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껍절한 사랑이야기 2장(6)

NEOKIDS 작성일 07.01.11 02: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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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 다솜이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고, 나는 무릎을 꿇고 있고, 내 앞에는 다솜이의 아버지가 와 계신다. 지금 상황이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는 상황이고, 다솜이 아버님도 그다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상책일거라 계산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문득 말문을 여신다.
“일단은.....고맙네. 자네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
“아, 예.....”

나는 우물쭈물한 태도로 아버님의 눈치를 살폈다. 옷까지 갈아입힌 것 가지고 뭐라고 하실까. 어떤 걸로 나를 공격하실까. 오만가지 두려움 속에서 나는 아버님의 말문이 다시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좀 더 이 순간이 빨리 끝나게 될 테니까.
“자네는 직업이 뭔가?”
“아...예! 그....글을 씁니다.”
“글을 쓴다....나이는?”
말투나 그런 것으로 봐서 지금까지는 그다지 화가 났다든가 하는 건 없는 듯한데, 계속 다솜이 쪽만 쳐다보는 아버님의 그 굳은 표정을 보면 그 추측이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말투. 뭔가 묘하게 딱딱 끊어지는 음색. 그게 자꾸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불안을 애써 지우면서 나는 아버님께 물었다.
“서른 두 살입니다. 저....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다솜이만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한다. 내 속에 있는 걸 꿰뚫어볼 것만 같은 그 섬뜩한 눈빛. 불편하다.
“다솜이 일기장에 적혀있더군. 그래서는 안 되는 줄은 알고 있네만...하나밖에 없는 애가 오죽 걱정을 시켜야 말이지.”
다솜이 아버님은 담배를 꺼내고는 내게 묻는다.
“피워도 되겠나?”
“아....예! 저도 피우니까 큰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다솜이가 아파서 자고 있으니까......”

나는 아버님을 서재로 안내하고 잽싸게 재떨이를 비운 후 깨끗이 씻어 대령했다. 아버님은 재떨이를 들고 들어오는 나와 SD건담 프라모델 여러 개가 각자 빔 라이플을 든 채 위용을 떨치고 있는 칼라박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그런 눈초리는 많이 받아봤습니다. 젠장.

“다솜이, 잠깐 부탁하네.”
재떨이를 대령하고 앉자마자 아버님의 입에서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부탁? 부탁이라니. 그 단어가 의미하는 수많은 것들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걸 눈치를 채셨는지, 아버님이 다시 정리를 해준다.
“그러니까, 뭐 그런 의미의 부탁이 아니라.....애가 방학도 했고 하니 잠시 애가 여기서 지내게 해달라는 뜻이네.”
“하지만 아버님, 저기.....”
“알고 있네. 부모된 입장으로서 이렇게 함부로 부탁을 하면 안 되겠지. 자기 딸자식을 생판 남한테, 그것도 초면이고 혼자 사는 남자에게 말일세. 그런데, 내 얘기도 잠시 들어주게.”

미간을 찡그린 채 마지막 연기를 내뱉고는, 아버님이 담배를 비벼 끄셨다.
“저 아이, 요 근래 4년 정도를 혼자서 지내왔네. 즈그 어미는 급성질환으로 죽었고, 봐주던 할머니도 명이 다해서 돌아가셨네. 둘 다 그 애가 직접 임종을 봤지. 그리고 4년 동안 달리 부탁할 데도 없었고, 내가 부모된 입장으로서 의무를 피하는 것도 싫어서 이제까지 어떻게든 애를 키웠어. 그런데, 이제는 정말....어떻게 해야 할 지 자신이 없네.”
아버님은 다시 담배 한 개피를 꺼내고는 물었다.
“자네도 하겠나?”
“아닙니다.”
어떻게 맞담배를. 아버님은 괜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한사코 거절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시 한 모금의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내가 일이 바쁜 관계로 애를 잘 챙겨주지 못하고 있어. 어미와 할머니가 죽을 때도 내가 그 애 옆에 있어주질 못할 정도였지. 그러다 보니 애가 뭔가, 이상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아니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게다가 한창 사춘기가 아닌가. 대화는 안 되고, 그래서 뭐라도 알고 싶어서 그 애 일기장 같은 걸 뒤적이면 온통 ‘싫어’라는 단어만 써져 있는 장도 있었고, 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것도 적혀 있고....그러니 부모 심정이 어떻겠나. 그렇다고 이 일을 관두면 이 나이에 당장 먹고 살 길이 뚫리는 것도 아니고.....”

재를 털면서 아버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다솜이의 그런 행동도, 나름대로의 달변에 대한 내막도. 처음에 일기장을 보고 내 이름을 알았다는 데서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없앨 수 있었다.

“이번에 또 일이 생겼네. 그래서 한 일주일 동안은 집을 비워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데 애가 방학을 했으니 내가 도통 챙겨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일기장에 적혀있는 자네 이름을 봤네. 애가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더군. 그래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는 걸세.”
“심정은 이해하겠습니다만.....”
내가 완곡한 거절의 뜻을 보이려 하자 아버님이 말을 끊는다.
“생활비 같은 문제라면 내가 보태주겠네.”
“아,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벌고 있습니다만.....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중에 불안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아버님은 그런 내 말에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제는 그 시선이 썩 불편하지는 않다.
“만약 자네가 정말 다솜이한테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애가 아픈데 이렇게까지 해주고 내가 건 전화를 받는 그런 일들은 하지 않겠지. 그런 점들 때문에 자네를 믿어보기로 한 거야.”
뿌리까지 깊게 피우던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는 아버님은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자네를 믿네. 그러니까 부탁하네. 다솜이 좀 잘 챙겨주게.”

다음날 아침. 나는 푸근하게 끓인 죽이 담긴 그릇을 쟁반에 올리고 참기름을 조금 부었다.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다솜이는 아직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이마를 짚어봤을 때는 좀 괜찮았다.
오늘도 사전 작업은 하러 가야겠지만, 뭐 어떤가. 하루쯤 제껴도 큰 상관은 없다. 그래도 약속한 기일에는 늦지 않게 할 거니까. 침실의 탁상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다솜이를 깨우려다 잠시 침대에 앉았다. 나름대로 동글하니 귀여운 얼굴, 땀에 젖은 머릿결. 그 묘한 땀냄새......
양 손으로 양 뺨을 쳤다. 아버님의 신뢰를 져버려선 안 된다.

“다솜아, 일어나. 죽 먹고 자자.”
다솜이를 흔들어 깨우는데 일어나질 않는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조금 가까이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다솜이의 두 팔이 와락 하고 나를 껴안는다. 그 땀 냄새와 더불어 이번엔 젖살의 냄새가 확 풍겨온다.
“아저씨이~”
“힉!!!!!! 얘가 왜 이래! 미쳤어!”
이성의 끈이 잠시 끊어질 뻔 했다. 애를 황급히 떼어놓고 나는 내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다솜이 아버님의 신뢰, 다솜이 아버님의 신뢰. 다솜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요즘 정말 자주 찾습니다.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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