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사미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깨어났다. 푹신한 침대, 그리고 그 속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자신을 깨달은 후에야 사미는 소스라치듯 놀라 일어났다. 사미의 귀에 뭔가 나무도마에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있던 시운이었다. 시운은 기척을 느끼고 사미 쪽을 바라보았다.
“일어난 거야?”
사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잠시 주화입마에 들었던 터라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도 잘 몰랐다. 그러다 한꺼번에 기억이 떠올랐다. 아미파가 전멸한 그 광경, 복면을 한 어떤 남자들과 수많은 총격의 소리, 그리고 주지스님의 마지막, 그리고, 그리고,......
“으아아아아악!!!!!!!!!!!!”
사미가 소리를 지르자 시운은 음식을 준비하던 걸 그만두고 사미를 진정시키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미는 굉장한 힘으로 그 손을 떨쳐내 버렸다. 무의식중에 반탄강기를 손에 불어넣은 상태라 시운도 엉겁결에 잠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여긴 어디죠?”
사미가 중국어로 물었다.
“여긴 한국이야.”
시운 역시 중국어로 대답했다.
“한국이라고.....그럼.......당신은.......”
“그래. 시운이야. 류시운. 어렸을 때 몇 번 봤지?”
“아.......”
사미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걸 보고 있던 시운이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를 부축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듣자. 일단 진정하고, 누워서 쉬는 게 좋아. 좀 더 몸이 회복되면 운기조식에 들어가도록 하자. 만약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라면 내가 연락해 줄 테니까.”
사미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뭔가 악몽을 꾼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미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이 아프다는 것과, 전달해야 할 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기억해내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피로감과 힘들었던 모든 감정들이 서서히 사미의 눈꺼풀에 무게를 실었다.
시운은 잠든 사미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맨 처음에는 1번을 누르고 그 다음은 0번만 일곱 번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하기는 전화를 받을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오냐. 시운이냐? 그래, 북쪽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해결은 했어요. 하지만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요. 그 쪽에서도 준비했던 게 있었구요.”
-바름 가문이었군.....
“네. 하지만 할아버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 지금 사미가 와있어요.”
-사미? 아미파 제자가 우리나라엔 어인 일로?
“그게 좀 복잡해요. 아무래도 아미파가 어떤 파에 습격당한 것 같아요. 사미도 지금 내상을 입었어요. 보기 드문 격공장으로.”
-뭐라고? 정말이냐?
“네.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알던 사람들 쪽으로 연락을 좀 취해보세요. 아미파의 후계자가 이 지경인 걸 보면 구파일방 중에 몇 문파는 벌써 당했을지도 몰라요.”
-그래, 알았다. 내 서둘러 알아보마. 그리고 사미는 되도록 빨리 이 쪽으로 데려오도록 해라. 그 쪽으로도 차를 보내도록 하마.
“네, 할아버지.”
시운은 전화를 끊고 사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은 당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사미의 몸에 무리한 여행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사미의 정신력만을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번 일을 지체한 것은 손해였다. 특히 그 아미파의 계집이 도망쳐 버린 것 말이다.”
말이 울려 퍼지는 어두운 강당에는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으로 칼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모아온 기보의 검과 도들. 크기마저 제각각인 그것들은 끝의 한 돌의자를 향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돌의자에 앉은 자는 그 어두운 강당과는 대조되는 백의를 입고 있었다. 긴 백발과 그만큼이나 긴 수염. 그 털들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계속 꿈틀댔다.
그 전언을 온통 흑색의 택티컬 베스트와 전투복을 입은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머리는 그의 사부와 마찬가지로 장발이었으나 긴 흑단처럼 부드럽게 내리 뻗은 그 곡선이 사부의 뻗쳐진 백발과는 사뭇 달랐다.
“족적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무래도, 평상시에 준비해 두었던 비상망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 비상망은 다 파헤쳤으나, 아직 살아남은 놈 하나가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간문제입니다. 곧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년이 엉뚱한 곳으로 도망가지 말아야 하는데.....특히 한국 쪽으로.....”
주름투성이의 손이 우려를 실은 채 수염을 쓰다듬었다. 만약 표적이 한국 쪽으로 도망을 갔다면, 분명히 푸름과 바름 가문 둘 중 하나를 만났을 것이다. 아직은 북과 남이 서로 갈려져 있다고는 하나, 사안이 중대하다면 힘을 합치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을 터.
그렇다면 일은 더욱 복잡하게 되어버린다. 어쩌면 그 두 가문 때문에 실패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싹은 애초에 키워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가 그들의 개입을 더 앞당기게 되는 상황도 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백의의 두령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한국 쪽에는 먼저 손을 써둬야 되겠군. 이제 그 두 가문의 비록이 필요한 때도 가까웠다. 풍호회의 일검대 중 인원의 반을 모두 집합시켜라. 그들이 서로 반목하고 갈라져 있는 틈을 타서 우선 한 가문이라도 없애버리면 될 터.”
“일검대의 반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그들이 위험한 존재들입니까?”
“내 알고 있는 바는 그러하다.”
긴 수염이 흔들리면서 신형이 곧추세워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검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 검의 날이 횃불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예리하고 폭이 얇은 검을 하나 뽑아들자 다른 검들의 검기가 검은 색으로 뭉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흑발의 수하는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검이 천천히 그에게 공중에 떠서 다가왔다.
“암한절명쾌검. 네게 주지. 이번 임무는 우리의 최종목적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검을 써서라도 그들을 절멸시키도록.”
찬기운과 검은 기운으로 밝은 기운을 베어버린다는 사도의 기보.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흑단의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존명.”
흑단의 수하가 천천히 그 강당을 나와 밖의 탁 트인 공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높은 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그 공터에서 그는 피리를 품속에서 꺼내어 낮게 불었다. 길게 이어지기도, 짧게 끊어지기도 하는 그 소리의 신호가 계속 되자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앞으로 일검대의 수하들이 모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흉흉한 눈빛과 독기의 사악함에 물든 자들. 그들을 흑단의 수하는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훑어가던 눈빛이 한 군데서 멈추었다. 하나같이 흑의를 입은 그들 가운데 분홍빛의 머리띠가 하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것을 그는 자랑스레 칼에 붙여놓고 있었다.
“그건 무엇이냐?”
수하의 대답을 받은 일검대의 한 놈이 대답했다.
“일종의 위안거리입니다.”
“어떤 추억에 관한 것이냐?”
“좀 떨어진 마을의 처녀에 관한 것이온데, 제가 처음으로 맛을 좀 보고 왔습죠, 그년의 향기를 잊지 않기 위해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힘이 발생했다. 강한 기운이 공기를 타고 퍼져나와 그 놈의 머릿속에 파고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검대부터 이, 삼, 말검대까지 편성된 풍호회, 그들의 특징은 언제나 먼저 그 검대에 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혈맥에 영향을 끼치는 몇 개의 힘을 그들의 급소 안에 두어, 필요한 때에 그들을 자신들의 뜻대로 죽일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하는. 조금 오른 내공실력을 믿고 까부는 어중이떠중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런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것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일검대들의 눈 앞에서 바로 보여졌다. 지껄이던 놈의 머리가 터져 뇌수와 피들이 범벅이 된 채 온 사방에 흩뿌려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놈들은 시선조차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놈의 죽음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 놈은 신참이었던 까닭이다.
눈치 없는 신참은 이런 식으로 종종 죽어나갔고, 이런 상황은 어느새 그들만의 작은 유흥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유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놈을 일검대로 천거한 자는 누구인가?”
한 놈이 그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복종으로서의 의미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놈은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이니까. 그래도 흑발의 상관은 칼을 가지고 자신에게 덤벼들면 시한폭탄의 힘을 쓰지는 않았다. 검으로 맞받아주었다. 실력만 위라면, 자신보다 언제든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일종의 퍼포먼스.
그러나 그 날 덤벼든 자는 운이 좋지 않았다. 흑발의 상관이 지니고 있었던 검은 평상시의 것이 아니었다. 칠흑같고 부드러운 머릿결 뒤에서 비기어검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쾌검. 뽑힌 것도 찰나, 달려 나온 놈의 검을 막은 것도 찰나. 짧은 순간, 덤벼든 놈은 죽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덤벼든 상대의 검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고생하였다. 쉬거라.”
슬픈 눈빛으로 그는 잠시 자신이 죽일 상대를 응시했다. 검이 사방으로 움직였고, 덤벼든 놈의 사지는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
그런 두 죽음을 보면서, 일검대의 인원들은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흑발의 상관, 소두령의 그 슬픈 표정에 대한 매혹을,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가진 검을 봄으로서 이번 모집의 상황에 부여된 무게감을. 첫 번째가 그를 영원히 따르고 싶도록 한다면 두 번째는 평소에 가지고 있던 긴장감을 더욱 배가해서 끌어올려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했다.
“이 검을 봐서 알겠지만, 이번 임무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두령께서는 일검대의 반을 투입하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인력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소두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전부를 돌아본 후 말했다.
“이번 상대는 한국의 이름없는 문파다. 가고 싶은 사람만 손을 들도록.”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의인들의 손에 쥐어진 검이 뽑히지 않은 채 높이 들려졌다. 전부가 이 임무에 자원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검을 들지 않아 일선에서 적을 베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자들. 소두령의 마음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자들. 그것이 일검대의 기풍이었다.
검집을 쥔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흥분된 힘이 충만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