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이 사랑하는 법..[13]

그어떤날 작성일 07.01.09 22: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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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눈치챌 때..>



사랑이 진해지면 집착이고, 사랑이 흐려지면 이별이며, 사랑이 적당하면 익숙이다.

대체 사랑은 어느 수준이면 좋은걸까?

사랑에는 대체적으로 적절한 단계가 없어서 사람들은 한마디로 사랑이란 단어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괴변을 늘어놓는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괴변은 '사랑은 어떤 사람을 점점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싫어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내가 김현준씨와 사랑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서로 상부상조의 관계를 성립하고나서 두달이 지났다.

그사이에 우리는 호칭도 현준오빠와 수영이로 바뀌었고, 새해를 맞이하기 전날 밤 종각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같이 들었으며, 밤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다가 채 핸드폰의 통화종료도 누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는 일도

종종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연애를 하고 있는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연애를 할 생각으로 만나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 적정선에서 벽을 쌓아두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었다고 말해두겠다. 그치만 원래 성격이 온순하고 다정다감한 현준오빠가 나에게 해주는 행동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날 좋아하나? 라고 생각 안한적도 없었지만, 아닐거라고 믿고 싶었다.

이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시한번 상처받기 싫어하는 내 연약한 마음이 점점 단단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

이었으리라.

이 사람의 상처를 감싸주고, 내 상처를 그사람으로 인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혹시나 연민의 감정이 호감으로

점점 바뀌지 않도록 긴장해 가면서 난 그사람과의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사람들이 동거를 시작할 때 쓰는 계약서 같은 것이라고 할까.

개인의 사생활은 존중하면서 생활하는 환경만 약간의 공유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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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씨..수영씨."


"네..네?"


"뭐해요. 손님왔잖아."


"아 네..죄송합니다!"



이 홍차가게에서 일을 한지도 어느새 세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현준오빠와 만나게 된 곳이기도 했다.

사장님이 끓여주시는 홍차는 여전히 향기롭고 색깔이 고왔고, bar자리에 앉게되는 것도 역시나 어려운 일인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내 표정이다.

전화위복이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은 틀림이 없었다.

아버지의 일은 결국 잘 풀렸고, 퇴직금을 받진 못했지만, 그때까지 모아두었던 돈으로 미대를 졸업하신 엄마를

위해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따뜻한 분위기의 갤러리 카페를 열려고 준비중이었다.

현준오빠의 도움으로 내 실연의 상처는 새살이 돋아 이제는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에도 끔찍했던 크리스마스 전

몇일간의 일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현준오빠와의 두달간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그리다보니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었나보다.

얼른 메뉴판과 주문표, 그리고 따뜻한 차를 들고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손님, 주문 뭘로 하시겠어요?"


혼자온 여자였다.

사장님께 주문이 들어온 내용을 말씀드리고 차 잎을 계량할 준비를 했다.


"수영씨, 표정이 많이 좋아졌네요? 요즘 얼굴이 좀 핀거 같아. 연애해?"


"네? 아니요, 연애는 무슨.."


"현준씨랑 연애하는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그런거. 새해잖아요.^^"


혼자 온 그 여자손님을 위해서 원래는 나가지 않는 곰돌이 모양의 쿠키 두개를 덤으로 준비했다.

5분정도가 지나서 손님이 주문한 차가 준비되고 난 그걸 들고 그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라고 말하고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그 여자가 이렇게 묻는다.


"몇시까지 영업해요?"


"11시까지 하는데요."


"이제 7시네요..."


그 손님은 대답을 해주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포트를 들어 잔에 차를 한잔 따라 마신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는 뒤돌아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저사람..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데스크 안쪽으로 넘어와 물기가 아직 남아있는 잔들을 마른수건으로 닦으려는데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몇번 왔던 사람인가보죠 뭐."


"나랑 얘기도 해봤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릇을 닦고 제자리에 넣어둔 뒤 시럽을 만들기 위해 안쪽 주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볼에

설탕을 가득 담아가지고 나왔다. 물을 넣고 설탕을 녹이면서 오늘 가게에 들리겠다고 말한 현준오빠의 말에 따라

시계의 바늘을 살폈다.

오늘 현준오빠가 오면 난 버스를 놓혀도 집에 오빠차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남아서 뒷정리까지 다 하고

갈 참이었다.

그 때 딸랑~, 하는 벨소리와 동시에 현준오빠가 가게에 들어섰다.


"왔네, 어서와~"


난 녹이던 설탕을 잠시 두고 홀로 나가 오빠를 맞았다.


"밖에 아직도 좀 춥다. 옷 좀 두껍게 입고 올껄. 차 대는 곳도 마땅히 없네."


"원래 여기 주차공간 없는거 알고 있었잖아. 뭐 마실래?"


오빠를 이끌고 홀로 들어와서 메뉴판을 내밀고선 내가 가게에 도착하기 전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봤던 어떤 웃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홀에선 나와 현준오빠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한창이었는데 테라스 쪽에서 갑자기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혼자 왔던 여자 손님이 우리쪽을 보고 있었다. 설마 저 손님이 불렀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손님은

천천히 우리 앞을 걸어와 현준오빠 앞에 서서 오빠의 목에 팔을 감고 확 끌어안았다.

난 어찌된 일인지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고 오빠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 여자의 팔을 풀었다.


"여긴 왠일이야."


"오빨 만날 수가 없잖아. 여기서 기다리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영아, 미안해, 오빠가 있다가 전화할게."


"어?..어..알았어."


나만의 생각인가, 이 여자가 날 노려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이 여자가

오빠의 예전 애인인 것 같았다. 사장님이 그 여자를 어디선가 본듯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사장님은 오빠와 예전 오빠의 애인을 만난 적이 있었지..

오빠는 그여자의 팔을 이끌고 가게를 나갔다.

다른 테이블에 앉았던 손님들이 술렁거렸다.

무슨일이야?, 하고 사장님이 날 잡고 물어보셨지만 할말이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니 이때까지 난 오빠의 사랑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었다. 항상 내가 눈물을 흘리면 오빠는 그걸 받아주는

입장이었었기 때문에, 물어보려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오빠가 무슨생각으로 그 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을까, 또 상처입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여자가 앉았던 테이블을 치우려고 갔더니 그 여자의 가방이 의자에 놓여져있었다.

찾으러 온다면 돌려줄 생각으로 계산대 안쪽에 가방을 넣어두었다.

예쁜 사람이었다. 긴 생머리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입은 플레어스커트가 인상적이었다.

난 bar의 한자리에 앉아서 읽고 있던 책을 펴 들어 한줄씩 읽어나갔다. 눈은 한글자 한글자를 담아 가는데

머릿속에서는 오빠와 그 여자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생각되서 같은 페이지를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어도 전혀 내용을

알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장님이 날 보며 웃기 시작하신다. 난 고개를 들어 사장님을 쳐다보았다.


"아니..하하..사귀지는 않는다면서 꼭 남자친구 못보낼데 보낸 것 같은 얼굴이잖아."


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그럴리가요,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기는 건 좋지않아.."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오븐에 넣어둔 쿠키를 보러 뒷쪽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숨기는 건 좋지 않다라.....

확실히 나는 오빠에게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시간만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고, 그 여자도 가방을 찾으러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올 손님은 없어 보였고 아직 두테이블 남은 손님이 돌아가기만 기다리면서 가게 뒷정리를 슬슬 하고 있었다.

그 때 오빠의 전 여자친구인 그 여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 벌떡 일어나 계산대 쪽으로 가서 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방 찾으러 오셨죠?"


"그쪽 이름이 수영이에요?"


"네? 네..그런데요."




그녀는 날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가방을 확 낚아채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갔다.

오빠와 무슨 얘기를 한걸까? 오빠의 전화가 더 기다려졌다.

난 11시 반이 되어 그만 집에 갈 때가 되었는데도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가게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려는데 뒤에서 자동차 크렉션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오빠였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난 오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조수석에 타곤 오빠 표정을 살폈다.

오빤 날 쳐다보지 않았고 앞만 초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집으로 가지, 뭐하러 아직까지 여기 있었어."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


"그..여자분도 위험할텐데.."



그 말을 해놓고는 왠지 실수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는 말없이 차를 출발 시켰다.

차안에선 정적이 감돌았지만, 난 오빠에게 뭐라고 말을 걸수가 없었다.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물어봐도 대답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가 먼저 말해주기 전에는

절대 한마디도 묻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빠의 옆얼굴에서 보이는 오빠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 오빠가 어떤 심정일지 알 것 같았다. 약간은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찢어져 피가 나고 있을 것임에 틀림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집 앞에 도착해서야 오빠가 입을 열었다.


"수영아, 아까 그사람, 오빠가 헤어진 사람이란거..눈치챘지?"


"어? 응.."


"잊을 만 하면 찾아와서 날 흔들어. 힘들다. 많이.."



내가 오빠를 만난 이후로 처음 오빠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의 눈물은 다른 눈물들 보다도

무거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떨어지는 속도도 순간이다. 힘들었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울 수가 없기 때문에,

참다가 참은 마음이 그만큼 무거워져 눈물도 무거운 것이다.

난 오빠가 너무 안쓰러워 오빠를 살짝 안고 토닥였다. 오빠의 안경이 눈물에 흐려져 벗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안경을 잡고 벗기다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이었는데...

오빠의 입술과 내 입술이 포개졌다. 난 깜짝 놀라 눈을 깜빡 거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아까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숨기는 건 좋지않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오빠와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벽을 두고 있었던 나였지만 사실 이미 내가 오빠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 쌓은 벽이었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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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난 오빠와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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