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는 서재 바닥에 천을 깔고 늘어놓은 무기들을 되돌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에는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말했어야 할 일이다. 지금이 좋은 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다솜아. 내 말 잘 들어.”
“......”
“나는 사람을 죽여서 돈을 버는 사람이야. 킬러라고도 하고 청부살인업자라고도 하지. 하지만 내가 죽인 사람들은 내 기준에서 다 죽어도 마땅한 사람들 뿐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은 아니야.”
구차한 변명. 이 아이에겐 얼마나 통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기준은 사실이었다. 절대로 그런 의뢰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내 일에서 나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을....죽여서.....돈을 벌어?”
다솜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사람을 죽이는데 나쁜 게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너랑 지금은 그런 거 가지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너랑 너희 아버지가 위험해.”
“뭐?”
“내가 죽인 조직원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 조직은 너희 아버지가 추적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어제 너희 친구들 놀러왔을 때, 내가 그 조직원을 하나 잡아서 족쳤어. 그 조직은 총도 가지고 있어. 너희 아버지 목숨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아빠가....죽는다고.....”
다솜이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나는 다솜이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내가 절대로 너희 아버지 죽지 않게 할 거니까, 알았지 다솜아? 내가 절대로 그런 일 없게 만들테니까......”
다솜이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한꺼번에 수많은 것을 알아버리고는 혼란에 빠진 다솜이, 죽음을 바라보는 고통을 또다시 겪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으로 점점 떨려오고 있는 다솜이의 작은 어깨. 두 손으로 그걸 당겼다. 나는 다솜이를 품에 안았다.
“내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게 만들게!”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다솜이가 내 팔을 잡아온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그래서 팔도 그렇게 다친 거구나....부탁이야....나 지금도 잘 믿기지가 않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우리 도망가자....”
“도망이라....”
나는 그 말을 듣고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망을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단 두 달 안에라도 우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어. 싸워야만 해.”
“아저씨. 그냥 하지 말자. 아빠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응? 도망가야 해.”
눈이 점점 커지면서 이성을 상실하고 있는 듯한 다솜이의 표정. 나는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말없이 다시 바닥의 무기들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소음기를 베레타의 총구에 돌려 끼우기 시작했다.
“아저씨!”
바닥에서 무기를 정리하는 모습에 다솜이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든다.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해져 있다.
“아저씨 정말....왜 이래? 내가 싫다잖아.”
“네가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아저씨는 왜 아저씨 맘대로 해? 나보고는 내 맘대로 하는 거 다 화냈으면서, 왜 아저씨는 그렇게 혼자서만.....”
내 어깨를 조그만 주먹으로 두드리고 쥐어뜯으면서 우는 다솜이. 다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언제나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내리고 행동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은 그녀와 타협하지 않았었지. 그래서 그녀는 날 떠난 거다. 하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라. 이건 정말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솜이를 다시 보지 못할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내가 죽던, 아니면 내가 떠나던 간에.
거기까지 마음을 굳혀먹었다. 애초부터, 다솜이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인정하자. 다솜이를 좋아했고, 심지어는 나이를 뛰어넘어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라고 부정하고, 수없이 나를 속이면서, 이것은 또다른 시시껍절한 사랑 따위가 아닌 그냥 해프닝일 뿐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어찌되었던, 다솜이는 지켜야 한다. 그리고 다솜이가 힘든 모습은 내가 더 보기가 싫어지는 지경까지 왔다.
해야만 해. 이것이 설령 독불장군 식의 잘못된 생각이고 무엇이라고 해도, 나는 내 입으로 다솜이를 지킨다고 말했다. 다솜이가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무기에 대한 점검이 끝나고, 모두 옷에 챙겨 넣은 뒤, 나는 주저앉아 있는 다솜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눈물로 범벅진 눈 언저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입을 맞출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길은 험난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앞의 문제에 집중하자. 나는 일어나서 다솜이에게 말했다.
“다솜아, 일단 짐부터 싸자. 나랑 갈 데가 있어.”
저녁때. 나의 부모님 집 안방. 형광등의 불빛을 받고 있는 큰 여행용 가방 하나. 내 앞에 앉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와 다솜이를 번갈아 쳐다보신다. 신부감을 데려와도 모자랄 판국에 왠 중학생 애 하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니 어안이벙벙한 기분이야, 헤아릴 수 있다. 다솜이도 어려운 듯 얌전하게 앉은 채로 말이 없다.
“이 애 좀 여기서 잠시 지내게 해주세요.”
다짜고짜,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애는 누구냐?”
“신변이 좀 위험해진 애에요. 한 2주 정도만 여기 있게 해주시면 제가 일 좀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올게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냐?”
“길게 설명 드리는 건 나중에 할게요.”
아버지가 내 팔을 잡고 마루로 나를 끌고 나왔다.
“너, 혹시 무슨 나쁜 일에 휘말린 거냐?”
“뭐, 그렇다면 그럴 수 있고요. 하지만 여기까지 피해가 오는 일은 없을 거에요. 좀 질 나쁜 사람들한테 쫒기고 있는 애에요.”
여기까지는 미리 다솜이와 짜맞춤이 되어 있는 이야기. 어머니가 안에서 물어보셔도 이런 각본까지는 다솜이가 똑같이 말을 해줄 것이다.
“너.....제정신이냐? 그런 애를 여기까지 끌고 들어와?”
“제가 사는 곳도 안전하지 않아서 일단 데려온 거에요. 여기까지는 모를테니까 걱정마세요.”
“너.....혹시 저 애 좋아하냐?”
“네?”
“사귄다거나.....뭐 같이 잤다거나.....”
“아버지!”
대체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꿈쩍 않는 아버지가 내 일갈에 어깨를 움찔하신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 문제는 제 일과도 관련이 있어서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요. 잠시만 부탁드려요. 옷가지도 다 챙겨왔고, 모자라면 제가 안 가져간 옷들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입혀주시고.....어쨌든 부탁드려요.”
일과도 관련이 있다고는 말했지만, 어차피 진짜 사정이야 꿈에도 모르고 있으니까. 간절한 투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말하자, 아버지 쪽도 제법 의무감이 생긴 모양이다. 아버지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2주 만이다. 그 이상은 안 돼.”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내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다솜이의 손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쪽 눈썹을 올려 짓는 표정을 다솜이에게 몰래 보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어머니가 울기까지 하고 있는 건지. 다솜이는 내 쪽을 보면서 힘이 빠진 듯한 웃었다. 아마도 나름대로의 소설을 썼을 것이다. 내가 한 말들을 전부 옮기진 못할 테니.
“여보, 당신은 어떻게 결정했어?”
“괜찮다고 했지.”
“나도 별 상관없다. 딸 하나 생긴 셈 치고 돌봐주마.”
집을 나오려는데, 부모님이 나를 바래다준다고 쫒아 나왔다. 아마도 나눴던 이야기가 범상치 않아서 부모님도 걱정이 될 것이니까, 그래서 안하시던 행동도 하시는 거겠지. 다솜이도 함께 나왔다. 부모님이 대문 앞에서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고, 마지막으로 다솜이의 시선을 한 번 맞춰주고는 등을 돌렸다.
집 밖의 모퉁이를 한 번 도는데 등 뒤에 가벼운 충격이 왔다. 다솜이가 쫒아나와서 내 등에서부터 껴안은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섰다. 마치 탈진한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힘을 내. 어차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살러 가는 거잖아. 느릿하게, 몸을 돌려 내 등에 묻은 고개를 떼고서 나는 다솜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무엇 하나, 다솜이에게만큼은, 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다솜이는 잘 있는가?
다솜이에게 물어서 알아낸 아버님의 핸드폰 번호. 다솜이 아버님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버님. 일하시는 곳이 어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