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돈다발은 박스를 하나 얻어다가 낡은 장롱 안쪽에 고이 모셔두고, 장롱에서 나온 짐들은 어떻게든 처분하고, 그러는 걸 진윤이 같이 도와주고, 그렇게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동안에 벌써 새벽 1시, 미호는 계속 잠만 자고 있고, 그런 미호에게 이불을 깔아주고, 피곤하다는 진윤도 같이 재우고 나서 보니.
아이구 요것들 쌕쌕거리면서 자는 모습이 마치 선녀들이 내려온 것 같은 모습이라 마음까지 흐뭇해지는데, 이러다가 정말 애들 키우는 아저씨 같은 꼴이 되지는 않을까 내심 두려움 아닌 두려움도 드는 그런 사이,
고개를 돌려보니, 초롱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세와 그 자리를 고수하고 앉아 있더라. 그래서 난 초롱이 앞에 털썩 앉았지.
“이렇게 와서 여기 살게 되었는데, 무슨 말이라도 좀 하자.”
초롱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깨를 더 움츠려서 무릎을 껴안은 팔을 단단히 안으로 끌어당겼어. 도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걸까. 설마 같이 살던 도깨비 녀석들이 뭔가 나쁜 짓이라도!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워낙에 세상이 흉흉한 게 요즘인데. 하지만 얘는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인데. 도깨비들도 그런 흉측한 짓을 벌일까?
“해.....”
초롱이의 입에서 뭔가 말이 새어나온 건 그때였어.
“해, 뭐? 뭐 말할려고 한 거야?”
반가움 반 걱정 반으로 나는 바로 반응을 보여줬어. 그랬더니 나오는 말이,
“핸드폰 같은 거....없어요?”
“응? 핸드폰? 지금은 없는데.”
“......”
초롱이는 되려 더 말을 하지 않게 되어버렸어. 아쉽지만 미호가 아침에 박살을 내버렸으니 나라고 방법이 있나. 그리고 다시 만들어볼까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연속으로 터졌고.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는 내 동영상을 보여주던 스마트폰이 있었잖아. 그게 떠올라서 물어봤지.
“좀전에 있던 아이폰은 어떻게 하고?”
“아빠가.........가져가 버려서.......”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이 작자, 나가면서 전화하던 핸드폰이 초롱이 핸드폰이었군. 참 얼마나 애한테 신경을 안 쓰면 다시 갖다 주러 오지도 않는지.
“그거,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중요한 거라도 들어있어?”
초롱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다가 또 겨우 힘을 내서 이야기하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
“중요한.....거는.......”
“응? 뭐가 있는데?”
“스......스캔해 놓은 엄마.....사진.......”
“엄마, 사진?”
혹시, 그런 건가, 싶어서 나는 물어봤어.
“엄마, 다시 만날 수 없는 거야?”
초롱이는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초롱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내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혹시, 저 컴퓨터 쓰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저.......저거......써도 돼요?”
“그럼. 안될 건 뭐가 있.........”
나는 말을 끊었어. 이게 참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생활비를 쪼개서 마련한 이 컴퓨터에는 무려 1테라 하드 세 개가 있고, 그 중 1테라는 죄다.....야동이었으니까. 그렇게 잠깐 고민하는 내 눈치를 살피고 되려 체념하는 초롱이의 눈치가 느껴져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래, 써도 돼. 뭐 까짓거.”
말이 떨어지자마자 초롱이는 단호한 몸짓으로 후다닥 컴퓨터로 달려가 전원을 켰어. 전원을 키고 있는 동안에도 초롱이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운영체제 로딩만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이거는 뭐, 완전 중독증이잖아, 라고 생각하는 순간 로딩이 끝났고, 그 뒤부터는 또다시 탈골하려는 턱을 받치느라 손을 올려야 했지.
광클한다, 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하긴 했지만 초롱이는 그럴 필요도 없었어. 로딩이 다 된 뒤에는 케이스에 손만 얹고 있는데도 컴퓨터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거야. 마우스를 움직이지도 않는데 마우스 화살표가 멋대로 움직여서 뭔가를 막 누르기 시작하더군. 나는 무슨 게임에서나 쓰는 매크로 프로그램 쓰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아니, 그것보다 배는 빠르게 내 컴퓨터가 작동하고 있었어.
“메인보드는, 중급, cpu는, 조금 딸리네, 그래픽 카드는, 이정도면 됐고, 파워박스가 하급이네. 보강해야지. 메모리. 증설해야 되고, 손댈게 많구나. 하드는.....”
헑......하드 뒤지는 것만은 제발.....숨김속성 걸지도 않았는데......라는 내 마음 속의 외침이 성대로 울려나오기도 전에 하드의 모든 것이 까발려졌어.
당연히 뒤지다 보니 1테라의 야동도 함께 모니터 속에서 파일명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혼자 있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파일명이 초롱이랑 같이 보니 왜 이리 낮 뜨거운지. 아니, 뭐 당연한 건가.
초롱이는 그 폴더에 머무르더니 동작을 멈추고 나를 곁눈질로 째려봤어. 아아아아아, 제발 그런 눈빛만은......난 그냥 신체건강한 대한민국 성인남성일 뿐이라고......
“이런 거...재밌나 봐요?”
“아니....뭐......그냥 재미라기보다는.......본능에 충실한다고 할까......어쨌든 정말 미안해. 이런 걸 보이게 해서....”
내가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하자 초롱이는 눈빛을 거뒀어.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겠지. 초롱이는 손을 떼서 어깨를 한 번 돌리고는 다시 케이스에 얹었어.
“눈이 부실지도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그리고는 초롱이의 손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어. 보강한다 어쩐다 하더니 뭔가 하려는 상황이었나봐. 그리고는 엄청난 광채가 방 안에 퍼졌지.
실눈을 뜨고 본 내 컴퓨터의 케이스는 마치 회로도 같은 것이 표면에 엄청난 속도로 빛나고 있었어. 왜 컴퓨터 그래픽 같은 거 보면 빛이 막 회로의 길을 움직이고 있는 그런 동영상 이미지 있잖아. 그게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거야. 그런데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니라, 마치 핏줄처럼 회로도가 점점 더 복잡한 모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어. 고작 60만원을 주고 산 내 저렴한 컴퓨터가 펜타곤의 슈퍼컴퓨터도 울고 갈 정도의 슈퍼컴퓨터가 되는 순간이었지.
“체제 보강 완료, 해킹툴 검색.”
초롱이는 다시 잽싸게 인터넷을 검색해보면서 몇 개의 프로그램들을 발견했어. 자세한 걸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건 누가 봐도 해킹 툴이었고, 몇 개의 도스창 같은 것들이 빠르게 명멸하기 시작했어.
개념상으로야 나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지. 자신의 아이폰을 해킹해서 그 속에 있는 정보를 빼내오려는 거였어.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이런 생각을 논리적으로 마무리해 볼 사이도 없이, 초롱이는 컴퓨터에서 손을 뗐어.
“이제, 내 아이폰과 회선만 연결되면 컴퓨터가 알아서 내 문서에 저장해 놓을 거에요. 나중에 스마트폰만 사주시면........”
작업이 끝나자마자 초롱은 의기소침한 아까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 일이 끝나자마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건, 역시 컴퓨터에 관한 한 중독증세인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라서 나는,
“이야, 정말 놀랍다!”
하고 아무 사심없이 초롱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정말 사심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물론 그러다 보니 뿔도 막 쓰다듬었고. 그런데 갑자기 초롱이의 얼굴이 홍조를 띄우면서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하더니 내 손을 탁 쳐버리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는 거야. 난 놀라서 두 손을 위로 들고서 내가 뭐 잘못했으면 용서하라는 포즈로 가만히 서있었어. 초롱이가 그런 내 맘을 깨달았는지, 또 다시 조그만 소리로 말했어.
“거기, 만지면.......안돼요......”
“응? 어디를?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뿌.......뿔......”
뿔? 뿔이 뭐가. 이러던 내 의구심은 갑자기 망치로 후려쳐 깨진 유리처럼 말끔하게 부서졌어. 이를테면, 그 뿔은 초롱이의.....에이, 알면서 왜 이렇게 눈들을 반짝이는 거야. 왜들 이래.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니까 좀 알아들어.
하여간 그런 눈치를 까자마자, 나는 가만히 뿔은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주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어.
“미안하다. 그래도 칭찬해 줄만 해. 네 능력은.”
초롱이의 얼굴은 여전히 외로 꼬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서 기쁜 빛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전달받을 수 있었어.
초롱이도 미호와 진윤이 누운 자리에 같이 누웠고, 나는 그 애들의 발치 빈 공간에 파카를 덮고 누웠어.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고, 나는 이런저런 피곤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잠이 잘 오지 않았어. 신사임당님 다발도 그렇고, 여러 모로 생각이 끊이질 않았지. 대저 이 존재들은 나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서 살게 된 걸까. 이들을 데리고 다스린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다스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짓으로 봐서는 휘둘리기만 휘둘리지 다스릴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존재들인데.
잠이 오지 않는 사정이야 초롱이도 마찬가지인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어. 아무래도 새로운 곳이니 적응이 되지 않겠지.
“안 자니.”
“.......잠이 안와요.....”
“그래도 자야지.”
“저....”
“왜?”
“저....”
“말해.”
“여.....옆으로 가서......자도.....돼요?”
띄엄띄엄 하는 말이 진짜 용기를 내서 하는 말 같아서 애처로웠지만, 천보 도깨비가 당부한 태도들이 등골을 싸늘하게 만들어서, 말려보자는 생각에
“야동이나 보는 인간 옆에 와서 어떻게 자? 위험해. 안 돼.”
내가 말해놓고도 참 자신이 찐따 같아지고 괴로운 말이었지만, 뭐 나름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굳세게 맘을 먹자, 이런 느낌으로 단호하게 말했거든. 그런데 잠시 뒤, 초롱이가 또 용기를 내서 말하더라.
“잠이 안올 땐.......아빠 옆에서 팔베개 하고 잤거....든요.....”
흠. 거참 망나니 같은 인상의 아버지지만 나름 따뜻한 면도 있었던 것 같군.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 이상 뭔가 구차하게 거절을 하고 있을 수도 없고, 냉정하게 난 네 아빠 아니니까 안 돼, 이러기도 참 그렇고 한 상황이 되어버렸지 뭐야. 한숨 한 번 내쉬고 나서, 나는 말했어.
“그럼 이쪽에 와서 자.”
초롱이는 머뭇머뭇 일어나서 내 옆으로 와서 누웠어. 팔베개도 하라고 팔도 내주었고. 초롱이는 내 쪽으로 몸을 모로 눕혀서 조금 어깨를 웅크리고 파고들었어. 한울님이시여. 인간의 피가 섞였다지만 얘는 도깨비입니다. 거기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구요. 제 욕망을 건드리시면 제가 아무리 선인의 피를 타고난 자라고 해도 미워할 거에요. 그런데 한울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맞죠.
널뛰는 심장을 그렇게 다독이는 사이, 초롱이 쪽에선 마치 초원의 숲 같은 평온한 냄새가 풍겨왔어. 그게 나름 또 신경을 진정시켜 주는 데는 좋더라. 이래서 천보 그 작자가 얘한테 팔베개를 해주었던 건가.
“걱정.....많이 되나요?”
초롱이가 말했어.
“걱정은 무슨. 뭐 어떻게 될지는 흘러가봐야지.”
“인터넷에, 그 동영상이 많이 퍼졌어요. 대부분은 합성이라고 공작은 해놓았지만, 아마도 이계의 존재들은 다들 눈치챘을 거에요.”
“그래봐야, 뭐 있겠어?”
“아니에요. 전세계에 있는 이계의 존재들이 다 그걸 봤을 거에요. 그리고는 찾아와서, 아저씨를.....”
초롱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어. 초롱이도 내가 많이 걱정되는가 보더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라는 놈을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게 고마워서, 난 또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 물론, 뿔은 피해서! (뭘 기대하는 거지 넌?)
“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야. 너도 그렇고, 진윤도 미호도, 다 나쁜 애들도 아니고, 힘도 있고. 그리고, 나도 뭔가 좀 노력을 할 게 있다면 좋겠다만.....”
“저....제가....많이 도와드릴께요....”
그리고는 고개를 푹 묻고 부끄러워 하는데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불끈불끈하는 것이 뭔가 아주 불타오르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해서 그냥 순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껴안아만 주려던 찰나.
갑자기 방에 불이 확 켜지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지?”
투웨이 스테레오로 들리는 말은 진윤과 미호가 외치는 거였어. 둘이 딱 일어나서 나랑 초롱이를 노려보고 있더군.
“아....아니에요....이건 아저씨가 그러라고 해서 그런 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 말이 맞군. 옷까지 벗고서 품속에 파고들 줄이야. 방심했는걸.”
진윤의 싸늘한 말에 나는 황급하게 몸을 일으켜 초롱이를 바라보았어. 팔로 지탱한 채 조금 일으켜 세운 상체에 아주 조그맣게 올라온 젖무덤, 그리고 아래엔 호박빤쓰......응? 호박빤스? 취향도 참 어린애 같은 걸......이라는 헛생각을 재빨리 지워내고는 난 또다시 벽쪽으로 뒷걸음질.
“히이이이익! 아냐! 이건 내 의도가.....”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미호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어.
“성소는 여자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말 끝내자마자 옷을 북북 찢어발기고는 꼬리랑 귀도 숨기지 않은 채 우당탕탕 내 가슴으로 점프해 들어오는 미호.
“그......그런 것인가! 역시 남자란 동물은.....그래도 그게 좋다면.....나로써도 어쩔 수 없지.....”
다소곳이 옷을 벗고 조신하게 한걸음씩, 하지만 자신 있게 다가오는 진윤.
“저.....저기, 언니들....전 잠을 자야 돼요......”
그러면서 그 품으로 어색하고 부끄럽게 비집고 들어오는 초롱이.
내가 언제쯤 기절한 건진 잘 모르겠어. 코피가 폭발해서 그랬던 것도 같고, 아니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뇌로 피가 역류해서 그랬던 것도 같고. 그것도 아니면 심장근육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잠깐 일시정지가 됐던 건가. (이건 상당히 위험하잖아)
하여간 그 말랑말랑한 몸들의 어택에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어.
이런 식으로, 우리들의 길고도 위험한 동거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던 거야.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