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여왕
2009년. 겨울. 서울의 산중턱,
빌라와 단독주택들이 담을 붙이고 모여 앉은 주택가.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남자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하얀 입김으로 바뀌고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살이 산소를 갈구하는 폐의 고통 때문에 더 구겨졌다. 나이도 나이지만, 원래 남자의 체력 자체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의 주머니에서 반쯤 삐져나온 약봉지의 겉면에는 심장약의 영문이 적혀있었고, 이미 그의 심장은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품에 아기가 하나 있었다. 남자는 잠시 벽에 기대어 몸의 고통을 달래며 그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는 그저 잠만 자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뛰어오느라 굉장히 흔들렸을 텐데도 아기의 표정은 찡그림 하나 없었다. 남자는 그런 아기를 보다가, 침을 삼키고는 다시 뛰었다. 군화발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고, 여러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여기가 산중턱만 아니었어도 남자는 벌써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점도 있었다. 남자는 벌써 이 산동네 근방을 두 시간째 돌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의 도망은 무리였다.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와 골목길을 몇 번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벽 옆을 살펴보았다. 대문 같지도 않은 대문에, 개 정도나 들락날락할 듯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남자는 그 구멍으로 아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도망쳤다.
얼마쯤 갔을까. 군인들이 남자를 발견했고, 두닥거리는 발소리와 거친 호흡, 그리고 군인들의 무전기 소리만이 조용한 골목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자도, 군인들도,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아야 할 어떤 비밀이라도 숨긴 것처럼.
그리고 이윽고, 발소리가 잦아들면서 두 명의 군인들이 쫒던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새로운 주름이라도 만들 것처럼 한껏 눈을 부릅뜬 채 주저앉아 있었고, 입 속에는 심장약이 한 주먹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은 채 녹지 않아 입안에서 흘러나온 거품과 함께 엉겨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한 군인이 급히 남자를 눕힌 채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동안, 한 남자는 허리춤에 있는 무전기를 꺼냈다.
“호랑이굴, 호랑이굴, 여기는 백호3, 목표는 위급상태고 여왕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
이기석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무전기를 움켜잡았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보고가 믿겨지지 않았다. 여왕이 보이지 않는다니. 그게 어떤 것인데.
“다시 찾아봐. 다시 찾아보라고! 없어지면 끝장이야! 달동네 사람들을 전부 수색해서라도 찾아내!”
다급하게 말하는 이기석에게 다시 무전이 들려왔다.
“다시 말한다. 아기는 없다. 이 작전 이외의 문제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상.”
“허가를 해줄 순 없소.”
어깨에 별4개가 반짝이는 옷을 입은 사람이 잘라 말했다.
“하지만 겨우 배양해놓은 여왕 샘플을 당장 찾지 않으면......”
“지금 당장을 생각해보시오. 군인들이 민간인을 함부로 수색한다니. 이슈가 될만한 문제란 말이오. 자칫하면 여왕 계획에까지 해가 될 수 있소. 우리는 되도록 안보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기는 위험하단 말입니다!”
갑작스레 흥분하며 소릴 지르는 박사를 장군은 얼음이라도 뱉을 듯한 말투로 얼렀다.
“그러지 말고 박사, ‘여왕’의 발동조건을 생각해봐요. 적어도 10여년 이상은 여왕이 발동할 까닭이 없잖소. 거기다 이런 동네라면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시설에 맡겨질 수도 있겠지. 일단 당장 부대를 동원해서 수색을 하는 걸 생각해봐요. 결과가 어떻게 될 지도. 아무리 언론을 입막음한다 해도 국회의원들은 알게 되겠지. 그놈들이 얼마나 입이 싼지는 알고 있잖소.”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데이터와 모든 자료들이 남아 있잖소? 곧 만들어질 인큐베이터 안에서라면 배양도 성숙도 더 빨리 할 수 있다며?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시 한 번 해보면 됩니다. 재원은 내가 보장하겠소. 그 아기에 대해서도 조치하지. 관련 부서를 만들 것이오.”
마치 이런 상황도 예상해 놨다는 듯이 말하는 장군의 대책 앞에서, 이기석도 더 이상 자신의 말만 고집할 순 없었다. 이기석은 기운이 빠진 채로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런 이기석의 등을 보며 4성장군이 말했다.
“기다려봅시다. 기다리는 거야 우리 전문이잖소. 이제까지도 기다렸는데 그거 좀 더 못기다릴까.”
하지만 그런 말조차 이기석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이기석은 다음 실험에 대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이런 실험을 25살때부터 시작해서 35살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해왔다. 그동안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 자신에게 되뇌었고, 지금도 사람의 영역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모든 나쁜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우면서 이기석은, 웃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