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또 무슨 종류의 환타지 소설인가를 고민해보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부친 도깨비는 내게 질문을 해왔어.
“자네, 단군신화는 어디 꺼정 알고 있는가?”
그 말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부분까지 이야기했어. 환웅이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인간세계에 내려왔는데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길 빌기에, 햇빛 안 쪼이고 쑥과 마늘로 100일 생식섭취 고행에 들어가면 사람 되게 해주겠다는 퀘스트를 주었는데 곰은 정말로 생식먹기 퀘스트를 완수해서 사람으로 변신해 웅녀가 되었고, 호랑이는 도망가서 실패했음. 그리고 웅녀가 호르몬이 동하여 짝짓기 상대를 원하기에 환웅이 엇다 이건 또 웬 떡이냐 하고 붕가붕가를 시전하여 웅녀가 단군을 낳았다, 라는 부분까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친 도깨비가 말했어.
“그런데, 사람이 된 게 곰만이 아니라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눈만 끔벅이고 있는 내게 부친 도깨비, 천보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어.
“이런 이런, 이제 봉게 이눔은 지 족보도 모르고 있었구마잉. 뭐, 어쩔 수 없는가.”
당최 또 무슨 환타지를 쓰려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천보는 이렇게 말했어.
“사람이 된 건 곰만이 아니라 범도 마찬가지였다 이 말이제. 단군 신화를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을 해봄시롱 다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말이여. 이긴 놈이 진 놈을 깔아뭉개도 되는 그런 거. 그런 조건을 걸어서 동물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신화라면 범 이야기는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수 있네. 이후 신라의 신화나 고구려의 신화 등등등에서 비교가 되는 존재가 나오던가? 알에서 태어났느니 어쨌느니 오로지 유일한 신격의 존재만 등장하지. 그런데도 단군신화 내에서는 범이라는, 비교할 만한 대상이 계속 전해져 온단 말. 그 말인 즉슨, 곰이 잘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비교할만한 반대급부가 필요했던 것이여. 범은 바로 그런 날조의 희생양이었고. 암.”
허헐.
이거 진짜,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개념이 납치당한 환타지의 소굴로~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세계, 라고 만화영화 노래를 개사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상황이었지. 내가 그렇게 벙쪄 있거나 말거나 천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어.
“결국 단군신화는 웅녀과 호녀의 주도권 잡기 역사였던 셈이지. 웅녀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그 이후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서 남아있고 싶지는 않았던 거고, 호녀는 인간과 친해지고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던 그런 존재였다 이 말이여. 결국 웅녀는 환웅을 유혹해서 단군을 낳아 신시에 내려온 환웅의 무리 3천명의 위에 올라서는 권력을 잡았고, 호녀는 인간들의 번성을 위해 풍백, 우사, 운사를 모시며 그들에게서 배운 지혜로 인간들을 돕기 시작했고.”
“그럼.....제가......”
“자네는 그런 호녀의 피에서 계승되어 내려온 ‘부림이’다 이 말이여.”
천보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어 불을 붙였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담배연기 만큼이나 내 머릿속은 희끄무레해져서 분간이 안가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어. 내가, 그런 존재라고?
“이 부림이라는 것은 자고로 신수, 구천의 영혼, 그리고 신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자신의 생기를 바탕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힘을 부여받고 다스리며 그들을 조종하여 인간들을 도울 수 있다, 뭐 그런 거제. 웅녀가 삼천명 위에서 군림하는 동안 상황은 점점 나빠져갔어야. 웅녀가 자꾸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반목이 그치질 않았고, 저기 대륙 것들이 동이라 일컫는, 그 삼천명의 원래 무리로부터 9부족이 갈라져 나왔네. 그 모습에 신물이 난 풍백, 우사, 운사는 하늘로 돌아갔고, 부림이들 역시 9부족의 꼴과 마찬가지로 웅녀를 따르느냐 호녀를 따르느냐에 따라 두 무리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여. 당연히 웅녀 쪽은 환인과 환웅의 가호를 받기 위해 좋고 힘있고 밝은 것들에 붙어먹는 것들이 전부 따라갔지. 4신수, 무당들이 숭배하는 강신들, 그리고 인간을 뛰어넘는 신선인들이 웅녀 쪽에 붙었고, 호녀를 따르는 존재들은 환웅의 가호를 잃은 잡귀신들, 그리고 인간들을 너무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선인들, 즉 우리 도깨비들이 된 거여. 그런데.......”
천보는 담뱃불을 내 방바닥에 비벼 껐고, 나로서는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머리통 cpu의 용량부족 때문에 화를 내거나 황당해할 틈도 없는 사이, 그의 말꼬리와 시선이 모두 미호 쪽으로 쏠렸어.
“저 아그가 상당히 특별하단 말이시......”
천보는 미호를 바라보면서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천보가 벌떡 일어났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는 게 너무 길어졌구만. 나가 이누무 입이 시티100 꼬라지라. 어쨌든 간에, 앞으로 살다보면 나머지 더 자세한 부분들쯤이야 금방 알게 될거랑게. 저기 구미호도 잘 좀 부탁허고, 우리 딸도 좀 잘 부탁허네. 어차피 능력도 운명도 다 있는 거이 자네잉게 그냥 콱 믿어불고 부탁하는 거시여. 우리 딸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났다, 부림이고 나발이고 그냥 확 담가불랑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 텁석부리 도깨비가 무슨 살벌한 말을 내밭는 거야! 라고 따져볼까 하다가, 그의 품에서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를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어. 그게 말이 도깨비방망이지 야구배트에 못을 박은 걸 옆에 나란히 놔도 귀여워 보일 정도의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거든.
그걸 꺼내자마자 혀로 한 번 슥 핥아내는데, 워워워. 그 분위기는 진정한 살기 甲을 뿜어내고 있었어. 천보가 그걸 바닥에 가볍게 두어번 톡톡 건드려 댔던 그 순간.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사과상자 크기 정도의 신사임당님 다발이 방바닥 한가운데 생겨나지 뭐야.
경악에 턱이 빠질 것 같은 걸 겨우 두손으로 받치고 있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천보.
“딸 간수 좀 잘 해달라는 선물로 받아주고. 그럼, 나는 믿고 가네?”
그 말과 함께 혹이라도 떼었다는 듯 즐겁고 경쾌한 걸음으로 천보는 우리 집을 나갔어. 뭐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핸드폰을 꺼내며 오우 s라인 쟈기~오늘은 거기서 기달려~내가 화끈한 밤을~ 뭐 이런 식의 대사도 들렸던 것도 같고.
일단은 돈다발의 휘황찬란함보다도, 초롱이 쪽이 더 신경쓰였어. 애비라는 놈이 저렇게도 좋을까 싶을 정도로 돈다발을 안겨주고는 즐거운 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버렸으니, 어쩐지 팔려온 신세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여전히 초롱이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무릎을 감싸고 쪼그려 앉아 있었어.
한쪽 구석엔 진윤이, 한쪽 구석엔 초롱이, 한쪽 구석엔 자면서 배를 긁으며 옹알이를 하는 미호, 방 한가운데는 엄청난 돈다발, 그리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전혀 감도 못 잡은 채 멍하니 서 있던 나.
지금 생각해봐도, 기괴하고도 웃기는 조합이었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