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통 기억도 안 나는 첫날밤 이후는 좀 평화로운 편이었어. 첫 번째로 한 일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거고, 두 번째로 한 일은 창고 같은 작은 방의 물건들을 비운 거였지. 손이 많으니 금방 해치워지더군. 그래봐야 뭐 그냥 다 버리는 거였으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새로운 식구들이 다시는 첫날밤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게 필요했어. 물론 셋은 입이 댓발처럼 튀어나왔지만, 난 아랑곳없이 밤에 자고 있는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지. 초롱이가 좀 문제이긴 했지만, 언니들이 대신 잘 해줄 거라고 달랬고. 미호는 특히 초롱이를 귀여워했어. 아무래도 자신처럼 인간의 피가 반 정도 섞인 초롱이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때문이겠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껴안고 쭉쭉 빨고 (?!) 난리도 아니었는데 난 또 그런 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에로틱하잖아!
라는 생각도 잠시 해봤고. 전의 진윤의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어미가 달라지고 느낌표가 들어갈 정도로. 흐흠. 진윤의 때가 한없는 블루에다 SM이었다면 이건 뭐 큐트하면서도 핑크에 가깝다고 할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 그 때는 나도 여유만만 했군.
그 다음으로 했던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 신사임당님을 세보지도 않고 6분의 1 정도 가방 안에 퍼담은 후 셋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가서 필요한 속옷과 옷가지 등등을 고르게 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양새는 여자애들인데 내가 입던 트렁크 빤쓰를 계속 입히거나 할 순 없잖아.
미호가 속옷을 입어보다 말고 탈의실에서 뛰쳐나와 내게 보여주겠다고 설레발치는 걸 진윤과 초롱이가 목조르기를 걸어 필사적으로 막은 건 아직도 고마움을 느끼는 일. 안 그랬다면 우린 고스란히 쫒겨 났거나, 뭔가 일이 더 꼬였겠지.
그 다음엔 잊지 않고 초롱이의 스마트폰을 샀어. 사는 김에 내 것과, 미호 것도. 서류 꾸미는 게 조금 난감한 대목이었지만, 그것도 진윤이 잠시 휴대폰 대리점 직원을 조종한 덕분에 별 탈 없이 넘어갔어. 진윤은 강지은의 부모가 사준 폰이 있다면서 거절했고.
그렇게, 한 이틀을 법석 아닌 법석 속에서 흘려보냈어.
그 이후에 다가올 일들을 알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렇게까지 평온하게 지내지는 못했을 거다 싶을 정도로, 우린 아주 잘 지내고 있었던 편이었네.
사흘 째, 나는 결심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집을 나섰어. 이번에도 셋이 다 따라 나오는데, 어떻게 막겠어. 그저 사고만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후 데려 나왔지. 그래도 옷이 날개라고, 제대로 옷을 챙겨 입히니 하나같이 너무너무 귀여워들 보였지.
사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별건 아니었어. 그나마 이 아이들의 존재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거였어.
그래서 향한 곳이 동네 아래쪽에 있는 시립도서관. 물론 거기 있는 정보들이 제대로 되어있다는 가능성이야 반반이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알면서 수정해 가는 것도 맞겠다 싶기도 했고.
“도서관이란 데는 뭐하는 데야? 성소?”
“책이 아주 많은 장소지. 책을 읽을 수도 있는 곳이고.”
“책? 책이 뭐야? ”
“글자를 새겨놓은 종이들을 묶어놓은 거야.”
“글자? 나 글자는 알아!”
미호는 신이 나서 초롱이를 껴안은 채 떠들어대고 있었고, 초롱이는 얼굴에 붉은 빛을 띄면서 미호에게 안겨진 채로 가고 있었어. 진윤 만이 내 곁을 잘 지키면서 걸어가고 있었지. 그렇다고 진윤이 평소처럼 냉정한 것도 아니었어. 뺨은 홍조를 띄고 뭔가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았지. 일단 도서관이잖아. 그녀가 좋아하는 지식의 창고라고.
조금은 난감한 실소를 띄우면서, 과연 이 애들을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 많이 고민되더군. 결과적으론 잘한 일이 되었지만.
도서관으로 들어가자마자, 진윤은 스스로 처녀귀신임에도 뭔가에 홀린 듯 책장의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초롱이도 신착도서 중에서 뭔가 기술서적을 척 꺼내더니 삼매경으로 빠져들었어. 나랑 미호 만이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럼, 우리도 책을 찾아서 읽어볼까?”
하는 나의 질문에 미호는
“응!!!!”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어.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확 쏠리는 건 당연지사. 나는 급히 미호의 입을 막았어.
“여기서는 큰소리 내면 안 돼!”
“왜?”
“다른 사람들 방해 안 되게 해야지.”
미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금새 눈치를 챘어. 아주 어린아이 같다가도 이럴 땐 영특한 부분이 있었다니까.
하여간, 미호와 나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귀신이 어쩌고 하는 책을 찾아냈어. 거기에 혹시나 있을까 싶던 구미호에 대한 정보도 찾아냈지.
이것도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은 사서 이름이나 그런 것들이 많아서 뭔소린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어. 다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상고사에 나와있는 말로는 예로부터 9부족은 우물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어 한 우물에서 물을 뜨면 나머지 8개의 우물이 출렁거렸다,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서 9부족이 정벌이나 침략 등에서는 함께 했다, 이런 말이래. 또 다른 말로는 환인이 농사지을 땅을 정비하면서 우물 정자로 나눈 땅의 모습을 은유한다고도 하고. 아무튼 이 9라는 숫자가 그 아홉 부족과 연결되어 은유에 많이 쓰였던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 구정(九井)이라는 단어가 어느 사이에 산해경이라는 고서에서부터 구미호로 표현이 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또 어떤 고서에서는 우임금이라는 사람이 꿈속에서 구미호를 보았는데, 구미호를 꿈속에서 본 자는 임금이 된다고 하여 단군왕검의 육성 아래 임금이 된 사례도 말하고 있고.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한가지는 확실했어. 그 책은 그 아홉 부족의 역사적인 비유물로 구미호를 썼다,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었지.
이 단락을 다 보고 나서도 도대체 미호의 정체가 확실히 어떤 것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는 지경. 일단은 잡귀 쪽으로 분류가 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고대 환웅의 형제들인 9황들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식인가, 싶기도 하고.
알아보러 왔다가 머리가 더 뒤죽박죽이 되는 순간, 내 눈에 책 하나를 읽으면서 아주 집중하고 있는 미호의 모습이 들어왔어. 그래서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나 잠깐 훔쳐봤다가,
나는 책을 빼앗아 들어서 도로 책꽂이에 넣었어.
“왜 그러는 거야! 재밌는데!”
또다시 우렁찬 소리. 또다시 황급하게 입 막기.
“조용히 해! 그리고 왜 성교육 책을 그렇게 진지하게 읽고 있는 건데!”
“그건......저......성소랑 아기를 낳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해서.....”
아놔.
“왜 벌써부터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그런건 집에 있는 컴퓨터에 시청각 자료도 많......아니, 이게 아니지. 하여간 그런 거 너무 공부하지 마!”
“왜? 그럼......성소는 나랑 아기 낳기 싫은 거야?”
이건 뭐 슈렉 고양이의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겠어. 아아아아아아놔아아아아아.
“시....싫은 건 아닌데, 아직은 이르다구! 벌써부터 이런 거에만 눈이 가면 안좋은 거야!”
“그럼....미호가 잘못한 거야?”
“그래! 그래! 그런 거야!”
휴우. 겨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싶었던 그 때.
“재미 좋으시네?”
하는, 나직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때. 책장들의 통로 사이로 눈에 보이고 있는 풍경은 좀 뭔가 초현실적이었어.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웨이브의 금발, 푸른 눈동자, 붉은 입술. 보통 고스로리라고 통칭하는 스타일의 레이스가 나풀대는, 퍼진 미니스커트와 전체적인 옷차림과 그만큼이나 기괴한 모양의 모자. 대체적으로는 진윤과 비슷해 보이는 체격의, 여자아이가 책장을 기대고 서 있었던 거야.
“저기....누구.....”
“누구냐고? 뭐 이런 사람이라면 알라나?”
참 한국말도 잘하시네요....라고 말하려던 생각도 얼어붙고 말았어. 여자아이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벌린 입. 거기에서 갑자기 잭나이프처럼 경쾌하게 튀어나오는 위아래의 송곳니.
저, 그러면, 당신은.
“이런, 제대로 인사해야겠네. 내 완전한 이름은 안나 미르 드라큘. 트란실바니아 드라큘라 백작가문의 후손. 인간들의 인터넷이라는 놈에게 감사해야겠네.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중세서양식으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짝 들면서 무릎을 살짝 굽히는데, 백짓장 같은 피부며 야들야들하게 보이는 몸매며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이상하게 뭐랄까, 전혀 살갑게 다가오는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할까.
“그냥 안나라고 불러도 되지만, 그럴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걸.”
인사를 끝내고 웃는 안나의 입에서 송곳니가 한없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주변에 휘몰아치는 검은 오오라, 그리고 음산하게 울리는 목소리.
“넌 지금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