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실낱같은 기대는 완벽하게 깨어졌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한 젊은 여자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수법은 같았다. 장기들이 전시회라도 하듯 놓여져 있는 풍경과,
깔끔한 뒷처리까지. 그리고, 태연하게 내 옆에서 그 시체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김양석군이 있었다.
거대한 코메디를 한 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담당형사들이 나가는 틈을 봐서, 나는 말을 꺼냈다.
"그래, 이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건가?"
"창녀였습니다. 이 여자도 죽고 싶어 했죠. 그 뿐입니다."
김양석군의 손에 들린 카메라가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자신이 죽인 시체를 찍고 있다니, 이 무슨 해괴하고 망칙한 상황
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건지.
"내가 지금이라도 밖의 저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이 일을 그만둘텐가?"
"그러기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건 선배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는 것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선배, 지금 화를 내고 계십니까?"
"그럼 화가 안나게 생겼나?"
"의외로군요. 전 선배가 그런 감정선이랑은 무관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도 사람이야."
"아니요. 이제까지 제가 봐온 선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선배에게 이 일들에 관해서 털어놓은 거구요."
여전히 카메라의 플래시는 번쩍거리고 있었다. 기묘하고 살풍경한 지하실에 잔광이 남는 섬뜩함.
그 속에서 김양석군은 말을 이었다.
"제가 봐온 선배는 인간적인 부분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사람입니다. 안사람 되시는 분과의 트러블, 국과수의 일처리들,
모든 상황들. 전 지금 오히려 선배가 화를 낸다는 게 되려 놀라운데요."
"마치 오래전부터 날 관찰해왔다는 투로군 그래."
"정확히 말하면 국과수에 들어온 날부터죠. 선배는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말이죠."
김양석 군은 카메라를 내리면서 나를 응시했다. 그 눈의 깊은 곳에서 그 말은 진심이라는 것을 김양석군은 뿜어냈다. 문득 등
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선배. 이번엔 응답시간은 충분한 질문이니 괜찮으실 겁니다."
"맘대로 해봐."
"선배, 선배에게 삶의 의미로 남아있는 건 무엇이 있습니까?"
"이젠 선문답을 하자는 겐가?"
"아니, 보통은 간단한 단어 같은 것들로 대답을 할 수 있잖아요. 가족? 자식? 재산? 뭐 그런 것들."
쉽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또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그렇게 간단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뭐가
남아있더라? 김양석 군이 나를 지켜봐 왔다는 말과 겹쳐져 핀포인트를 찌르는 질문들을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되었다.
지금, 김양석군은 단순한 장난 같은 감정으로 나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듣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구조나 심도가 강한 상황이
었다. 이젠, 어안이벙벙함에서 무작정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
"대답 시간은?"
"이틀 뒤로 하죠. 단, 진심이어야 합니다. 전 선배가 진심을 말하지 않을 떄의 표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 점
도 유의해 주시면 좋겠군요."
김양석 군은 장비를 챙겨서 현장을 나가면서 내 등 뒤에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이틀 뒤입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