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사랑이야기
이미 어두워져 한치 앞도 분간이 불가능한 북미 어딘가의 삼림 지역. 그 곳을 UH-1 블랙호크기가 한 대 날고 있었
다. 야간강습형으로 특화된 기체 내부에는 보통 기체에 장비되지 않은 광역레이더와 소음방지형 엔진, 그리고 수송
헬기 답지 않게 공격용 미사일포드에 공대지 미사일까지 달려있었다.
달마저 검은 구름에 가리워진 채여서 어둡기만 한 숲의 나뭇잎들을 강한 바람으로 뒤흔들어 놓으며 각종 장비에 의
지한 채 그 기체가 가고 있는 목적지는 한 지점, 정확히는 그 삼림 안의 야트막한 고지에 자리 잡은 채 외부와는 담을
쌓고 있는 연구소로부터 5km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 지점에 내려줘야 할 승객 하나가 헬기 안에 탑승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야시경으로 전방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조종간을 쥔 장갑 안의 손이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것을 느끼는 조종사.
그에게는 불쾌감이 더해졌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저녁은 비번이었을 것이다. 간만의 시간이 나서 여자친구와 잡은 저녁약속이 본부에서 온 전화
한 통화로 확 날아가 버린 만큼, 이 임무도, 뒤에 타고 있는 사람도, 그리고 지금 이 어두운 숲 위를 날고 있는 긴장감
도 모두 다 맘에 들지 않았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씹어 삼켜버릴 듯한 살벌한 눈빛으로 묵묵히 조종을 하던 조종사
는 급기야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제기랄, 도대체 왜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이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보통 때 같으면 그러게 말입니다,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어야 할 부조종사는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니, 그
냥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조종을 하고 있는 조종사보다 훨씬 더 긴장한 듯한 표정과 분위기였다. 그
런 부조종사가 보이는 반응과 모습에 조종사의 화는 더 솟구쳤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조종사의 큰 목소리가 헬멧의 무전을 타고 전달되어 오자, 부조종사는 헬멧을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두들기면서 조종
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건 오랫동안 파트너 생활을 해온 조종사와 부조종사 둘만의 신호였다. 다른 사람들 몰래 대화를 하기 위해 다른 특
정주파수로 신호를 맞추라는.
조종사가 채널을 돌려 맞추자 부조종사의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렸다.
“대위님.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오늘은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위님이 모르는 게 있어요. 저 친구, 론울프에요.”
“뭐!”
대위라 불리던 조종사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론울프. 소문으로 듣기로는, 적지에 단신으로 투입되는 특수부대원들의 코드네임이었다. 다른 이름 같은 것은 그들
에게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수십 개의 위장증명서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적지에 단신으로 투입, 임무를 수
행해내는데, 그 임무의 보통 내용들은 통상적으로 적지의 궤멸이었다.
그러려면 보통 스페셜 포스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훈련내용, 또 다른 곳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훈련과정의
오랜 연마시간을 거쳐야 하지만 분명히 그를 태울 때 보았던 얼굴은 너무나도 앳된 얼굴이었다. 키는 중키에 머리는
살짝 긴 채였고 얼굴은 끽해야 스무 살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정도의 외모로 모포를 둘둘 말고 자고 있는 동양인.
서양인들의 기준에서 동양인들의 나이를 따지는 건 정확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대위도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털끝만큼도 모르는 대위가 봤을 때도 그 느낌이 네이비씰의 파사데나 훈련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풋내기 같은 외
모의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떻게 론울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저 놈이 론울프란 걸 확신하나?”
“이번에도 비행명령파일, 세즈닉 몰래 봤거든요.”
세즈닉은 그들에게 비행명령을 내리는 상관이었다. 가끔씩, 그가 받은 명령서를 두 사람은 세즈닉 몰래 자주 훔쳐보
고는 했다. 그래서 엔간한 임무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고, 그게 그들의 많지 않은 유희 중 하나였다. 마치 007같은
첩보원의 스릴 같은 것처럼.
“대위님도 많이 들어봐서 아실 겁니다. 론울프를 태우고 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론울프를 강하시키는 임무는 많이 받지 않는다. 하지만 횟수와 상관없이, 론울프를 강하시
키려면 상당히 위험한 곳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것은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자신의 동기들 중 상당수는 론울프로 추정되는 인간들을 태우고 가서 죽었던 사람들이 꽤 된다. 이른바, 론울프 강하
임무는 저승입구로 날아가라는 의미와도 통하는 것이어서 대체로 조종사들에게는 론울프를 태워야 한다는 그런 내
용까지 세세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러지 않아도 조종사들 사이에서 입을 타고 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요근
래 론울프를 태우고 가는 임무는 없었는데, 하필이면 재수 없게 자신들이 딱 걸려버린 거였다.
광역레이더로 비춰지고 있는 건물의 5km 떨어진 지점이라도 그것이 별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
는 걸 알게 되자, 더더욱 맘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대위는 조그만 백미러를 통해 뒤에 앉은 사신을 힐끗 바라 보았다.
그는 헬기 안의 그 추운 공간에서 여전히 모포에 휩싸인 채로 졸고 있었다.
론울프가 눈을 뜨고 자신의 몸에 말려 있던 모포를 개키기 시작한 건 헬기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이 느껴졌을 때
였다.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그의 머리에 쓴 헤드셋으로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목적지점. 강하준비.”
헬기 안의 작고 붉은 등이 켜지고 있었다. 강하신호를 받고 론울프는 자신의 장비를 챙겨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래봤
자 그리 무겁지 않은 몇 개의 간단한 장비였다.
그 장비들은 얼핏 보기에는 수많은 특수부대원들의 그것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수수하고 허술해 보였지만, 그건 론울
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기, 의약품, 정보기기 등등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서바이벌 기술을 어렸
을 적부터 반복해 온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한 양의 짐이었기 때문이다.
로프가 내려지고, 론울프는 패스트로프 강하를 시작했다. 헬기의 강한 바람이 착륙지점의 수풀들을 뒤흔들고 있었
고, 그 바람에 몸도 꽤나 흔들릴 법했지만, 안정감 있게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는 아래를 향해 되돌아가라는 신호로 깜
박이는 불빛을 한 번 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론울프의 귀에 헬기의 로터와는 다른 뭔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
지고 있었고, 동시에 그 공기를 가르는 존재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된 헬기가 로프도 감지 못하고 순간적으
로 회피기동을 하려 기체를 급하게 틀고 있었다. 론울프도 반사적으로 근처의 숲 나무등걸 근처로 뛰었다.
길게 연료분사의 궤적을 끌고 온 조그만 미사일 하나가 헬기의 옆구리와 보조로터 사이 어딘가에 직격했다. 파괴음
과 함께 헬기가 균형을 잃고 미친듯이 회전하며 추락하기 시작했고, 고도가 떨어진 헬기는 숲 나무 어딘가에 걸려서
메인로터를 긁어대다가 느닷없이 굉음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뻘건 불길이 오르는 광경을 론울프는 몸을 숨겼
던 나무등걸에서 살펴본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헬기가 추락한 장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보통은 헬기가 RPG의 직격탄을 맞아도 그렇게 기체가 대파되어 버릴 만큼 폭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
을 때, 아무래도 미사일은 먼저 기체에 안착한 다음 잠깐의 지연시간 후 폭발하는 원리의 지대공 미사일 같았다. 간단
한 원리 같기도 했지만, 탄두까지 보호하면서 지연된 폭발을 유도하면서도 내장된 폭발물만으로 이만큼의 폭발을 이
끌어내는 기술 자체는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다. 론울프는 거기까지 곱씹으면서, 자신이 가는 곳이 다른 곳에 비해 그
리 녹록하지는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했다. 이런 무기들까지 장비하고 있을 정도라면, 아무래도 생
각했던 예상시간에 비해 더욱 공을 들여야 할 상대들일지도 몰랐다.
예상대로 저쪽이 움직여 준다면, 헬기 잔해를 수색보고하기 위해 대기조로 있던 전초수색분대도 올 것이다. 그 분대
는 먼저 좀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론울프는 헬기가 추락한 장소에서 머지 않은 곳의 나무등걸에 하나에 도착
해서 짐에 묶여있던 판초우의를 꺼내 펼쳐 위에 나뭇가지들로 대강 위장을 했다. 어느 정도 위장이 완성되었을 즈음,
론울프는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놈들이 오는 건 날이 좀 밝든가, 아니면 두 시간 이내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한 놈들은 아니기를 빌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