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 0013 인형사
먼저, 여기에 써놓는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한 인형사의 일기임을 밝힌다. 그는 존재했었고, 자신을 바꾸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이 일기를 쓴 장소와 그 신비의 책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그가 실재하고 있다는 걸 알
게 되었으니까. 그것으로 이 일기의 신빙성은 확실해졌다.
사실, 그는 지금도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그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볼 기회를 얻었었다. 그는 해외의 어떤 거대한 저
택에서 그녀와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에게 일기를 보여주자, 그는 내게만 보내는 표시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
만 그에게는 성대가 없기 때문에 목소리로 의사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그녀는, 그의 손을 잡는 것으
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의사를 대신했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그들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 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맹세
한다. 아마도 지금쯤은 그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원망하여 죽이러 올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지면을 통해 이 일기를 밝히는 이유는, 자신의 속에 숨어있는 철저한 고립감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바란다는 것, 그것 하
나뿐이다. 그 고립감은 어떻게 보면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 자신의 구원을 이뤄줄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
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이 당신의 심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심연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3월 1일
아직 날씨는 쌀쌀하다. 시골에 있는 내 작업실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게 먼지에 쌓였다. 생각해보면, 아주 같잖은 짓거리의 향
연 속에 빠져 있었다. 그건 결국 내게 깊은 실망만 안겨주었다. 모든 것은 거짓이고, 반짝거리는 것들은 허영덩어리라는 사실
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잠시 내 눈을 가리고 나를 속였다. 그건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든 맞추려 노력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작업실로 돌아온 건 불현듯 뭔가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그걸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그건 어쩌면, 내 영혼을 뒤
흔들만한 상일지도 몰랐다. 이제까지 내가 작업해오고 전시회도 열었던 그 모든 인형들보다 훨씬 더 강렬한 그 어떤 것일지
도 모른다.
3월 3일
내가 어디 있는 지를 수소문한 친구가 작업실에 찾아왔다. 그는 내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좋은 친구였
다. 하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는 일에는 내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그는 내 전시회의 큐레이터이기도 했다.
곧 있을 전시회를 두고 왠 작업이냐는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술을 한 잔 따라주었을 뿐이다. 그가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안다. 그
저, 나는 잠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은 겨우 얼굴의 형태만 완성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느낌이 너무 황홀하달까, 하여간 그래서 빨리 몸을 만들어주고 싶
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인형을 만들 때는 늘 빨리 진척되지 않는 작업속도에 대해 조급증을 냈는데, 이번 건 솔직히 집착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조급증이 나고 있다. 다시는 실망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라도 쏟아 붓고 있는 건가. 어쩌면 지금
여기에 쓰고 있는 이런 말들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3월 7일
친구가 다시 한 번 찾아왔지만 나는 없는 척을 했다. 그 친구가 창문들을 둘러보며 한동안 이 안에 내가 있나 찾으려 했을 때
나는 비굴하게 엎드려 숨어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이렇게 도망치려 하고 있을까. 하지만 답은
없었다. 빨리 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녀를 꺼내놓고 싶다. 아직은 몸의 형태도 채 만들어지지 않았다. 좋은 나무를 너무 많
이 버렸다. 다른 재료들도 필요하고.
3월 12일
여러 번 끌과 사포를 놓아버렸다. 벌써 음식을 안 먹은 지도 사흘이 되어간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사왔던 라면을 끓
이기 시작하다 보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자책하면서 다시 일어서서 작업도구들을 잡는다. 펜을 쥐고 이렇게 쓰고 있
는 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오늘은 가까스로 라면을 먹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니까, 살아야 한다. 그녀의 몸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날씬하지만 동시에 내가 만든 다른 것들과는 달리 썩 날씬하지 않다. 오히려 더 살아있는 인간과 가까운 몸이랄
까. 그런 느낌을 불어넣으려 고생했다. 사포질 한 번만 잘못해도 날아갈 곡선에 신경을 썼다.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다.
3월 15일
친구가 한 번 더 찾아왔다. 이 귀찮아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 전시회는 제발 네가 알아서 하라고.
(옮긴이:이 전시회는 실제로 3월 20일 경 한 기록이 있다. 본인이 입수한 브로셔와 팜플렛에는 분명 이 작가의 전시회와 그 내
용이 남아있다. 이름까지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이 쪽에서는 꽤 유명한 구체관절인형사였다.)
관절의 구동이 생각보다 썩 좋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왜 이렇게 고생인지 모르겠다. 다른 작품의 배의 힘과 노력과 시간을 들
이는데도 진척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여자가 튀어나오려는가 보자. 좀 더 굳세게 맘을 먹어야 한다.
3월 23일
잠을 한 숨 자고 나니 좀 더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요근래는 전혀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 같다. 그건 머릿속에 있
는 그녀가 자꾸 자신을 꺼내달라는 악몽 같은 것에 시달렸던 때문이다. 작업장이 나름대로 남향이라서 그닥 춥지는 않지만,
여전히 산의 쌀쌀한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내일은 나가서 문풍지 같은 것이라도 사와야 겠다. 바깥의 나무에는 어느새 가지에 눈이 돋고 있다. 나무들은 지금이 따뜻함
을 느끼는 시기이겠지만 내게는 아직도 추운 계절이다. 그 실망들은 아직도 나를 붙잡고 놓지 않고 있다. 다시 작업도구들을
잡고 그녀의 팔과 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얼굴이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말아달라고.
내가 했던 사랑이란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람을 만나고 내 멋대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결혼까지도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내 맘속에서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들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속에는 그녀가 계산한
현실과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과 그녀가 생각하던 이상들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시도들만 있었을 뿐이었고, 그건 나도 마찬
가지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고, 모
든 것은 두 사람이 빚어내는 껍데기와 허영과 거짓, 그리고 증거도 남지 않는 섹스의 시간만 남을 뿐이다. 지금 사랑한다고 내
뱉고 있는 수많은 말들과 어깨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니는 수많은 짜릿한 감정들은 모두 죄악이며 곧 무너질 성채를 다시 쌓
는 쓸데없는 되풀이됨이다.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결국은 계산이 틀어지거나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내던져버릴 그런 만남
들.
그렇다면, 왜 사랑이란 거대한 거짓말은 내게 이런 굴레를 씌우고 날 외롭게 하고 나를 미치게 만드는가. 나는 거기에 어떤 해
답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만, 사랑이란 것은, 이제 없다는 것만 깨닫고 있다. 그 깨달음은 일종의 실망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작업은 아마도 그런 실망에 대한 대답이 될지도 모를 거라 느낀다.
3월 27일
겨우 그녀의 몸을 완성했다. 이게 제대로 된 건지 아닌 건지 확신하지 못할 노릇이었지만, 잊고 있던 그녀의 머리를 꺼내어 맞
춰 보았을 때, 나는 확신했다. 지금의 몸이 제일이라고. 그리고 완성된 팔다리도 맞춰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모든 것이 들어맞
았다. 이렇게 한 번에 맘에 든 적이 없었다. 다른 인형들은 언제나 만들어놓고 나면 어딘가를 수정해야 했고, 그건 조급증을
더하게 만들어 늘 나를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건 달랐다. 이렇게 맘에 드는 몸을 계속 만들려면, 지금 작업량의 배 이
상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옮긴이: 실제로 이 인형사의 작업량을 관련자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한 달에 10건 이상의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10건이면 쉬
운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하나의 작품을 봤을 때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며, 그는 상당히 부지런했던 편으로 생각된다.)
그녀의 몸에는 이제 그만 손을 대고 그녀의 표정을 생각해야 한다.
4월 4일
그녀의 표정을 무표정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나 표정을 부여하던 그 짓을 그녀에게는 하지 않기로 했다. 표정이 없지
만 그럼으로써 더욱 속마음이 드러나는 그런 얼굴을 만들 수 있을까.
4월 5일
안 돼. 안 돼.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야.
4월 9일.
어느새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있었던 시간이 많아져서, 오늘은 특별히 밥을 먹기로 했다. 쌀내음의 구수함이 내가 잊고
있던 세계들을 떠오르게 했다. 놀랍게도, 이전과 같은 실망스런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식욕은 위대하다. 모든 것의 상위
에서 인간들을 쥐고 뒤흔든다. 나조차 그런 것의 노예가 되어있으니. 때로는 이런 식욕이 구차하고 하기 싫은 어떤 더러운 짓
같기도 했는데.
그녀의 표정 밑그림이 완성된 기념적인 날이다. 몇 번을 연필로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고생한 보람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 좋은 김에 이따가 술도 한 병 해치워야 겠다. 그런데 막상 손을 대야 할 때는 또 다른 문제겠지. 만약 선
하나만 잘못 그어도 큰일이다. 에나멜을 지우게 되면 그만큼의 흔적이 남아서 나중에 살색 밑으로 배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
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겠지만 내게는 패혈증에 걸린 사람들의 얼굴마냥 아주 지독하게 눈에 띌 것이다.
4월 14일
그녀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사포로 갈면서 헤어진 그녀에 대한 혐오는 이제 점점 나에 대한 혐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잘못하고 있었다. 그 5년이라는 세월동안 내가 얼마나 나만을
생각했는지, 온갖 순간적인 때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서 깨닫게 되면 그 때마다 잠시 일손을 놓아야 했다. 나는 얼마나
쓸모없고 가치없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덕에 손가락과 발가락은 다시 작업해야 할 판이었다.
만들어 놓고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연필 밑그림만 완성된 그녀의 표정이 내게 말한다. 괜찮다. 괜찮다고.
헤어진 그녀를 봐서 이런 얘기들을 해주면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그 어
떤 것도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끝맺음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러길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녀의 생각은 잊고 나의 새로운 그녀에게 몰두해야 할 때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다시 작업하
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완벽한 모습을 바란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손가락과 발가락은 그녀의 약점이 될 것이다.
4월 19일
손가락과 발가락을 결합하는 작업이 끝났다. 이제는 얼굴만이 남아있다. 이건 좀 비싼 재료들이 필요할 것 같아서 차를 몰고
외출을 했다. 그녀와 헤어졌던 날들로부터 거의 3개월이 지났건만 그다지 바깥세상은 변한 것 같지 않다. 좀 변해줬으면 했건
만.
화장품 등의 색감을 살펴보면서 색을 신중히 골랐다. 다양한 잡지도 한 번 살펴보았다. 대체의 유행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하
나 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 대한 색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창조해야 할 것 같았다. 동대문에 들러 가발거리도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을 뽑아서 일일이 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좀 골치 아프다. 보통 때야 그냥 씌울 수 있는 것으로
자작해 만들곤 했지만, 이번엔 아예 머리카락을 글루건을 이용해서 하나씩 접착해볼 예정이다. 좀 더 긴 시간이 지날 것이고,
그 때쯤이면 뭔가가 변해 있을 테지.
5월 1일
유리를 잘 녹여서 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여섯 번 정도의 실패를 거듭한 끝이었다. 색소가 퍼지지 않게 잘 녹아들어
가야 했는데, 몇 번이나 이게 잘 되지 않았다. 자연스런 갈색이 나오지 않거나, 아니면 내가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수정한 끝에 좋은 눈 두 개를 얻었다. 처음엔 아예 눈도 구동하는 구체로 만들어볼까 했지만, 이 방식이 더 맘에 들었다.
그녀의 눈을 접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기분이다. 이제야 세상을 볼 수 있을 그녀. 하지만 그녀에게 바
깥세상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저 어두운 곳에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녀의 완성된 눈을 앞에 두고 술
을 마셨다. 너무 일찍 기분을 내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술은 안주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잘 넘겨졌다.
꿈에 뭔가를 보았던 듯 한데,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건 완성된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정도였다는 것뿐.
5월 10일.
그녀의 온몸에 살색을 뿌리고 잘 마를 만한 곳에 놓아두었다. 새들이 자주 날아다니는 곳이어서 새똥에 대한 대비도 해야만
했다. 오늘로써 몸에 대한 도색도 완성된 셈이다. 색깔이 은은히 배어나오도록 한 5번을 뿌려댔으니까.
이제부터는 고생길이다. 가발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을 구했다. 가발을 자르고 머리에 한번 구멍을 뚫고, 한 가닥을 심고, 글루
건을 쓰고, 이런 과정을 셀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하고, 거기에 헤어스타일도 고려해야 한다. 다 심은 다음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머리 모양도 좀 내야 하는 걸까. 아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5월 23일.
그녀의 얼굴까지 완성되었다. 머리도 그런대로 잘 심어졌다.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섰다. 조금 있으면 장마가 시작될 것 같다.
눅눅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보온이 필요하다. 조금 덥긴 하겠지만, 그래도 축축한 것보다는 낫겠지.
그녀의 표정이 아주 그럴듯하다. 다음에도 이런 표정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을 정도로 제대로 만들었다. 어쩌면 며칠 지난 후
에 보게 될 때 싫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겠지만-이 때까지의 인형들이 전부 그랬다- 이번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녀는 뭔가 특별하다. 다시 술을 넘겼다. 이번엔 잘 넘겨지지 않았다.
5월 26일.
그녀를 위한 옷을 구했다. 그녀의 사이즈와 속옷 따위는 생각해 두었던 것이 있다. 심플한 스타일의 검은 색 브라와 역시 같
은 색의 망사팬티. 나는 이런 스타일이 좋다. 그리고 옷도 사두었다. 옷은 역시 늘 알고 있던 업체에 전화로 주문했던 것을 가
져왔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냐며 주인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들을 들고 와
서 입혀본 결과는 놀라웠다. 그 업체의 작업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강 늘 알려주던 치수만 알려줬는데도 중세식의 레이스가
들어간 멋진 옷을 만들어줬다. 그것도 역시 검은 색이다.
맙소사, 그녀가 내게 고맙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5월 28일.
그녀가 서있는 걸 힘들어 하는 것 같길래 의자에 앉혀주었다. 보통 때 같으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든가 하겠지만, 이번
엔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친구에게서 온 전화는 내게 전시회가 그런대로 잘 끝났으며, 아마도 다음 전시회 일정까지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알려왔다. 잘 하면 광주비엔날레 쪽에도 간택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말들이, 갑자기 심드렁해졌다. 내가 이뻐하지도 않는 수많은 아이들을 늘어놓고는 오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고 잘좀 봐주
세요, 하는 짓거리를 예전엔 중요하다고 여겼지만, 이젠 그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 내 눈 앞의 그녀만 있으면 될
따름이다. 밖은 장마철의 우중충하고 눅눅한 공기로 가득차 있다.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보일러를 세게 틀고 있다. 더운 기운
에 나도 옷을 벌거벗은 채로 있다. 덕분에 습도계는 걱정할만한 수준의 눈금은 아니다.
6월 17일.
그녀는 볼수록 뭔가 강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때까지 만든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녀는 내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몇 번 외출을 해야만 할 때마다 나는 그녀 걱정이 되어서 서둘러 돌아왔다. 물론 거기까지 일부러 찾아와 그녀를 훔
쳐갈 만한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녀는 정면에서 내게 인사한다. 잘 다녀오셨느냐는 기운을 눈에 가득 품고 있다. 장마철이
끝나가는 지금, 그 눈이 빛이라도 받으면 그 기운은 더 강해진다. 그것은 나를 보며 환희에 빛나는 눈이라고 표현을 해도 될만
큼 강렬하고 달떠있다. 나는 그녀를 한없이 쓰다듬어 준다. 요즘의 일상은 그런 식이다. 그래도 밥은 챙겨 먹는다.
6월 25일.
나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트도 아니고,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어줄 요정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그녀가 살아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말에 무응답으로 대답한다. 그녀가 주는 정적은 모든 것
을 이해하고 있다는 식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만의 망상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내게는 무척 소중하다. 점점 외출의 횟수가
적어지고 있고, 바깥 세상은 점점 두려워지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내 전시회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에 대
한 준비로 3개월 정도가 걸려 가을 경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친구에게 알아서 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나
는 계속 작업실이 딸린 이 작은 별장에 남아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7월 4일.
강한 여름의 햇빛이 그녀의 색을 변하게 할까봐 나는 그녀를 창문에서 멀리 두었다. 직사광선은 그녀의 피부에 적이 될 것이
다.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사랑에서 섹스를 거세한다면 그게 사랑이 될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
한다. 왜냐면, 지금 내 상태가 그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딴 짓은 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
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무응답이니까.
그래도, 그녀가 그럴 거라고 믿으며 또다시 사랑한답시고 내 맘대로 하는 행위 따위를 반복하기는 싫다. 지금은 단순히 이대
로라도 좋다.
7월 19일
밥을 먹어본지가 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모종의 결심을 했고, 내가 알던 어떤 점성술사에게서 책을 한 권 얻어왔다. 그
의 말로는 이건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서적이라고 하는데, 뭐 어떻게 되었든 내게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죽게 된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밖에서는 이제 여기에 절대로 침입하
지 못할 것이다. 이미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셔터 같은 것으로 꼭꼭 막아두는 공사를 끝냈다.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좀 더 굶어야 한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7월 24일
이제 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서적에 따르면 먼저 주술적인 원호를 그리고 그 안에 육망성과 오망성을 조화있고 정
확한 위치에 배치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양의 자신의 피가 필요하다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피를 뽑아야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하니, 확실히 제대로 목숨을 거는 셈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
8월 2일.
내 피를 조금씩 계속 빼면서 그것을 생명력으로 치환해 가는 과정은 너무 험난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탈도 없
이 잘 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한 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으니 내 몸을 구체
관절화 하기가 너무 쉽다. 평소 사람과 비슷하게 해보려던 모든 시도들을 충족할 수 있어서 좋다. 내 몸이 실험재료가 되니
까. 오늘은 무릎관절을 변형해보았다.
믿기지가 않을 노릇이다. 이건 진짜다. 이 책은 진짜였다. 이제 정말 그녀와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사고가 어떻
게 정지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까지 나와 그녀는 같이 있을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8월 4일.
내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의식과 몸은 멀쩡하다. 조금 냄새가 난다. 내 살이 썩어문드러져 나가는 냄새다. 모든
감각은 살아있는데, 통각만 사라진 채다. 이제 조금 있으면 뼈에서 썩어가는 살을 분리할 참이다. 그리고는 관절 부근에는 모
두 구체관절을 실행할 예정이다. 무릎 두 부분을 실행해 본 결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의식은 살아있
다. 그녀와 같아지는 나. 이제는 상대에게 맞춰가는 사랑이란 것을 확실히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아무도 하지 못한 사랑을 나
는 해낼 수 있다.
8월 5일.
(옮긴이: 이 날짜에는 글씨가 약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옮겼는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손가락에 힘이 없다. 썩은 살들을 떼어내고 나니 근육과 신경줄까지 다 떼어내야 했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온 몸에 힘을 줄
수 있는 근육의 역할을 할 소재가 필요하다. 나무야 원래 많았으니 쓸 수 있겠지만, 지금 근육의 소재는 좀 절실하다. 스프링
보다는 고무줄이 낫겠지만, 고무줄은 금방 끊어져 버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이런 소재를 구할 수만 있다면 좋겠
다. 좀 더 미리 생각했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야 하겠다.
8월 10일
이제 모든 건 준비되었다. 내 몸에 살 대신 나무를 씌우고 나를 좀 더 인형같이 만들었다. 눈에는 동그란 구체를 박아 넣었고,
근육문제도 아랫마을에서 훔쳐온 고무장갑 등을 이용해서 해결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녀와 사
랑을 하는데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표정은 내게 안도감을 준
다. 내가 한 일은 옳았다. 나는 그녀의 창조자임과 동시에, 그녀 또한 나를 창조하고 있다.
8월 14일.
그녀가 일어났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나는 서투르게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이내 그것이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냥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이제, 이 일기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영원히 함께 하려던 내 소망은 실현되었다.
날 아프게 했던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은 무엇으로 할까.
그냥 안녕이라고 해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