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 - 여왕 (4)

NEOKIDS 작성일 09.06.17 22: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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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상준은 가옥철거 보상금을 타러 간 동사무소에서 다른 방 쪽으로 불려나갔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 곳에는 속알머리가 벗겨진 동사무소장이 있었다. 번들번들한 개기름이 속물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과는 달리 그는 밑의 직원을 시켜 상준에게 따뜻한 커피와 과자를 대접하게 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은 상준이 알아듣지도 못할 전문용어들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알아들은 내용을 대충 정리해 보면, 그 지역의 무슨 조사를 위해서 한 가구의 땅이 필요한데, 마침 조건이 맞는 것 같아서 상준의 집이 선택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땅 주인은 대기업의 소유가 되어있으며, 철거용역 깡패들은 그 땅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상준의 머리가 여기까지 정리했을 즈음, 봉투 하나가 상준의 눈앞에 놓여졌다.

 

“이거, 그 회사에서 여러모로 폐를 끼치는데 대한 보상금이라고, 먼저 선금조로 전달해 달라고 하시더구만. 받아. 현금으로 정확히 300만원이야. 이 돈은 월마다 지급될 거고. 또 서류 보니까 월마다 복지수당 한 80만원 받아야 될 것도 못 받고 있네. 이런 건 그 쪽에서 알아서 챙겨야지, 이 사람아. 나머지 돈은 계좌.......같은 게 있을 리가 없겠지. 그냥 여기 동사무소 복지과 와서 서류 쓰고 돈 받아가. 그러면 돼.”

 

상준의 눈이 기쁨과 얼떨떨함으로 크게 떠졌다. 도대체 무슨 조사를 하는데 이렇게 돈을 펑펑 준단 말인가. 거기다가 보통 복지과는 이런 식으로 동네의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복지수당을 받아가라니 뭐니.

대한민국이 아직 썩어빠지진 않았구나. 이렇게 좋은 나라였구나. 상준은 웃음을 띄우면서 몇 번이고 동사무소장을 향해 굽신거렸다.

 

그 동사무소장이 갑자기 아침에 들이닥쳐온 두 남자에게 어떻게 윽박지름을 당하고 어떻게 조인트를 까이고 어떤 으름장까지 들으면서 그 돈봉투를 전달한 건지,

상준은 눈치를 챌 수도 없었다.

 

봉투의 든 돈을 살펴보면서 가고 있는 상준에게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채나물, 존만아. 간만이네?”

 

채나물이란 건 떡환이 자신을 업신여겨 부르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상준의 입맛이 써졌다. 떡환은 자기들의 패거리 두 녀석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일행 중 하나는 정규였다. 정규도 표정이 난감하게 변하고 있었다. 쇼바를 바짝 올린 오토바이 두 대와 시티100 한 대가 골목길을 뒤흔드는 소릴 내며 다가와 상준 옆에 섰다.

“그래. 간만이다.”

“*놈이 형 오면 인사나 제대로 할 것이지. 존만한 새끼.”

 

떡환은 같잖은 놈이라는 식으로 상준을 꼬나보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상준이 많이 참았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 때마다 초등학교 시절처럼 해 줬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이 떡환이란 놈은 키도 상준보다 작았고 인물은 훨씬 개차반이었다. 별 것 없어 보이는 놈의 재주는 바로 주둥이놀림이었다. 싸움 전에 험악한 욕과 제스쳐를 써가면서 기를 확 죽여 놓는 것이 특기인 놈이었지만 상준 같은 자가 상대일 때는 밑바닥이 드러나게 마련인 녀석이었다. 그 주둥이놀림은 더 발달해서 근처 애들을 허풍으로 끌어 모아 다닐만한 정도까지 발전했다.

 

상준은 문득 정규가 경고했던 것을 떠올렸다. 입으로만 허풍을 떨던 놈이 몇 번 사고를 쳤으니, 자기가 진짜 왕이나 된 것처럼 으스대는 것이리라. 그런 짐작에 상준의 심기도 부글부글 끓었다.

존만한 새끼가.

 

“아까 보니까 돈 세면서 오는 거 같던데, 센타 까봐라?”

“돈은 무슨. 그런 거 없다.”

“까서 나오면 형이 많이 봐줘서 만원에 한 대씩이다? 아니면 니 여동생 데려오든가. 아, 고년 아주 박음직스럽게 컸더라?”

 

아영이에 대한 그 말 한 번이 상준의 화에 불을 지폈다.

 

“뭐라고 씨부렸냐? 이 *놈아?”

 

상준이 눈을 부라리며 대꾸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떡환이 맞받았다.

 

“하놔, 이런 개좆털만도 못한 씹새끼 봐라?”

 

오토바이에서 엉거주춤 내리는 녀석의 면상을 상준은 먼저 한 차례 갈겼다. 시원하게 뻗은 오른 주먹이 제대로 관자놀이쯤에 꽂혀 들어가면서 떡환과 오토바이가 같이 나뒹굴었다. 안그래도 쇼바가 높은지라 쓰러지기도 잘 쓰러졌다.

옆에 있던 따까리 한 놈이 잽싸게 덤볐지만 그 놈도 도움이 되진 못했다. 그 리듬을 타고 왼 주먹이 그 놈의 안면을 쳐 날렸기 때문이다.

 

상준의 운동신경 자체도 남달랐지만 거기에 복싱까지 배운 전력이 이럴 땐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정규는 순간 얼어붙어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정규에게 상준은 급한 와중에서도 윙크를 한 번 날려주었다. 정규가 피식 웃는 것을 본 것, 그리고 그 얼굴이 떡환 쪽을 돌아보다가 한 순간에 얼어붙은 것을 본 것은 찰나였다.

씩씩대며 일어선 떡환의 손에 쥐어진 건 노점상 같은 곳에서 파는 검은 군용 나이프였다.

 

“이 *놈, 오늘 뒤졌어.”

 

그래봐야 폼은 칼도 제대로 못쓰는 게 역력했다. 상준은 전에 정말 칼을 제대로 쓰는 선배에게서 칼 쓰는 법을 재미삼아 배웠다. 선배는 칼을 잡는 폼부터가 달랐고, 그건 특전사에 있는 삼촌에게 배웠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떡환이 칼을 든 꼬라지는 유치원생이 든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칼 하나 쥐는 것까지 저렇게 못났을까. 상준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곤 다시 풋워크를 밟았다. 칼을 든 사람이 두렵진 않았지만, 모지리가 들었어도 칼은 칼이다. 긴장하고 단 몇 차례의 순간에 바닥에 뻗게 해야 했다.

 

“* 지랄한다.”

 

상준이 풋워크를 하는 모습을 본 떡환이 비웃으면서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얼어붙었겠지만 이미 긴장을 한 상준에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잽싸게 피한 상준의 잽이 애저녁에 목표물을 놓친 떡환의 뒤통수를 갈겼다. 비틀거리며 돌아서려는 녀석의 충격이 사라지기 전에 상준의 몸이 잽싸게 치고 들어갔다. 갈빗대에 한 방, 명치에 한 방, 그리고 마지막을 안면 스트레이트 두 대. 들어가는 것도 제대로 꽂혀 들어갔다. 떡환의 손에서 칼은 이미 떨어져 저편으로 나뒹군지 오래였다.

침을 질질 흘린 채 떡환이 엎어지는 꼴을 보고 정규는 도망가듯 몸을 틀면서 상준에게 윙크를 해줬다. 그리고 옆에서 정신을 덜 차리고 있는 놈에게 과장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 튀어!”

 

정규가 나머지 한 놈을 데리고 사라지자 상준은 나이프를 주워들어 양손으로 현란하게 쥐어보였다. 바닥에서 신음과 함께 뒹굴면서도 그런 모습을 본 떡환의 얼굴이 노래졌다. 상준의 얼굴에 진짜 살기가 등등했기 때문이다. 피하려고 버둥거려봐도 이미 명치를 맞아 숨이 제멋대로인 몸뚱이는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경고하는데, 지금 이후로 내 동생 가지고 더러운 입으로 씨부리거나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너 이 씹쌔끼 이 칼 가지고 모가지를 따버린다.”

 

멱살을 잡아올려 얼굴을 바싹 끌어놓고 상준은 말했다. 나이프가 떡환의 목으로 금방이라도 쑤셔들어갈 듯 날을 세우고 있었다. 떡환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준은 떡환의 멱살을 내팽개치고는 나이프를 두어번 돌려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속주머니에 넣어둔 돈봉투가 무사한지 한 손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독수리 1호, 독수리 1호, 여기는 독수리 둥지. 12시 현재 상황 보고하라.”

“여기는 독수리 1호, 보고한다. 생쥐들에게 별다른 상황은 없었다. 다만, 생쥐 1이 금가루 받아간 뒤 동네벌레들과 트러블이 있었다.”

“............”

“독수리 둥지, 응답하라.”

“독수리 1호. 내가 어제 뭐라고 했나?”

“독수리 1호, 생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라고.......”

“세금으로 월급 받아쳐먹으면 일을 해 이 *들아!”

 

잠시 무전기를 쥐고 있던 독수리 1호 중 하나의 손이 떨렸다.

 

“저......하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나설 수 없었다. 만약 그런 관계를 알았다면 우리가 먼저 손썼을 것이다.”

“사후처리는?”

“아직 하지 않았다. 오늘 일몰 이후 시작하겠다.”

“다시 실망시키지 마라. 독수리 1호. 앞날 보장받고 싶다면.”

 

무시무시한 박력과 함께 무전이 끊어지자 독수리 1호의 두 명은 한 숨을 내쉬었다. 서로 간에 적막이 흘렀다. 국방부 내부의 비밀 정보부. 거기로 들어왔으면 국정원이든 어느 관직이든 고위간부로 올라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단지 이력서에 국방부 1부서 소속이라는 한 줄만 써넣으면 아는 사람들은 알아서 긴다. 그런데 지금 무전기 건너편의 상관은 그런 앞날이 불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이제까지 해온 개고생들, 그리고 그 개고생의 댓가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녀석들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이가 갈렸다.

사후처리. 그것만큼은 실망시키지 않고 진행되어야 했다. 해가 진 뒤 내일 새벽쯤. 그 오토바이 깡패 새끼들은 독수리 1호 두 사람에 의해 시체가 되어서 동네 앞 개천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미 그들의 신원도 파악해 두고 있으니 일은 쉬울 것이었다.

 

“* 쪽팔리네......”

 

떡환은 중얼거렸다. 터진 입술이 따가웠다. 그 따가움을 느낄 때마다 더 부아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밑의 따까리밖에 안 되는 애들 앞에서 처참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칼까지 꺼냈는데도 불구하고 두들겨 맞았다. 그런 쪽팔림은 칼이 목에 와닿던 공포 따위는 쉽게 잊게 해줄 수 있었다. 이 증오를 되갚아줄 수 있을까 , 그것 외에 지금 떡환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없었다.

 

“아, 좀 잊어. 떡환아. 그 새끼 싸움 존나 잘하는 거 몰랐어? 선배들이 프로로 부르려고 했대잖아. 칼 다루는 법도 배웠고.”

“날 놔두고 토낀 새끼는 아갈 좀 닥쳐주시고. 응?”

 

핏발이 선 흰자위만 보이는 것 같은 눈으로 떡환은 옆에서 말리는 정규를 째려보았다. 정규는 그런 떡환을 보고 움찔했다.

 

“너 이 새끼 아갈 존나 비벼대는데, 내가 들은 이야기가 없는 줄 알아? 나 피해서 잠수 탄다 그랬다며?”

“아이 *, 내가 언제?”

“석중이 데려올까?”

 

역시나. 정규는 그런 말을 석중이랑 상준이 외에는 하지 않았다. 정규는 속으로 내가 미쳤지를 연발했다. 석중이가 은근히 입이 싼 놈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대면서 뭘 더 따지려던 떡환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지는 걸 보고 정규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건 그 자식이 아주 나쁜 생각을 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사람을 보면 그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밟아죽일 곤충을 보는 듯한 오싹한 느낌까지 들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정규 너, 그 *랑 친하지?”

“그거야, 뭐........”

“오늘 저녁 8시쯤, 그 새끼 니가 불러내.”

“뭐?”

“그 새끼 불러내라고. 내가 다시 한 번 붙자 그런다고 전해. 중앙 놀이터 있지? 거기로 불러내라.”

 

정규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중앙놀이터면 밤에 으슥해지는 건 둘째 치고 정규네 집에서나 떡환이네 집에서나 적어도 20여 분 정도 가야 되는 거리다. 왜 그렇게 떨어진 곳에서 보자고 하는 걸까?

 

“알았어 몰랐어 *야?”

“아, 알았어.”

 

잡아먹을 듯한 떡환의 재촉에 정규는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규의 머릿속에서 하던 계산도 그걸로 끝이었다. 뭐 별 일이야 있겠나. 상준이 정도면 어디서 어떻게 싸우든 전혀 진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또 박살나고 깨지면 그 때 정신 좀 차리겠지.

 

정규는 그렇게, 정말 단순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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