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창전 - 4. 푸름 가문

NEOKIDS 작성일 08.05.07 01: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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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푸름 가문


“한국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지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중국인 치고는 유창한 한국어의 대답. 비자를 검사하는 담당관은 적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아직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때 중국인들이 보여준 폭력 시위와 그 이후 중국인들에 의해 발생된 범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점차적으로 비자 심문을 평소보다는 조금 까다롭게 하라는 지시가 자주 내려왔다.

비자 검사 담당관은 애초에 적환의 꼬라지가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 주제에 머리는 흑단처럼 길고 정돈되어 있으며, 중국인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멋진 인상이었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는 흡사 삼합회 같은 대형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었다.

“정말 지인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혹시 다른 목적이라든가.......”

“그건 일종의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뭐요?”

적환의 쏘아붙임에 담당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기는, 이런 건에 대한 접수가 중국대사관 쪽에 들어가고 그게 항의로 넘어오기라도 하면 자신에겐 해가 된다. 거기다가 실질적으로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 이상의 부정적인 대화들은 좋지 않았다.

담당관은 잠시 치솟던 노기를 다스렸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적환에게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뉴스를 보시면 아셨겠지만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요. 그럼, 즐거운 한국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적환은 여권을 주머니에 챙겨넣고 비자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역시 개방파가 가르쳐준 대로였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이런 류의 공무원들이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일에는 몸을 사린다는 그 정보.

이제는 자신의 검을 챙겨와야 할 시간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 검은 밤에 몰래 컨테이너 안에 입하될 것이고, 그 컨테이너의 번호와 위치도 알고 있다. 이것 역시 개방이 힘써준 덕이었다. 그러나 그런 간단한 일과는 별개로, 적환의 머릿속은 앞으로 해야 할 일 때문에 복잡해져 있었다.


먹향이 진하게 감돌고 있었고, 벼루에는 잘 갈린 먹물이 하늘을 회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창해는 일필휘지로 자신의 마음속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미가 실려온 지 1주일 째. 30명 남짓 되는 싸울아비에게 총기와 도검을 정비하게 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지만, 언제 올 지 모르는 적을 상대로 방비를 한다는 건 대단한 피로감을 몰고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조직 자체 뿐만 아니라 조직의 수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사미의 상태가 나아져서 자초지종을 물어봐야만 자신들의 움직임도 정해질 수 있을 터였다. 창해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불안이 꿈틀대고 있었다. 만약 그 이유 때문에 아미파가 절멸을 당했다면......

휘지를 쓰던 손을 놓고 고개를 흔들면서 창해는 그 불안을 부정했다. 그 때 시운이 방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경계계획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어요. 당분간은 싸울아비들이 피곤하겠지만요.”

“수고했다.”

창해는 말을 꺼내놓고 잠시 침묵했다. 시운도 그 침묵을 따랐다. 잠시간의 정적. 그 사이를 흐르는 먹물의 향.

창해의 손이 잽싸게 붓으로 가더니 다른 손이 지탄으로 먹물들을 튕겨냈다. 먹물들이 기를 머금고 맹렬하게 시운에게 달려들었다. 시운은 자세를 빠르게 변화시키면서 장으로 그 먹물들을 온 사방으로 튕겨냈다. 먹물방울들이 장의 살갗에 닿기도 전에 반탄을 맞고 반사되었다. 순식간에 넓은 방은 자잘한 먹물자국 투성이가 되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시운에게 느닷없이 목침이 날아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시운은 데굴데굴 굴렀다.

“아놔 정말! 할아버지! 뭐하시는 거에요!”

“야 이녀석아. 공격과 방어의 시전과 함께 호흡을 다스리라 그렇게 일렀거늘, 아직도 이후 호흡과 기를 고르는 그 버릇을 못 고쳤냐? 그러니까 그렇게 당하게 되는 게야!”

“이런 장난은 이제 좀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요?”

“장난이라고 했냐? 그랬구나?”

시운은 움찔했다. 자기가 무심코 뱉은 말이 큰 실수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아........아니......그건......”

“흠. 여지껏 한 게 장난으로 보였다니 네놈도 많이 컸구나. 이젠 한층 더 강도를 높여야 하겠는데~”

싱글벙글 웃으면서 장난기가 감도는 할아버지의 얼굴과는 다르게 시운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이제까지 할아버지가 한 공격들도 아슬아슬하게 막았는데, 여기서 더 수준이 올라가면 어떻게 버틸지 벌써부터 고민되고 피곤해지는 까닭이었다.

“그건 그렇고, 방 꼴이 이게 뭐냐.”

창해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시운에게 말했다.

“이건 네가 다 치워야 한다. 알았느냐? 아, 그리고 오늘 빨리 학교 가서 당분간 쉰다고 서류도 내고.”

시운은 이젠 엎드려 울고 싶었다.


사미는 잠시 앉아서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산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방비용 연못들 위에는 물풀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그 사이로 한갓지게 물고기 떼들이 노닐고 있었다. 몸은 나아졌건만, 사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아미파가 절멸되던 때의 참혹한 광경들만이 눈에 선했다.

불타는 본채,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피신시키다 절명한 호위 아미승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진형으로 사지가 찢어지던 스승님, 그리고 자신이 으깨어 죽인 수많은 사람들과, 마지막에 본 그 흑단의 남자. 그리고 기억하기 싫은 또 하나의 끔찍한 일.

어느새 맑은 눈동자 밑으로 눈물이 고여 고이 흘러내렸다.


인기척과 함께 창해가 들어오자 사미는 급히 눈물을 훔치고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다. 하지만 창해가 그것을 만류했다.

“되었다. 아직 편하지 않다 들었다. 앉거라.”

사미가 자세를 고쳐 앉자 창해가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아직은 많이 상심해 있을 줄로 안다만.......또 너의 몸상태가 어떠한 지도,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내 의원에게 말을 들어 잘 알고 있다만...... 그러나 사안이 중대해서 이것만은 꼭 물어봐야 겠구나. 나는 지금 너에게 아미파가 절멸되던 때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

한 순간 사미의 표정이 우울해졌고, 창해도 그런 사미의 표정을 읽고 급히 말을 꺼냈다.

“네가 지금 이야기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닙니다......소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고맙구나.......”

창해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아미파가 절멸당할 당시, 혹시 너에게 장살곤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주지 않았더냐? 이를테면 서책 같은 것이라든가.......”

“서책 같은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 혹시 너희를 습격한 그 놈들이 그런 것을 빼앗았는지 어떤지는 알겠느냐?”

그 놈들. 그 흑의의 놈들. 그 놈들을 떠올리며 사미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먹을 꼭 쥐었다. 창해의 마음은 그런 사미를 보며 너무나도 안타까워졌다. 하지만 사미의 고통을 알면서도 물어보아야 했다.

"혹시 그런 것이 있었는지 기억하겠느냐?“

“소저의......기억에는.......없습니다.......”

“오냐, 고맙다. 어린 것이 배겨내기 힘든 일을 당했으니 필시 많이 괴로웠겠지. 불쌍한 것. 편히 쉬거라. 시운이는 여길 대강 치우고 학교에 서류 처리를 하러 갔다 올 것이니 그 때 보거라.”

“저....제가 시운공자에게 무슨 결례라도.....”

“응? 그런 건 없단다. 그리고 그녀석이라면 결례는 실컷 해도 상관없는 놈이다. 그런 거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을 놈도 아니니. 껄껄껄~”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미가 포권을 하면서 예를 갖췄다. 그 때 창해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창해는 포권한 사미의 손 아랫쪽에 무언가 문신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잠시 후 사미가 좀 쑥스러워 하자 창해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원, 별말을 다하는 구나. 우리가 아미와 어디 남이더냐? 우리가 어려울 때에도 아미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느니라.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을 편하게 갖도록 하여라.”

뒤돌아서 나오는 창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어린 것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구나.......어찌할꼬.......어찌할꼬.......”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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