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미호?
아침의 햇볕이 눈꺼풀을 자극하고 있었어. 이불 속에서 출근해야지, 하면서 밍기적거리고 있었지. 덜 깬 잠 속에선 뭔가 무서운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었고. 왠지 따스하고 포근한 게 일어나기가 싫고 너무 피곤해서, 손을 들어서 눈을 비비고는 팔을 내려놓는데, 뭔가
몽실몽실해?
부드러워? 어라?
눈을 떠서 옆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득달같이 뒤로 막 발버둥질을 쳤어. 어제 그 여자, 그 여자가 내 옆에 누워있었던 거야. 그것도 옷을 한 오라기도 안 걸친 채로. 내 손은 그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던 거고.
“이히이이이익!!!!!”
그리고 내 몸을 보고는 더욱 히이이이익!!!!
왜 나까지 빤쓰 차림 알,몸,인 거지?
설마 나 당한 거임?
이것저것 더듬고 살펴보며 그런 불미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신은 겨우 했지만,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나면서 공포스러움은 한층 더 심해졌는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어.
그녀의 머리에 나있는 동물의 귀, 엉덩이 뒤엔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 큼지막한 털뭉텅이들. 그건 누가 봐도 완벽하게, 아홉 개의 꼬리라는 풍경.
‘첫번째는 구미호, 둘째는 처녀귀신, 그리고 셋째로 도깨비를 넌 만나게 될거다아아아아아......’
벼락을 맞아죽은 노인 점쟁이의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젠장. 그 말이 진짜였을 줄은 며느리도 몰랐겠다.
만족스런 얼굴로 잠을 자고 있던 여자, 아니, 구미호는 내가 설레발을 친 덕에 추운지 인상을 북 쓰면서 몸을 웅크렸어. 화닥닥, ‘그게’ 잠을 깰까봐 나는 이불을 살며시 덮어줬지.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그리 넓지도 않은 방과 부엌 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불안 증세에 시달려야 했어.
아무리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 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뿐이었어. 만화나 영화를 아무리 많이 봤다 해도, 이런 일을 그리 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내가 판타스틱한 동네에 정신을 두고 살던 인간은 아니잖아. 거기다 한 이불에서 알,몸,으로 동침까지. 이게 대체 뭔 일이야!
패닉 상태에 잠시 잠겨있던 나는 내가 이불 속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조금씩 진정이 되었어. 부엌에 나가보니 렌지 위의 주전자는 그대로 있고 불도 밸브까지 잠궈서 제대로 꺼져 있더군. 그리고 나름 이불도 곱게 펴져서 같이 자고 있었고. 설마, 이걸 다 이 ‘존재’가 해놓은 건가? 지가 무슨 우렁각시도 아니고. 종이 틀리다고. 엄연히.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가?
그 순간이었지.
기상시간을 맞춰놨던 핸드폰의 알람 소리가 방안에 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했어. 군대있을 때 기상나팔 소리가 있길래 좋아서 받아놓았던 건데, 그게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 심장 속에 폭발물이 점화라도 된 것처럼 가슴이 들썩였어. 왜 파카 속에 넣어놨던 건데도 그리 우렁차게 울리는지.
“우웅.....”
하면서 그 ‘존재’가 결국은 눈을 떠버리고 마는 순간, 난 또다시 기절 일보직전까지 발을 디뎠어.
“아이씨, 이거 뭐야.”
벌떡 일어나서 파카 속에 있는 내 핸드폰을 뒤져서 꺼내보더니 소리가 나는 그 놈을 벽에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내던져 박살을 내버린 거야. 아아아악! 산산이 부서지는 내 핸드폰이여!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다가도 문득 아 저건 공짜폰이라고 했었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니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고 뒤통수를 두들기기도 해보고, 어쨌든 이 공포의 민폐덩어리가 결과적으로 핸드폰을 박살내든 뭔 짓을 하던 간에, 일단 목숨은 부지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자문을 해보는 중.
그 동물은 다시 자리에 누웠고.
혼란 속에 내린 결론은 일단 출근은 하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였어.
까치발로 조심조심, 살며시 옷들을 챙겨서 부엌 쪽에서 허겁지겁 입기 시작했어. 혹시나 또 그게 깰까봐 되도록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하고. 그러다 씻어놓은 설거지들을 팔꿈치로 건드린 거야. 화급하게 손으로 잡긴 했지만 꽤 큰 덜그럭 소리가 났어. 하지만 그 존재는 움직이지 않았지.
폐 속에 한껏 들어와 있던 공기를 살며시 내보내면서 나는 다시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어. 바지 쟈크를 채우고 웃옷을 입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파카를 입고 쟈크를 살살살살 채운 다음 천천히 주저앉아 양말도 신고 모든 채비가 끝났어. 지갑도 파카 안에 있고, 모든 것이 준비 완벽. 자, 이제 나가기 시작하면 되는 거야. 안도감을 가지고 한 발자국 내미는 순간.
이 허름한 집의 샤시 현관문이 뇌리를 스쳤어.
틀이 잘 안 맞아서 열 때마다 마치 괴물의 비명소리처럼 와짝 삐이이익 끼거거걱 소리가 나는 그 샤시 문을.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던 그 상황이 이렇게까지 걸림돌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 젠장맞을. 그래도 별 수는 없고. 창문으로 나가긴 글렀고.
샤시 문의 허접한 잠금장치는 아예 박살이 나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었어. 아마도 비틀어서 부숴버린 게 맞겠다 싶은 광경이었지. 하지만 그게 아까웠다면 핸드폰 박살났을 때는 완전히 실성을 했겠지. 그게 무슨 대수라고. 어쨌든, 살아야 했으니까. 천천히, 두 발짝 내딛고, 신발을 신고, 이제 문을 열려고 하고 손을 댔어.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살며시 밀기 시작하는데.
와짝 삐이이이익 끼거거거걱 그카카카칵 와각와각 삐오오오오 카각카각 우지지직 빠득빠득 끼오오오오오옥.
이놈의 문은 천천히 여니까 괴물의 비명소리 정도가 아니라 괴물이 고문을 당하다 못해 온사방에 들이박는 소릴 내더구먼. 악물어진 이빨 틈으로 휘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문틈으로 조금씩 보이는 한걸음 반의 앞마당을 바라봤어. 조금만 더, 저기까지만 가면! 저기까지만 나가면 그 다음은 안전하니까!
어깨에 턱 올려지는 손,
그리고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이는 음성.
“어딜 가?”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생각해봐도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엎어지다시피 한 후 엉금엉금 기어가는 나를 그 존재는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일으켜 세웠어. 나는 온 몸의 근육과 신경이 바짝 얼어버린 채 차렷 자세로 서버렸지. 그 와중에도 또 그런 고함소리가 나올까봐 급히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고.
“이것 참.....어제부터 고함소리 하난 우렁차네.”
머리 위에서 까딱거리는 귀, 여전히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 눈부시게 하얀 나신. 내 현실감으로는 적응 안 되는 꼴로 그녀.....아니 그 존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또다시 그 홀렸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나를 감쌌지만,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상황도 아니고.
“어쨌든, 어젯밤은 간만에 포식했어. 승천혈.”
아아아. 결국 당해버리고 만 것인가. 기분은 좋았었던 걸까. 그런걸 왜 느끼지 못하고 나는 기절한 채로 있었던 걸까. 라는 생각 잠시 해보다가 그것도 아닌 듯 싶고. 정신이 공허하게 되어버려서 서있는 좀비 같은 나를 향해서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어. 아, 웃는 건 참 예쁘다. 에헤헤헤헤. 나 드디어 미,친거임?
이러고 있는데 그 존재가 먼저 말을 했어.
“인사나 하자. 난 구미호고, 이름은 그냥 미호라고 해.”
그럼 성이 구씨인가요....는 둘째 치고,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있거든요. 누구나 그 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잔하효.....
“너 찾느라고 헤매다가 원기가 다 떨어져서 정말 죽나보다, 싶었는데 역시 하늘은 무심치 않으셔. 킥킥킥~”
저기요. 하느님은 님아 만들려고 노력하시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부로 넌 무지 소중한 내 꺼가 됐으니까, 아무데도 가지마.”
저기요. 인간은 직장에 나가야 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돈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 되는 존재거든요......흐흑.....날 내보내줘요.....네? 라고 말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지만, 뻐끔거리는 입 속의 성대는 전혀 울릴 생각을 하지 않더라.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머릴 긁으면서 말을 꺼냈어.
“뭐, 대저택에 살 거라고는 기대 안했지만, 그래도 좀 심한데? 이 정도면 인간들 중에서도 거의 빈민 축에 드는 거 아냐? 밥은 먹고 살아? 그래도 어릴 적에 내가 살던 동굴 같아서 좋다. 히히히~”
남의 가슴팍에 칼 꽂는 소릴 태연하게 하면서도 그녀는 연신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이었어.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남극의 얼음장 같았던 온 몸의 신경과 근육도 조금씩 풀리고, 성대도 조금 움직여볼 채비를 하는 것 같더라.
“저기요.....”
“응? 왜? 뭐든지 얘기해 봐!”
“저 출근해야 하는데요.....”
“오? 출근? 그게 뭐야? 먹는 거야?”
아놔 제기럴. 가스불 끌줄은 알면서 출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거야 뭐야. 뭐 이렇게 감 안 잡히는 구미호가 다 있어. 이런 식이나 저런 식의 오기가 발동해서 나는 그만
“일하러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하고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어.
그런데 그 말에 대한 반응이 더 가관이었지.
“일하러? 아하. 그거였군. 너 이제 일하지 않아도 돼. 밥은 내가 챙겨줄게. 까짓거 닭 몇 마리 계속 잡아오면 되는 거 아냐. 여기 보니까 닭고기들은 엄청 많던데. 막 기름에 튀기는 집들 있잖아. 그게 싫으면 소고기, 돼지고기 있는 집도 있던데. 걱정마. 그냥 가져가라고 썰어놓고 다 해놨든데 뭘.”
호쾌한 포즈로 몰랑한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만 콱 믿으라는 듯 말하고 있는 이 구미호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 아무리 현실에서 동떨어진 존재라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면 사회부적응자나 마찬가지잖아. 가만. 구미호가 굳이 인간 사회적응을 할 필요가 있었던가.
어쨌든 더 이상 상대했다간 그 존재 자체만큼이나 상황도 복잡해질 것 같아서, 머리를 흔들면서 출근을 하려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내 파카는 다시 붙잡혔어. 다만, 아까 전과 같은 무시무시한 완력이 아니라, 뭔가 머뭇거림이 묻은 손짓이었어. 의아함에 돌아본 순간, 그 구미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안타까움과 두려움과 어린애 같은 느낌의 눈으로.
“제발 가지마.....나, 정말 무서워.”
어젯밤의 무서웠던 그 존재는 온데간데 없고 정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은 여우 하나가 내 등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더군.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은 건 그로부터 30분 쯤 후. 몸이 안 좋아서 못나간다고 회사에 건 전화였지. 그동안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 녀석은 어린애처럼 내 옷깃을 붙잡고 옆에 있었고. 옷이야 물론 입고 있었지만, 원피스 차림만으로는 추울 것 같아서 내 옷을 꺼내주었지. 날 무섭게 만들었던 존재치고 여러모로 손이 가게 만드는 녀석이었어. 아, 그 귀와 꼬리는 어떻게 했냐고? 그건 몸에 한 번 힘을 주는 듯 싶더니 사라지더군. 편리한 존재야.
다음은 언덕 위의 집까지 다시 올라가면서 일문일답을 나눈 내용.
q: 에 또, 어디서 왔어?
a: 금강산. 사실은 더 위쪽의 개마고원에서 살다가, 먹을 게 없어서 점점 아래로 내려왔었고.
q: 구미호는 많이 있어?
a: 뭐 중국 쪽에선 일족이 많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내가 살던 근처에선 우리 가족 밖에 없었어.
q: 왜 날 찾아온 거야?
a: 그거야 네가 승천혈이니까.
q: 승천혈이란 건 뭐야?
a: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엄마가 뭐라고 가르쳐주긴 했는데, 다 까먹었고. 하지만 그건 내가 만나보면 그냥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어. 내가 살려면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으니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q: 그럼....(꿀꺽) 넌 나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거야?
a: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네게서 생기를 나누어 받는 거지. 그냥 구미호는 인간의 생기만으로 살아갈 수도 있어. 하지만 난 인간의 피가 섞인 불완전한 존재여서, 좀 더 강한 생기가 필요하다고 엄마가 그랬어. 그게 승천혈인 너고.
q: 승천혈이야 그렇다 치고, 인간의 피가 섞였다고?
a: 응. 아버지가 인간이었어. 금강산 관광 왔다가 어머니를 만나서 실종된 것처럼 하고서는 어머니랑 같이 계시면서 날 낳았대. 아버지랑 어머니는 아직도 그 쪽에 살고 계셔.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별로 그렇지도 않으셔. 내가 떠나온 날만 해도 계속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셨는걸. 어떻게 보면 내가 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구미호의 부모를 걱정하다 못해 이젠 구미호에게 훈계까지 하고 있는 내 사정이 다 희한할 지경이었지만, 확실히 그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았어. 내가 살아왔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겠지.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젠 뭐하지?”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구미호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어.
“서울 구경하고 싶어!”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