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여러모로 난감하지만
눈을 떴을 때는 이모님의 집보다 훨씬 더 고전적인 한옥이었어. 침대에 누워있는 몸. 햇빛이 따갑게 들어오고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났지. 온몸의 감각이 포근함을 머금고 있었어.
잠시 다시 눈을 감았지. 갑자기 그 날의 전투들이 떠올랐거든. 어떤 것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어. 정욱씨의 마지막과, 어두운 통로와 고통들까지.
여기가 천국이라면, 이 잠을 깨지 않게 해주길. 내 결심이 이만큼의 고통과 혼란을 불러온 거라면, 다시는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주길. 오직, 수영이와 그 때로 다시 돌아가, 처음부터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길.
정욱씨의 죽음을 생각하며 이런 도피성 자의식에 쩔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수영이의 엄지손가락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어.
“일어났어?”
“.......”
“나, 많이 놀랐어. 지후씨가 피를 엄청 흘리니까.”
뭐야, 도로 지후씨 인거냐.
“오빠라고 불러주는 게 백배천배는 나았는데.”
“핏. 그런 일 이제 없을 거야.”
“또 내가 그렇게 쓰러져 주면, 오빠라고 불러줄까.”
“흉한 소리 좀 하지 마.”
수영이의 눈빛이 진짜 삐진 듯 했어.
“그렇게도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라면 그냥 드라켄 야거한테 넘겨줄게.”
“어이구, 무서워라.”
잠시 어색한 미소를 흘리다가, 나는 팔로 눈을 가렸어.
“사실은, 일어나고 싶지 않았어. 이런 포근함 속에서 영원히 자고 싶었어. 너무 힘들어서.....”
“그 마음, 나도 알 거 같아.”
“그냥, 이대로 있으면 좋겠..........”
그러고 보니, 수영이가 어디 있는 거야? 응?
벌떡 일어나서 상황을 다시 점검해봤어. 수영이는 옆에 누워 있더라고. 그것도 알.몸으로.
알.몸!!!!!!
수영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황급히 이불을 확 끌어당겼고, 나는 놀라서 몸을 수영이 반대편으로 돌렸다가 아직 낫지 않은 온몸의 신경과 근육들이 아 좀 썅 쉬어라 응? 요렇게 아프면 정신 차릴껴? 하면서 지지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길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와방 굴렀어.
구르고 보니 나도 *이더라고. 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죽다 살아났더니 이미 나의 알흠다운 동정마법은 내가 정신을 잃은 새 같이 소멸되었더라, 그런 이야기인거야? 그것도 수영이가 덮쳐서? 하앍! 억울하기 그지없군!
그러나 수영이가 부끄러워하며 바로 내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어.
“이.....이렇게 하면 지후씨가 빨리 낫는다고 그랬단 말이야! 엄마랑 아빠가! 그러니까 다른 오해 같은 건...”
무슨 방법을 가르침 받았기에 이런 당황스런 시추에이션입니까요. 완전히 얼굴이 새빨개져서 이불로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 수영이. 그 시선이 완전히 바닥에 뻗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나의 몸을 찬찬히 쓸어 담듯 바라보다가 어딘가에 시선이 머무르자 고개를 확 돌렸어.
아까 전과는 다른 의미로, 울고 싶었어. 어차피 보여주게 될 거라고 다짐은 굳게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은 싫단 말임......뭔가 당하고 있는 느낌이잖아.....
수영이는 이불을 감싼 채로 나가버렸고, 난 그 * 상태에서 천천히 몸을 추슬러서 겨우 움직여 준비되어 있던 옷을 입었어. 밖으로 나서고 보니, 집이 산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산세가 엄청나게 치솟다가 내려가다가 하는 웅장한 풍경들도 보이고, 안개가 살포시 끼어있는 것도 보였어. 무려 집밖의 밑쪽에. 암벽들의 풍경도 절정이기 그지 없었고.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수영이 부모님이 오셨어.
“자네, 몸은 괜찮은가?”
“예. 그럭저럭......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겁니까?”
부모님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셨어. 부모님도 여기의 상황을 느끼긴 했지만, 공진이 늦게 감지되어서 이미 왔을 때는 집은 다 날아가고 경찰이나 군부대들이 출동해있고 난리가 났었다는군. 그러다 산중턱 쪽에서 용들끼리만 보낼 수 있는 신호가 와서 보니 이모님과 수영이, 그리고 출혈과다로 반 시체가 된 내가 비밀통로의 출구에 있었고.
급히 이쪽으로 옮겨 치료를 시작했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의약품들은 다 구하지는 못했던지라, 급한 대로 몇 가지 처방만 하고는, 나머지는 수영이에게 맡겼다는 거야.
“우리 수영이가 그렇게 해서 지후군이 차도가 있었다는 건, 이제 조금씩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고 보니, 둘이 한 침대에 있었던 지도 사흘이 지나가네요?”
헑. 사흘동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까. 뭔가 있었다고 해도 서럽고 없었다고 해도 실망스런, 이 난감한 감정은 뭐지.
어쨌든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대답이.....기가 막혔어......
“여기? 여긴 금강산 중앙이에요. 나랑 언니의 고향이죠.”
헐.
나 지금 월북한 거임?
여기 지금 북한 땅인 거임? 덜덜덜덜덜......
“여기까지 보통 인간들은 아무도 오지 못해요. 그러니까 이젠 안심하고 쉬어도 돼요.”
당장 안심이 안되는뎁셔......국정원에서 저 잡아가면 우찌함. 하지만 어머님은 바로 그딴 찌질한 걱정 따윈 한 방에 잊게 해주실 대사를 치셨지.
“우리 수영이 피부 부드럽죠? 엄마인 나도 부럽다니까.”
크흠! 커험! 커흠! 어머님의 대담한 대사에 난 헛기침을 해댔고, 아버님은 그런 나를 보면서 한술 더 뜨셨어.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지후군을 너무 밖에 오래 세워뒀소. 자아, 들어가서 몸이 제대로 나을 때까지 좀 더 쉬게. 수영이도 다시 보낼 테니......”
“아닙니다! 수영이는 안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팔팔한데요 뭐.”
팔팔하기는 개뿔 그냥 셔럽하고 죽어봐라 이러면서 몸 구석구석이 또 고통의 신호를 무한정 공급해주시는데, 그걸 참으면서 막 웃는 표정으로 휙휙 움직였지만 아버님은 단호하셨어.
“됐고, 의약품이나 식량도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수영이 밖에는 방법이 없네. 수영이의 몸에 있는 기를 피부로 전달해서 자네의 회복력을 향상시키는 방법뿐이야. 그러니 어서 말 듣게!”
허어어어어엉. 아무리 치료방법이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 갑작스런 진도 아닌가요. 따님이 걱정되지도 않으셈?
결국 할 수 없이 *으로 다시 누운 나. 잠시 누워서 있다 보니, 다시 수영이가 들어온다는 현실에 오만가지 카마수트라가 활화산을 배경으로 시연되는 상상이 덮쳐왔지만, 참으려고 무진장 많이 애썼어. 아무리, 부모님이 용인해주신 관계라지만 그럼 안 되잖아? 서로 많이 좋아해야 하는 거고, 지켜야 할 법도도 있는 법인데.
(그딴 고리타분한 거 필요 없다고 하겠지 너는.....쳇.)
수영이가 탕약을 달인 걸 가지고 들어왔어. 얼추 보아도 하얀 옷자락 하나만 걸친 채였지. 얼마 없는 의약품이란 것이 탕약 정도인 모양인지, 들어오는 것도 꽤나 조심스러운 발걸음. 수영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참 어째야 할 지 몰라서 눈 신경에 지진이 나 흔들리는 느낌으로 수영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약.....마셔......”
넵. 넵. 그럽지요. 단박에 벌컥벌컥 검은 탕약을 다 넘겨버렸지. 쓴맛도 모르겠더군.
“고개.....돌려......”
수영이가 탕약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 등을 돌린 채 조그맣게 떨면서 하는 말에 난 잽싸게 고개를 돌렸어. 아. 이건 참. 무슨 거시기 업소 분위기도 아니고. 엇? 이런 불결한 생각을! 이러면서 혼자 도리질치는 생쑈를 하는 와중.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영이의 몸에서 옷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내 목젖은 마른침을 넘기느라 고생했었어. 수영이가 이불을 들쳐서 내 침대로 들어올 때는 완전히 최고조로 치솟아서 내려올 생각을 안했고.
(나의 존슨은 목젖에 비하면 진짜 얌전했다.......응? 그럼 안 되었던 거야?)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등 뒤로부터 수영이의 손길이 다가왔어. 손이 잠시 닿았을 때 내 몸은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했어. 그걸 느끼고 수영이의 손길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결심한 듯이 다시 다가왔어.
등 뒤에서부터의 깊은 포옹. 그리고 아침의 침대에서 느꼈던 그 포근함이 몰려오기 시작했어.
(슴가의 느낌이 어땠느냐 이런 거 묻지 마라.....아름다운 추억을 음담패설로 격하시키긴 싫으니까......훗)
뺨을 내 등에 대고 수영이는 나직이 말했어.
“많이.....힘들었지?”
그 말은 모든 것을 용서해주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다시 되돌려놓는 말이었어. 힘들었던 것들은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마주볼 용기를 주면서 다시 걸음을 걷게 하는. 그런 신기한 마법 같은.
힘이 용솟음치듯 하더라. 용이 말해주니까 그런가?
(춥지? 나도 춥다.)
“아니. 이젠, 괜찮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어. 그녀 역시 힘들었을 것이기에.
앞서 했던 모든 야시꼬리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우리 둘과, 우리 둘의 감촉과, 고즈넉한 시간.
그리고 수영이의 기를 받아 빠르게 치유되어 가는 내 몸의 반응이었어.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