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 - 0015 깊은 곳 (3)

NEOKIDS 작성일 10.01.30 0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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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아집 같은 것이 묻어나오는 말투도 어색했지만, 주어가 잘못된 것 같았다. 자신이 민충식에게 잡히고 싶지 않다니?

 

"말이 좀 잘못된 거 아닌가?"

"아니오, 잘못된 것 없습니다."

 

김양석 군의 대답이 단단하게 돌아왔다.

 

"허허. 그럼 자네가 지금 그 피해자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네."

 

이게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싶었다. 그는 평소에 농담 한 마디 안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진지함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벽을 만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 또래쯤엔 나도 그러했다. 그런 사람은 농담도 서툰 법이다. 그렇게 좋게 받아들이려 애쓰면서 나는 말했다.

 

"예라이,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말게."

"이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김양석 군의 낯빛은 훨씬 더 여유롭게 변했다. 그 다음의 말들이 더 놀라웠다.

 

"아마 민충식은 병원을 조사하겠죠. 그 와중에 피해자가 어떻게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알게 될 겁니다. 그 피해자는 독극물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독을 먹었는데 스스로 119에 전화를 해서 겨우 살아난 거죠."

"지금 뭐라는 건가, 자네."

"그렇게 살아난 사람이 오히려 죽고 싶어 했습니다."

 

김양석 군의 이야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자신에게 독극물을 먹인 인간이 누군지를 알게 된 거죠. 자기 마누라였습니다. 말도 못하고 누워있던 때, 자신에게 독극물을 먹였다고 마누라가 말했다더군요. 전형적인 불륜, 그리고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 남자는 모든 것을 가져왔고, 행복하다고 느꼈죠. 하지만 그 행복은 허상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거죠. 그렇게도 가지려고 발버둥 쳐왔던 것들이, 실은 전부 엉터리였던 겁니다."

 

점점 기분이 나빠져 왔다. 거기에 아침뉴스의 CCTV를 보면서 떠올렸던 기시감이 다시 몰려왔다.

 

"하지만 간은 멀쩡했네. 포르말린 외에 독극물 반응 따위는 없었다고."

"그야 치료의 마지막 단계였으니까요. 그는 제게 얘기했습니다. 죽고 싶다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지만 제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그를 죽인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해가 일치했다고 할까요. 제 목적과 그의 소원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게 유산을 남겨주겠다고 했습니다만, 전 차라리 기부를 하라고 했죠. 기부하는 곳도 같이 정했습니다. 경기도 일산 쪽의 선재 장애인학교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네?"

"그래도 선배님이 안 믿으실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겠습니다. 지금 우린 피해자의 이름을 모릅니다. 뉴스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형사들이 조사한 이후에야 우린 이름을 알게 되겠죠. 그렇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말이 맞다는 건 변함은 없었다.

 

"그의 이름은 신철성입니다. 여기까지. 민충식에게 확인하고 나시면, 다시 대화하죠."

 

굳어버린 나를 뒤에 두고 김양석 군은 천천히 국과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걸음걸이.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묘한 팔자 형태를 띤 걸음걸이. 그것은 김양석의 것이었다. 혼자 남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원래 사무실 안에서는 일 외에 다른 사담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아예 말 자체를 꺼낼 수가 없었다. 김양석 군은 그저 자신의 일을 계속 하고 있었고, 나는 김양석 군이 꺼낸 말들 때문에 해괴함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공기는 전보다 더 무거웠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인간은 민충식 뿐인 듯 싶었으나, 지금은 선뜻 그에게 전화를 걸 맘은 들지 않았다. 김양석 군의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왜 김양석 군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김양석 군이 범인이라고 치자. 그럼 왜 내게 그 사실을 말했는가? 그냥 조용히 있어도 될 일이었다. 재산이 많다고도 했다. 차명계좌 등을 써서 자신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 요즘 힘든 일이던가. 여러모로 앞뒤가 혼란스러웠다.

 

아침에 빵부스러기를 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이 상념들을 털어버려야 한다. 어찌됐든 김양석 군은 질나쁜 농담을 한 거다. 김양석 군이 이 이야기를 꺼내도, 나는 자연스럽게 언제 그런 말을 한 적이나 있었나 하는 따위의 느낌으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이 상념들을 털어버릴 수 있는 건 교통사고의 원인을 밝히거나 내 앞에 서류로 쌓여 있는 수많은 일들뿐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김양석 군과의 대화 때문이었을까. 그날따라 살풍경한 집의 모습이 더 낯설게 다가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더욱 그랬다. 탁자 위의 수북한 서류와 책들이, 형광등 불빛에 비쳐 허옇게 소파 모서리에 쌓여있는 먼지들이, 볼품없는 세간들이, 이틀 설거지를 하지 않고 내버려뒀던 싱크대의 그릇들이.

 

무엇보다도,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이 공간 자체가.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걸레로 먼지를 닦는 것처럼 이 예민함도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설거지가 끝나고, 널부러진 서류와 서적들을 제자리를 골라 찾기 시작하면서 내 예민함은 몸집을 더 부풀려 뒷목을 뻐근하게 눌러왔다.


서류와 서적들을 도로 내팽개쳤다. 이 예민함을 해결할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민충식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문득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준 명함이 하나 있을 것이었다. 서재로 들어가 명함집을 찾았지만 명함집은 어디에 쳐박혀 있는지 눈에 띄질 않았다. 혼잣말로 욕을 해대며 온 사방을 헤집고 나서야 겨우 명함집을 찾았다. 민충식의 명함은 세 번째 장에 꽂혀 있었다.


번호를 누르기 전,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다른 생각도 덮쳐왔다. 김양석 군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왜 김양석 군이 나에게 그런 사실을 전달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그것은 불가해함이었다. 하지만 이 불가해함에 대한 두려움이 이해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더 이상 억누르지는 못했다. 이 통화버튼을 누르는 순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서 그건 내가 제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랜 신호음 후에야 민충식은 전화를 받았다.

 

"아니, 난 또 누구신가 했네. 정 과장님. 왠일이세요. 이 시간에."

"좀 궁금한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병원 쪽 수사 했습니까?"

"네, 뭐.....대강은."

"내용이 어떻습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이건 생각해뒀던 대답이 있었다.

 

"부검 보고서엔 올리지 않았는데 몇 가지 약들에 대한 반응도 검출되어서요. 혹시 병원에서 먹은 약들이 관련이 있다면 이 사람, 독극물 치료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이야, 명탐정 같으시네요. 말씀대로에요."

  

순간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민충식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점점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독극물을 먹고 병원에 들어왔어요. 119도 자신이 불렀다고 하더군요. 보호자로 되어 있는 이 아내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증거는 없구요. 간호사 말로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 상태여서 정신과 상담도 받아봐야 될 환자 같았다고 말하더군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환자 신상명세는 알아냈나요?"

"그건 또 왜요?"

"아, 시체에 그냥 무명이라고 해놓기는 좀 그래서, 이름이라도 써놔줄까 하고."

"예, 그러셨군요. 잠깐만요. 흠.....아마도 이름이......"

 

민충식이 종이를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전달되었다.


"신, 철, 성. 예, 피해자 이름이에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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