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요?
하고, 나는 물어봤어.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거든. 놀랄 노자였지. 처음부터 내 이름을 정확하게 말해왔으니까.
“혹시 자네, 이름이 이성소 아닌가?”
돌아보는 순간, 꾀죄죄한 츄리닝 차림과 기름진 장발, 그리고 인상적인 양반수염의 노인이 나를 보고 있었어.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려는 찰나였지. 그 노인 분은 꽤나 멀리서부터 날 쫒아온 모양인지 숨을 헐떡거리고 계시더군.
“맞는데, 누구세요?”
안그래도 힘이 없어 탈진하려는 찰나의 노인분 안색이 완전히 핏기가 싹 가셔서 더 창백해지더군.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더 물어보시는 거야.
“올해, 스물 다섯이지?”
“예. 그런데 누구세요?”
“젠장!!!!!!!”
노인은 편의점이 떠나가라 일갈한 후 옆의 냉장고 유리를 짚었어. 거의 쓰러지려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편의점 알바가 인상을 북 쓰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꼴에 나도 자동적으로 좌불안석의 형국이 되고 말았지.
“그렇게 도망쳤는데! 어째서!”
노인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들리는 말은 그것뿐이었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고 있는 꼴 같았고. 어쨌든, 상황은 수습을 해야 하니까, 말은 붙였지.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절 아시나요?”
“알지.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지. 내가 천기를 들여다 본 죄로 네 몫의 액운까지 내게 붙었는데. 어떻게 해도 떨굴 수가 없던 그 액운. 아아아!!! 제길.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가 잘못됐냐고 묻고 싶은 건 이쪽이고, 일단 소리도 좀 지르지 마시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야 알 것 아닙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던 도중 쏙 들어간 건, 문득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어. 야밤에 도주한 동네 점쟁이.
인상착의 확인에 들어갔어. 츄리닝에 기름진 장발과 양반 수염. 장발이 백발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장발은 장발이고, 나머지 인상착의도 어머니가 하신 말씀과 똑같았어.
“대체 왜지? 내가 뭘 알려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내 액운이 지워지는 거야? 뭐야? 제길,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이 녀석에게 말해줘?”
궁시렁궁시렁. 계속 그러고 있는 노인분에게, 정말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한 마디를 덧붙여 봤어.
“혹시.....증산동 쪽 살고 계시던 점쟁이이십니까?”
“그래! 날 알고 있군. 뭐야.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에게서 들었나? 아니면 또 나머지 액운까지 덤으로 안겨주려고? 허튼 수작 하지 말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는 거야!”
계속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있던 사람들도 주섬주섬 빨리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나서거나, 그 광경에 아예 편의점에 들어오려다 떠나는 경우도 많았지. 알바의 인상은 한층 더 험악해져 있었고. 나도 더 이상 말을 붙이고 싶진 않아서 피하려는 찰나였어. 그 때 그 노인이 내 어깨를 붙잡았지. 노인 치고는 꽤나 억센 힘이었어.
“할 얘기가 있다. 따라와.”
쭈볏거리며 노인의 뒤를 따라 온 곳은 산중턱의 공터였어. 아침에 운동하러 오는 사람들이나 올 곳 같았는데, 그나마도 추운 날씨 때문에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이었지. 오후의 기울어가는 햇빛도 이미 나무그림자에 막혀 있는 그런 곳이었어.
노인은 그 곳의 벤치에 털썩 앉더니, 이야기를 시작했어. 그래봐야 그것도 반은 횡설수설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고, 내가 못알아들을 내용이더군. 그래서 아주 살짝, 한 마디만 덧붙여봤어.
“그래서, 제게 해주실 이야기가 뭔데요?”
노인은 그 질문에 입을 다물고 무섭게 날 노려봤어. 내가 뭘 잘못 물었나 싶어서 나도 눈치를 보면서 계속 서 있었지.
“넌, 타고난 놈이다.”
그러니까, 뭐를요.
“너, 아버지가 누구냐?”
이름도 모르고, 전 기억도 없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저랑 어머니를 버리고 야반도주한 나쁜 사람인데요.
“필시 그래야 할 사정이 있어서였을 거다. 어쩌면 너와 네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대체 왜요.
“네 피는 아주 특이한 피다. 1만년에 딱 한 번 나오는 거지. 동양의 사주나 점성술도 네 피 때문에 발전한 거야. 네 피는 이세계(異世界)의 놈들을 광분하게 한다.”
내가 아무리 현실을 고분고분 잘 받아들이는 체질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어. 비디오나 판타지 소설에서나 쓸법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잖아.
“네 피냄새를 맡고 모든 것들이 몰려오게 될 거다. 모순되는 건 네 피는 어떤 걸 하든 매개체 역할을 하지만 너에겐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거야. 넌 앞으로 3가지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내가 3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건,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저, 혹시, 지금 이야기하시는 거,
서유기 아니에요?
“시끄럽다 이놈아. 난 지금 중요한 천기누설을 네게 이야기 해주고 있는 거야. 더 잃을 것도 없게 된 지금에야 차라리 천벌로 급살이라도 맞으면 내게는 축복이지만. 뭐 네 얘기도 틀린 건 아니다. 따지면 서유기의 삼장법사도 승천혈이었으니. 어쨌든 일단 이야기는 마저 들어!”
급하게 수습하는 꼴 보면서 더 들어볼 필요 없겠다, 하고 나도 예전의 어머니처럼 각오를 굳히고 발을 뺄 타이밍만 재고 있었어. 서유기의 짝퉁 이야기 들으려고 이 산중턱까지 올라온 것도 조금 억울해지려고 하고 있었고, 조금 있으면 완전히 해가 져서 엄청 추워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만나게 될 3가지 존재를 난 네 사주와 별들의 운행, 그리고 지정학상의 위치로 봐서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네가 끌어들이게 될 3가지 존재는 주변에 저주와 불행만을 가져다 줄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분명 네게는 도움이 될 거다. 다만 네가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달린 거고. 어쨌든 넌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내가 그 날 그 동네를 도망친 거야.”
아, 그러셨군요, 정도의 심드렁함으로 나는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첫번째는 구미호, 둘째는 처녀귀신, 그리고 셋째로 도깨비를 넌 만나게 될거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손을 뻗었어.
됐습니다. 더 안 들을래요. 이 정도가 나의 한계입니다. 사람 데리고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말은 진짜야, 이놈아! 난 네게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하고 있단 말이다! 똑바로 들어! 다음이 더 중요한 부분이야!”
노인의 역성에도 아랑곳없이, 난 올라왔던 길을 따라 도로 내려가려고 발걸음을 옮겼어. 하필 또 그 공터가 집에서 좀 거리가 떨어진 곳이라, 추운데 시간낭비하고 이게 뭐냐고 투덜대면서 길을 재촉하는 것밖에는 남은 게 없었지.
“넌 그 3가지 존재와 함꼐......”
뭔가 더 말을 하려던 노인은, 더 말을 할 수 없었어.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광채가 온 사방을 휩쌌기 때문이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정말로 있는 자연현상이라는 걸 그 때 처음 알았고. 눈앞에서 강한 전류의 흐름과 번쩍임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어. 한 10초 정도 굉음과 번쩍임이 유지되었던 걸까.
날벼락이 끝나고 나서 나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어. 몸의 여기저기를 만져보니 다친 곳도 없었고. 그리고 나서야 노인이 생각나서 그 쪽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이 전기구이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목격할 수 있었어. 그냥 말이란 게 떠오르지 않고, 맙소사,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살이 타는 냄새와, 입고 있던 츄리닝이 한순간 재가 되어버린 고깃덩어리가 된 채로,
노인은 날벼락을 맞고 내 쪽을 바라본 채 서서 죽은 시체가 되었으니까.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주변의 풍경이었어. 그렇게 무서운 벼락이 그 주변에서 널을 뛰었는데도 마치 어떤 의지라도 가진 것 마냥 노인만을 노리고 타격했고, 주변에는 나뭇가지 하나 그을리거나 부러진 게 없는 거야. 그걸 깨달은 나는 뒷걸음질을 쳤어. 그리고는 달려가다시피 그 공터에서 내려왔지.
내려와 보니 동네사람들 몇이 나와서 그 날벼락 현상을 가지고 이야길 하고 있었어. 내가 산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들이 날 붙잡고 뭔가를 물어보려고도 했고. 더 이상 할 말도 없어 나는 저도 내려오는 길에 벼락 봤는데, 무서워서 도망쳐 왔어요, 수준의 말들을 대강 늘어놓은 뒤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대고 있었고, 나는 그 화제의 중심에 있기 싫었어. 만약 노인을 죽인 걸 내가 뒤집어쓰기라도 한다면? 이런 두려움이 날 감싸는 순간이었어.
추위와 어둠이 사위를 가득 메운 골목을 헤쳐 집으로 향하면서, 이 어이없는 상황에 두렵고 께름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노인이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곰곰이 생각했어. 정말 노인은 천기를 누설해서 죽은 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진짜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 인생은 지금 그 점쟁이 노인의 말대로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일단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봤어. 그런다고 머릿속의 생각이 단번에 지워지진 않겠지만, 일단은 그런 짓이라도 해야 이 어지러운 감정이 정리가 될 거 같아서.
그렇게 정리가 채 되기도 전에,
어떤 여자가 전봇대를 붙잡고 있는 꼴이 보이더군.
오늘은 왜 이런 사람들만 얻어 걸리는 걸까. 그런 심정으로 지나치려고 하.......는 찰나, 또 귓가에 맴도는 죽기 일보직전에나 날 만한 숨소리나 여자의 몸이 들썩이는 광경. 이런 것들이 자꾸 발목을 잡아끄는지라. 한숨 한 번 쉬어주고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서 여자에게 다가갔어.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감싸고 있는 신체의 외곽선. 등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 잘록한 허리, 또 그 아래로 위치한 환상적 골반. 잠시 숨이 멎을 듯 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려놓고 봐야겠기에,
“괜찮으세요?”
하고 말을 걸어봤어.
“아윽.......”
아니라는 대답이겠지. 하아.
“일단 병원이라도 가죠.”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팔을 일으켜보려 하는데 그녀가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서 날 올려다보더라고. 아, 정말 맑은 눈이구나, 홀려버린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너무 예뻐서 내 것은 아닌 그런 종족이로구나.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조금 더 나이스한 상황이잖아. 이렇게 단번에 정리된 머리는 다시 혼돈 속으로 빠져버렸어.
갑자기 내 품으로 덥석 안겨버린 그녀 때문에.
“아니.....저......초면에 이러시면 곤란.......”
나는 채 말도 다 못이었어. 그 다음에 여자가 한 행동 때문이었지. 코를 들이대고 내 목의 살갖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기 시작하는 거야. 내 몸에서 나오는 체취의 미세한 액체성분이라도 빨아들이려는 듯, 아주 깊게, 아주 깊게, 그렇게 대여섯 번을 냄새를 맡더라고.
이것 참. 굳어진 몸과 머리 속에서 난처함과 황홀함이 크로스 어택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욕망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직전, 그녀는 내 품에 안겨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어.
“찾....았....다, 승천혈!”
에? 뭐라고? 질문을 하려는데 그것도 할 수 없었어.
갑자기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거든.
“우부부부붑”
제길.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소중한 첫 키스의 소리가 우부부부붑이라니. 이런 추억 따윈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은 아주 짧은 순간만 내 머릴 지배했어. 그 다음은?
살려면 이 여자를 밀쳐야 한다, 그 생각 밖에는 없었어. 뭐라고 자세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뭔가 몸속의 에너지가 완전히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어. 너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하고.
힘겹게 그 여자를 밀쳐내고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어. 여자는 상체를 숙여 끈만 걸치게 되어 있는 원피스 상체 사이로 가슴의 골짜기를 내보인 채 입가를 닦고 있었어. 긴 머리 사이로 늘어진 타액을 소중한 뭐라도 되는 양 주워 담아 입으로 가져간 후에,
“이제야 좀 살만 하군.”
하면서 여자는 미소를 지었어. 아, 또 잠시 얼굴에 분홍빛 빗금이 그어지는 것 같았어. 역시 이 여자는 예뻐.
“이리와. 더 먹어야겠다.”
가로등 빛에 시스루인지 뭔지 하는 재질의 원피스 속으로 비치는 팬티라인과 골반의 그림자까지 합세하면 듣기에 따라서는 리비도의 폭풍을 불러올 수도 있는 말이었겠지만, 내겐 잠시 외출 나갔던 정신이 확 들어버리게 하는 말이었지.
“다.....당신 누구야!......요.......”
“시끄럽고, 빨리 이리와!”
난 몸을 뒤집은 후 잠시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의 스타팅 포즈를 지었다가 땅을 박차면서 마구 달렸어. 뭐지? 뭐가 일어난 거야? 오늘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어머니, 굽어 살펴주세요!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둡고 끈적한 느낌들을 뒤에다 내팽개치기라도 하듯, 그렇게 정신없이 집까지 달려갔어.
떨리는 심장을 겨우 대문까지 닫고 나서, 이마에서부터 방울져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어. 그렇게 전력질주 한 건 군대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지. 낡은 파카 안쪽은 완전히 젖어버렸고.
여자가 따라오는 기척이 전혀 없다는 걸 숨죽이며 확인한 나는 천천히 그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내 바닥에 뿌리고는 현관 안으로 들어갔어. 산동네 위쪽의 주먹만한 조그만 집안. 방에서 나오면 바로 부엌이 있는 그런 허름한 내 집으로 섀시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키고 항상 보는 풍경들을 보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어. 이젠 그 여자도 쫒아오지 못할 거고, 빨리 이런 일도 잊어버려야 해.
옷을 갈아입고, 물이 끓으면 삐 소리가 나는 주전자를 렌지 위에 올려놓고, 나는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어. 전에 못봤던 영화를 보면서 빨리 잊으려고. 화면에서 액션을 펼치면서 쿵쾅거리는 만큼이나 내 심장도 아직 널을 뛰고 있었지만, 곧 영화에 몰입하면서 안정되는 느낌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영화를 얼마쯤 보고 있었을까. 커피 물은 아직 끓고 있지 않았고, 자리 바로 옆의, 커튼을 쳐놓은 창문이 뭔가 수상쩍은 느낌이 다가왔지만, 난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어. 이젠 아무 일도 벌어질 리가 없는데, 뭐가 두렵고 겁나냐. 이런 마음으로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커튼을 제쳤는데.
날 노려보는 그 여자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뒤통수가 굳어지면서 나는 끼아아아아악!!!!! 하고,
정신을 잃었어.
그리고, 어렴풋이, 커피의 물이 끓으면서 삐이이이이이이익!
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