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솜이가 내 방에 들어왔다. 방 두 개짜리에, 하나는 서재로 책과 컴퓨터와 프라모델을 비롯해서 잡다한 것들을 가득 채워놓았고 하나는 그냥 잠자는 침실이었다. 침대를 보는 순간, 다솜이는 다가가서 그 위에 털퍼덕 앉아버렸다. 나는 부엌의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는 다시 침실로 왔다. 다솜이는 얼굴을 가린 채로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침대 옆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잠시 그렇게 다솜이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내가 심했던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점점 그렇게 다가오는 다솜이에 대해서 내가 느낀 불편함이었다. 그렇다. 그건 한편으로는 설레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함이었다. 나는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불편하지 않도록 나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완곡하게 거절할 수 있는 방법도, 그 때에는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왜 다솜이에게 그렇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다솜이에게 말을 꺼냈다.
“아저씨가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그런데 아저씨도, 왜 소릴 질렀을까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다솜이가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눈길을 피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1년 반 전의, 그녀를 사귈 때의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주었다는 식의 유행가 가사 따위로는 표현이 다 안 될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던 때의 이야기들. 시간은 내 머릿속에서 그 때로 되돌아가 있었다.
지금의 나는 서른 둘. 처음으로 제대로 해본 사랑에 실패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연애는 5년을 했다. 나이 서른 하나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내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절대로 바라지 않던 말을 그녀는, 했다. 친구로 남을 수 있겠냐는. 그럴 수 없었다. 잡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받은 돈으로 (이 부분은 부득이 다솜이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일 선물을 사서 그녀의 야근에 맞춰 달려온 밤 10시 39분. 막 그녀와 나의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그 시각. 그리고 그것이 산산조각 난 시각. 그녀와 나의 마지막의 때였다.
사랑을 했다. 하면서 바보 같은 짓을 너무 많이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은 나의 잘못이었다. 심지어는 아득히 잊혀 졌을 법한 작은 일들까지, 모조리 생각이 났고,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항상 잘못하고 있었다.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했던 것, 대학교를 한 학기 남긴 채 대학은 쓸모가 없다는 판단으로 바로 포기해 버렸던, 그리고 그걸 자랑스레 그녀에게 얘기했던 그 때마저도. 아버지가 연대보증을 서서 내 이름으로는 집 한 채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울면서 털어놓았던 그 때, 그리고 결혼을 몸이 달도록 원하고 있는 그녀를 위해 돈을 벌겠답시고 이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마저도. 수많은 나의 잘못된 말들과 태도들. 나는 모든 것이 뒤틀어져 버린 놈 같았다.
사랑을 다시 시작하면 그런 것들을 다시 반복해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그 윤회의 굴레 같은 것을 끊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으로, 나는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의 허상은 내게서 잊혀졌다. 유행가 속의 애절함과 수많은 사랑이야기들은 시시껍절한 감정들의 소산으로 여겼고, 조금이라도 찬바람에 고개를 드는 외로움 따위에 내 심장을 저당 잡히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씩 맘에 드는 이미지의 여자를 보아도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똑같은 시간낭비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였다.
그리고 그건 결국 누가 다가와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만들었다. 그런데 같이 밥을 먹은 그 몇 번의 일과 해프닝들만으로, 다솜이는 나를 흔들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흔들림이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안다. 다만, 잠시 넘쳐버린 감정의 그릇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여기까지 말을 해주는 동안 다솜이는 울기를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하기 싫었던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지금 이건 다솜이의 잘못이 아냐. 내 문제이지.”
주전자의 입구에서 증기가 올라 삐익 하는 울림이 들린다. 그것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다솜이는 조금씩 내게 다가와서 두 팔로 내 얼굴을 감싸 안았다. 뺨을 댄 다솜이의 어깨에 얹혀진 내 시선. 그것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맞추어져 있다. 삐익 하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부엌에서든, 내 가슴에서든.
“내일도 올게.”
뺨에 얼굴에 댄 채 내 귓가에 대고 하는 다솜이의 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
“내일도 온다고. 내일은 내가 저녁 지어 놓을게. 오늘은 점심 지어주구.”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알기 쉽게 이야기 해놓으니까 이게 무슨 태도인가. 내가 어안이벙벙해 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 애는 부엌 쪽으로 달려가서 렌지를 끈다. 뭔가, 신나는 일이 생겨버린 듯 퉁퉁부은 눈에는 웃음을 짓고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이젠 냉장고를 뒤진다.
“아니, 저, 내 말 듣기는 한 거야?”
“응, 들었어.”
“그럼 내 말 뜻 모르겠다는 거야?”
“아니, 아저씨 말뜻도 알아들었어.”
“그런데 뭐하는 거야! 왜 오겠다는 거냐고!”
내 말에 다솜이는 잠시 도마 위에 늘어놓은 재료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멈췄다.
“아저씨, 처음 만날 때부터 느낀 거지만, 나랑 같아.”
“에?”
나는 다솜이의 말에 더욱 황당해졌다. 도대체 뭐가 같다는 건가.
“나도, 왕따 많이 당했거든. 그 때 생일 축하해주던 애들, 왕따를 당한 아이들이야. 그런데, 그런 거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그건 다른 애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거든. 그게 나였으니까. 그래서 마음을 닫고 살다시피 했어. 친구는 조금만 만들고.”
“그러니까 그게 뭐가 나랑 닮았다는.....”
“아저씨도 마음을 닫고 살잖아.”
다솜이가 찌르는 정곡 덕에 내 입이 다물어졌다. 확실히, 나는 마음을 닫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내 일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니, 그것은 어쩌면 변명에 불과했던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을 닫고 사는 거라면 내 쪽이 아저씨보다 훨씬 오래 해왔어. 거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걸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어. 항상 나를 싫어하는 주변에 대해서 나도 도망만 치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어. 싸우려고 할 때마다 힘들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좀 상처받긴 했지만, 이젠 괜찮아. 아저씨도 나랑 같은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싸워서 이기자.”
마지막엔 나름대로의 파이팅 포즈까지 지으면서 다솜이답지 않게 말하는 꽤나 정돈된 달변, 아니 그런 건 둘째 치고. 왜 하필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전우가 나여야 된다는 말인가. 거기다 내 ‘일’은 어쩌고......다솜이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지만, 그걸 다 가르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놓고도 답답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더 만나기 싫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기껏 머리도 쓰고 용기도 내고 했건만, 돌아온 결과는 더 참혹했다.
주저앉은 채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이시여. 갈수록 너무하십니다. 물론 신을 찾을 주제도 안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