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게 부는 바람을 뚫고 집 현관문 앞에 오니 다솜이와 그 옆의 비닐봉지 뭉치들이 보였다. 또 밥을 해준다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계단에 앉아서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자고 있다. 잠깐 고민을 했다.
여기서 다솜이를 깨워 같이 들어가면 또 지옥 같은 밥맛을 맛보아야 한다. 어떤 때는 삼층밥, 어떤 때는 곤죽이 된 밥을 그것도 별 것도 없는 반찬과 함께 먹어야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자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솜이네 학교가 방학을 시작한 지 3주째. 곤욕이 평소의 배는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솜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솜아, 일어나.”
이런 젠장. 고개를 드는데 콧물이 끈적하게 늘어진다.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그런 몰골을 보다보니 안색도 이상하다. 평소의 다솜이 같지가 않다. 뭔가 비몽사몽하고 있는 느낌.
“아....저....씨.....추워......”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이 있었다. 몸도 떨고 있는 것이 오한 같았다. 무거운 장거리들을 들고 오느라 땀에 절은 옷이 식어서 제대로 걸린 거였다.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러게 왜 이런데서 자는 거야! 어이구 바보 같은....”
나는 급하게 문을 연 후 다솜이를 업고 들어갔다. 다솜이의 코트-물론 내가 사준-를 벗기고 흠뻑 젖어버린 다솜이의 옷을 보았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급히 다솜이의 옷을 벗기고 내 츄리닝을 입힌 다음 침대에 눕힌 뒤 물을 끓이고 수건을 준비하고 부산스럽게 소동을 떨었다. 그리고는 외투 하나만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계를 보니 9시 40분. 아직 약국이 열고 있는 시간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전기장판이 제대로 잘 데워주고 있는 모양인지 다솜이의 안색이 괜찮아 보인다. 겨우겨우 일으켜 약을 먹인 후 따뜻하게 해주자 잘 자고 있다. 가끔씩 앓는 소리를 내면서.
그 정도 상황까지 되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내 탓이었다. 다솜이가 열쇠를 하나 복사해 달라고 했을 때 그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아무리 잘 숨겨놨다지만 다솜이가 뒤져보다가 총이나 칼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리고 그게 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래서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안 되겠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열쇠가 있어서 다솜이가 들어와 있었다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지 않은가.
수건을 갈아주면서 다솜이의 안색이 좀 진정되는 것 같자, 나는 이후의 일을 생각했다. 시계를 다시 보니 10시 20분. 분명히 집에서 걱정을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집에서 분명히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뭐 그거야 그냥 대충 둘러대면 된다고 해도, 혼자 사는 남자가 옷까지 갈아입힌 걸 보면서 곱게 생각하진 않을텐데.
“아저씨 밥.....해줘야 되는데....”
잠꼬대처럼 중얼중얼대면서 자고 있는 녀석. 저 녀석이 정신이라도 차리면 무슨 이야기를 꺼낼 지도 심히 걱정된다. 저렇게 평소에 격도 생각도 없는 무대뽀 녀석이라면 분명히 부모님한테도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존재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를 것이고. 그러면 이야기가 좀 편해지겠지만......아니, 이야기가 편해지나? 이를 갈고 있다가 너 잘 걸렸구나 우리 애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지면......아니 애초에 별 짓 한 것도 없잖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솜이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역시 다솜이 답지 않게, 비틀즈의 ‘all your need is love'가.
집이라는 단어, 그리고 수신번호. 다솜이의 핸드폰을 펼쳐서 그 화면을 바라보면서, 나는 갑자기 백팔번뇌의 지옥 속으로 빠지는 듯 했다. 받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이 심하게 들었다. 안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다솜이에게는 미안한 짓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편할 수 있다. 이 전화를 받을 경우 다솜이는 괜찮지만 나는 심하게 고생을 할 것이다.
‘이미 답은 나와 있지 않아? 받지 말라고. 사서 고생을 왜 해?’
‘다솜이네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시잖아. 그들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거야? 네가 그렇게 나쁜 놈이었니?’
간만에 또 마음과 머리가 열심히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마음의 소리에 손을 들어주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다솜아. 아빠다. 어디 있는 거냐. 너무 늦었잖아.
헉. 어머님도 아니고 아버님이다!
“아, 저, 안녕하십니까. 그.....핸드폰 주인 아버님 되십니까.”
철저히 모른 척 하자. 이 애는 길을 가다가 쓰러져 있던 걸 내가 데려왔다. 집을 물어볼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상태도 심해서 일단 옷을 벗겨 본거고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주절주절주절.
-......누구십니까?
“아, 네. 저 이 핸드폰 가진 학생이 저희 집 앞에 쓰러져 있어서요. 별다른 일은 아닌 것 같고 심한 감기 같길래 일단 저희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와서 병원에 데려가시고....”
-왜 바로 구급차 같은 걸 부르지 않았습니까.
헉. 그 생각을 못 했네!
“아, 예, 그건 저, 저도 무척 그, 경황이 없어서.....”
-혹시 성함이 이한솔씨 되십니까?
크아아악!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여긴 어디지? 난 누구야! 당황하면 안 된다.
“아, 아니오, 그게 누굽니까? 전 아닙니다. 하하하~”
-......
수화기 너머의 소리가 영 못 믿겠다는 눈치. 어색한 분위기가 팍팍팍 전해져 온다. 제길. 이러면 안 돼.
“아, 저, 저희 집 주소는 상암동 187-1번지 다음오피스텔이구요, 괜찮으시면 이쪽으로 좀 오셔서 한 번 상태를 보시죠.”
-예, 알겠습니다.
다솜이 아버님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정말 땀이 마구 났다. 겨우 한 고비 넘겼구나 하면서 다솜이의 얼굴을 보았다. 이게 무슨 꿈을 꾸는지 그 아픈 와중에도 웃고 있다.
“히히히....”
그 안도감과 다솜이의 웃는 얼굴. 그것 때문에 나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 핸드폰 신호가 울렸을 때, 다솜이에게 시선을 보낸 채, 핸드폰의 수신번호를 보지 않고 그냥 받아 버린 것.....
“여보세요....”
-자네 이한솔 맞구만.
“네?”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내 핸드폰에 표시되고 있는 수신번호를 보고 나서야 나는 조금 전의 백팔번뇌 따위는 한 방에 날려버리는 초절정 생지옥으로 떨어졌다. 그 번호는 바로 다솜이의 집 전화번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