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도 나는 일부러 다솜이의 문자와 핸드폰에 답하지 않았다. 아예 핸드폰 번호를 바꿔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당장 그러기는 싫다는 귀찮음으로 하루를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일요일.
“아저씨~”
비몽사몽간에 들리는 소리. 누가 이 대낮에 쪽팔린 것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까 하면서 잠이 깨어버렸다. 이불에서 일어나 멍한 상태로 앉아있다 보니 확실히 어디서 많이 듣긴 들은 목소리. 헉.
“아저씨~”
다솜이다. 내가 사는 곳을 어떻게 안 걸까? 어떻게 알고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솜이는 확실히 우리 집을 모른다. 몇 번 저녁을 사주긴 했지만 - 그리고 그 때마다 밥값을 엄청나게 뜯기긴 했지만 - 언제나 다솜이네 집이 내가 사는 곳으로 가는 거리보다 먼저 헤어져야 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절대 내가 사는 이 원룸 자취방까지 같이 온 적은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나는 순간적으로 나가려던 그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저씨~아저씨~아저씨~”
열 번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 부르는 다솜이 목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면 될 걸, 그러지도 않고 쭈욱 우렁차게 내는 그 소리가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아예 쐐기를 박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슬리퍼를 꿰어 신고 나가니 다솜이가 내 꼴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나는 일부러 눈을 부릅떴다. 화난 척을 하기 위해서.
“지금 뭐하는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아저씨가 집에 있을 것 같아서 찾으러 왔지~”
그러고 보면 쐐기를 박는답시고 두 번째 실수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곳까지 내가 가르쳐준 꼴이다.
“우와, 여기 살아?”
그 애는 내가 나온 원룸건물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대로 그 동네에서도 시설이 좀 좋아 보이는 원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내부도 안락했다. 이 동네의 다른 곳들 보다는 낫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나는 고개를 흔들고 애초의 결심을 다졌다.
“그래서, 용무가 뭐야?”
“놀러가자.”
“뭐?”
“이렇게 좋은 날 뭐해. 지금 시간까지 자고 있다니, 너무 게으른 거 아니야?”
나는 되려 표정을 굳혔다. 상대방의 상태나 기분, 분위기. 그런 것에 눈치나 신경을 써주면 좀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그런 걸 전혀 모르는 애인 것이다. 내가 표정을 굳힌 것에도 아랑곳없이 그 애는 눈을 반짝이고 있다. 내가 선물한 코트를 입고. 그것도 벌써 지저분해져 버린.....
“다솜아.”
“왜?”
“이제 아저씨는 다솜이랑 그만 만나고 싶어.”
“응?”
다솜이의 눈이 끔뻑거린다.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이제 다솜이 저녁도 안 사줄거고, 그냥 모르는 사람처럼 연락도 하지 말고 지내자고. 핸드폰의 내 번호도 지워. 아니, 핸드폰 내놔봐. 내가 지워줄게.”
“뭐?”
“원래 아저씨는 다솜이 생일 때 선물만 주고 말려고 했었어. 어쩌다 일이 그렇게 꼬인 거지만, 이제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했잖아? 나는 할만큼 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원조교제 같은 오해도 살 수 있고. 그러니까, 이제 공부 열심히 하고 평범한 생활 많이 해.”
“평범한 생활?”
“그래, 평범한 생활.”
내가 왜 이 단어를 쓴 걸까. 잠깐 주춤하는 사이 저 쪽에서의 반격.
“그럼 아저씨는 평범한 생활 하는 사람이 아닌 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 단어는 별 의미 없고, 그냥 이제 남남으로 지내자는 거지. 어쨌든 핸드폰 이리 내놔봐.”
“고장 났어.”
“그럼 잘 됐네. 이제 나 찾지도 말고. 알았지?”
내가 몸을 돌려 들어가려는 순간 다솜이가 말했다.
“하지만 전화번호는 잘 적어놨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큰 소리로 마구 쏘아붙였다. 동네사람들이 듣건 말건.
“네가 내 앞에서 울었다고 해서 내가 뭐 너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았어? 그래서 선물 사준 줄 알았니? 아저씨는 그딴 거 하나도 없었고, 이제 다솜이랑 다니는 것도 싫어. 알았지? 몰랐으면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아저씨는 이제 다신 다솜이 만나기 싫어!”
“......”
갑작스런 내 감정 폭발에 다솜이가 약간 주춤한다. 눈을 다시 쳐다보는데 물기가 점점 더 고이고 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지만 다솜이도 평생에 한 번은 경험해 봐야 할 일. 여기서 빨리 끊고 들어가야 한다.
“알았으면 이제 집에 가.”
나는 마지막 말을 쏘아 붙이고 다시 자취방에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때, 어쩌면 다시 귀담아 듣지 말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솜이의 말을. 그리고 다시 고개도 돌리지 말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항상 이래. 나는.”
“뭐?”
“미움을 사고, 아프고, 남들에게서 멀어져 버려.....”
순환논리의 오류 제 2탄이냐. 변하고 싶으면 변하면 될 것을 왜 자꾸 되풀이 하는 걸까.
“하지만, 하지만,.......”
기필코 흘러내려 버린 눈물.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마, 그녀가 내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도 기분이 이랬을까. 더럽고 착잡한 기분. 아니, 그 전에, 지금 이 순간에 왜 그녀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 1년 반 전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갈께요.....”
손등으로 눈두덩을 비벼대면서 몸을 돌리는 그 애의 어깨를 붙잡으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대체 감당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때? 잘 하는 거야? 하고 가슴과 머리에 물었다. 둘은 대답하지 않았다.
“따뜻한 거 마시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