
“아....네.....네.”
완전히 페이스가 다솜이 쪽으로 넘어간 듯 했다. 별로 좋지 않다. 대강 마무리를 하려면 호빵 사주고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겠구나, 라고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데, 다솜이 한마디 더 덧붙인다.

“오늘은 호빵으로 끝나지만, 내일부터는 아주 제대로 받아 낼 거니까 각오해요!”
솔직히, 울고 싶었다.

호빵에서 오르는 김과 따뜻한 기운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모양이다. 호빵을 사주고 나서 나도 호빵을 한 입 물고 곱씹어보니, 애초에 별로 내가 그렇게 주눅이 들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 모든 것은 이미 늦어있었던 걸 어떻게 하나. 수습이나 잘 해야지 하는 생각에 한 마디를 꺼냈다.

“코트, 잘 어울리네요.”
“그래요? 뭐 난 이런 건 싫지만, 아저씨가 선물로 준 거라서 입어본 거에요.”
선물 받았으니까 입어준다, 이런 식의 사고인가. 헐.
“왜 나한테 선물 사줄 생각을 했어요?”
다솜의 질문에 잠시 만족할만한 대답을 골라야만 했다. 나 스스로서도 생일선물을 해준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냥, 알게 된 처지에 지나칠 수도 없어서요. 짜장면을 먹으면서 생일 안 챙겨준다고 우는 사람을.”
약점을 찌름으로서 우위를 확보해보려던 내 의도는 여지없이 빗나간 듯 하다. 다솜은 그런 말을 듣고도 조금의 반응조차 없었으니까.
“지나칠 수 없었다.....”
다솜은 곱씹듯이 말한다. 뭔가 또 이상한 말들을 할 것 같아서 나는 급히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저, 그러면, 이제 집에 가요. 나도 가야 되니까.”
“아저씨.”
“네.”
“나 좋아해요?”

씹던 호빵조각이 내 입에서 어두운 골목바닥으로 뿜어져 나갔다. 다솜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우, 더러워.”

세상 모든 사람한테서 저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괜찮지만, 다솜이한테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모욕이다. 교복치마는 안 빨아서 빛을 받으면 때가 번들거리고, 운동화는 하얀 색이 거의 회색으로 변하다시피 한데다 발목께는 온갖 먼지로 꼬질꼬질해져서는 콧구멍에 맑은 콧물이 코딱지로 말라붙어있는 꼬맹이에게 말이다. 나는 옷자락으로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뭘 좋아한다고 그래요? 그냥 불쌍해서 사준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그리고 아저씨.”
“왜....왜요.”
이번엔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싶어 두렵기까지 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나한테 존댓말 쓰지 말아요. 아무리 봐도 아저씨가 나보다 훨씬 나이 많게 보이는데 왜 존댓말 써요?”
“난 원래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누구나 존댓말 써요.”
다솜이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솔직히, 조금 혹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느덧 발걸음은 다솜이네 집 언덕 앞까지 도달했다.

“이제 들어가요.”
“존댓말 쓰지 말라니까요.”
“알았어요, 아니, 알았으니까 인제 들어가...”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엎치락뒤치락 말을 하면서 나는 이제 다솜이를 들여보내려고 애썼다. 다솜이는 내가 말을 놓는 것을 듣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뒤돌아서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뒤를 돌았다.

“전화할께요!”

또 동네가 떠나가라 울리는 목소리. 나는 억지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다솜이의 모습이 안 보이는 쪽으로 돌아서면서, 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은 여기까지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며 곱씹었다. 더 이상 이런 꿈은 꾸기 싫었다. 5년이나, 미치도록, 그리고 아프게 꾸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현실에 발을 굳게 디디고 있는 서른 둘의 어른이었다. 상대는 한참 어리디 어린데다 젖살도 안 빠진 중학생일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고개를 흔들고 있는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은 것은 그 디디고 있는 현실의 어두움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단지 문자일 뿐이었고, 그 문자에는 이렇게 찍혀 있다.
-평화상점. 주문 발생. 연락 요망.-


목요일, 저녁 10시.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냐?”
아버지는 내가 들어오는 때부터 일갈을 해대셨다. 얼굴이 벌건 것이 벌써 술이라도 한 잔 걸치신 것 같다. 나는 전의 일자리에서도 했던 대로, 싫은 사람을 대할 때 웃는 웃음을 지었다.
“좀 늦었어요.”
아파트의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잠깐 나왔다가 또다시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기 싫은 듯 가만히 부엌 쪽으로 향했다.
“일이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네 동생 내외는 벌써 왔다갔다. 어린 조카들이 네 얼굴 까먹겠다.”
“뭐, 일이 늦게 끝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넉살을 부리듯 말을 하고서 나는 옷가지와 가방을 작은 방에 벗어놓았다. 혹시라도 내 가방을 열어본다면 안 될 노릇이지만, 그걸 막을 수 없는 짓임이 뻔함에도 나는 내 외투로 가방을 돌돌 싸서 말아놓았다. 마루로 나오니 아버지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일은 잘 되냐?”
“그럭저럭이요.”
“그럭저럭은 또 뭐냐. 사람이 언제나 똑 부러져야지.”

아하, 그러셔서 다른 사람 보증을 가족들 몰래 섰다가 쪽박 차고 이렇게 월세나 살고 계신 거군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묵묵히 선물을 내놓았다.

“이건 뭐냐?”
“아버지 선물이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는 선물을 풀어보았다. 목도리와 장갑세트가 들어있는 상자를 열어보자마자, 아버지는 혀를 찼다.
“이런 원. 있는 걸 되려 사서 뭐하는 거냐? 이럴 돈 있으면 너희 어미한테나 한 푼이라도 더 주지.”
“어머니께는 생활비 꼬박꼬박 드리고 있어요.”
아버지는 내 말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맘대로 또 화제를 돌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시지.

“당최 말이다. 왜 결혼에는 생각이 없는 게냐? 아직도 그 아가씨를 맘에 두고 있는 거냐?”
“그 아가씨 이야기는 그만하시기로 했잖아요.”
“이 못난 놈아. 네놈이 잘 하기만 했어도 그렇게는 안 될 것 아니었냐. 대학교도 무슨 의미가 있냐고 4학년 한 학기 남겨두고 때려치우고, 돈 번다고 이리저리 흔들려다니기만 하고. 대학교를 안 나오니 돈이 벌리기를 하나. 그러니 5년이나 연애를 해놓고도 결혼을 못 했지. 왜 그렇게 사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게 누구 때문이냐고도 묻고 싶었다. 내가 헤어진 이유를 누가 만들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저딴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얕은 깊이 따위는 사정없이 무너지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묵묵히 듣기만 할 뿐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도 해봤지만 바뀌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하루만 견디면 된다는 심정으로 버티다 보면, 그러면 다음의 이렇게 와야 할 때까지는 다시 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과연 1분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대꾸도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내가 계속 못마땅한지 그는 혀를 한 번 더 차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드린 선물은 소파에 내동댕이친 채였다.

“일 많이 힘들었니?”
아버지가 들어가고 나서야 어머니가 마루로 나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았다. 영화를 하고 있었는데, 암살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액션영화였다.
“너희 아버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지 혼자 잘난 인간인 줄 안다는 거. 그러니까 네가 그냥 참고 있어라.”
“어머니.”

나는 고개를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한평생 참아 오시고 사신 어머니.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폭발하면 늘그막의 이혼이야기가 된다는 거. 혹시 우리 집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별로 그런 건 좋지 않다. 누군가를 부양해도 될 정도로 떳떳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더 이상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텔레비전이나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그래, 일이 바빠서 텔레비전도 제대로 못 보고 살지. 그래, 좀 편히 쉬어라. 자기 전에 좀 씻고.”

어머니는 내 투정에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한동안, 답답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차가 박살이 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암살자가 쫒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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