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혈 (11) - 뱀파이어

NEOKIDS 작성일 11.06.12 00: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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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호가 으르렁거리며 귀와 아홉 개의 꼬리를 드러냈어. 한껏 웅크린 채로 마치 개가 누군가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듯한 포즈를 지으면서 견제하고 있는 미호. 하지만 그런 것쯤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안나는 확실히 한걸음씩 걸어오고 있었어.


“확실히, 그 피는 달라. 내 최면에도 걸려들지 않고 있잖아? 예전에 투르크에서 라두 삼촌이 소개해줬던 그 맛. 바로 그거야.”


알지도 못할 소리를 주절거리면서 그 여자애는 점점 내 앞으로 다가왔어. 최면? 최면이라고? 나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봤어. 미호랑 실갱이를 벌이느라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전부 바닥에 널부러져 있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었어. 하지만 최면이라고 말했으니 아직 죽진 않았겠지. 그저 정신을 잃었을 뿐.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위험해진다, 두리번거리며 그런 광경을 본 내 이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는 동안, 미호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어. 그리고 안나가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순간, 공중으로 튀어 올랐지.


안나의 상체 쪽으로 날듯이 달려든 미호의 몸짓은 안나를 완전히 찢어놓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러나 안나의 상체가 잠시 기우는 것 같이 느껴지고, 팔을 휘두르고 있다고 느낀 순간, 미호는 굉음과 함꼐 책장에 꽂혀진 책들의 벽을 탄환처럼 뚫어대며 날아가 버리고 있었어.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검은 오오라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지.


“이런 미천한 동물 따위로 날 어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세 걸음만 걸어오면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찰나,


“성소!”


그런 광경 저 너머로 나를 부르는 것은 진윤과 초롱이였어.


“잠시만 기다려! 내가....”

“잠깐! 먼저 이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급하게 외치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쳤어.


“어머, 훌륭하기도 하지. 인간의 희생이란 건 참 아름다운 거야. 그렇지 않아? 성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런 허접한 도시락들이 백개 천개 있으면 뭐해? 극상의 메인디쉬가 앞에 있는데.”


그러면서 안나는 천천히 계속 다가오고 있었어.


“성소!”

“오지 마! 빨리 내 말대로 해!”


진윤과 초롱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면서도 내 말대로 했어. 진윤이 두 팔을 양쪽으로 들고 힘을 쓰자 사람들이 좀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고, 초롱이가 자신의 조그만 도깨비방망이를 꺼내 바닥에 쳐서 작은 독각귀 (외발도깨비) 들을 불러내서는 사람들을 와글와글 밀어대며 들쳐 업고 급히 옮기고 있었어.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계속 뒷걸음질 쳤어. 진윤과 초롱이가 합심해 사람들을 빠져나가게 하는 시간동안, 안나는 그 정도쯤은 봐준다는 듯 아주 느긋하게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 


내가 무슨 계획으로 이렇게 용감하게 굴었냐고?


사실을 말하자면......아무 계획도 없었어.


좀 더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원망할 틈도 없었어. 그저 사람들이 무사하게만 나가면 되는 거였지. 그 다음은 내가 죽든,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건 그 다음 문제고. 죽인다면 죽겠지, 하는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안나에게 다가가 나죽여줍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만치. 발버둥이란 것쯤은 쳐봐야 하잖아.


난 옆에 있는 책을 들고 냅다 던져댔어. 하지만 뭔가 투명한 방어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것들은 하나같이 안나의 앞에서 일정간격을 두고 떨어져 내리는 거야.


“뭔데. 시시하다. 좀 더 재밌게 못하겠니?”


유창하게 쏘아붙이던 안나는 드디어 내 앞에 완전히 섰어. 이젠 더 저항할 수도 없는 꼴이 된 내 턱을 붙잡고 천천히 목을 돌렸어. 저항하려 해도 내 목은 안나의 손아귀힘을 이기지 못하고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꺾였고.


“그럼, 잘 먹겠습니다앙~”


숫돌에 잘 갈아서 날이라도 세운 것 같은 그 송곳니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눈을 질끔 감으려던 그 순간,


갑자기 허여멀건한 허벅지 두 개가 기관차와 같은 속도, 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내 눈앞을 지나갔어.


그리고, 그 허벅지의 주인공, 미호가 날린 드롭킥이 안나의 머리통에 작렬. 미호가 날아갔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이번에는 안나가 책들을 뚫고 날아갔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책의 종이들, 그리고 옷이 찢어진 채로 우뚝 서 있는 미호.


“미호!”


나는 반가워서 다가가려고 했는데, 미호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져 있더라고.


“부림이 청년, 위험하니 자리를 피해 있으시게.”


부림이 청년? 있으시게?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 찰나, 안나가 다시 나타나 미호의 앞으로 날아왔어. 말 그대로, 공중에 둥둥 떠서. 안나 역시 아까 전과 모습이 같지는 않았지. 등에는 박쥐의 날개가 크게 나 있었으니까. 


“제법 하는 걸? 잠깐 놀랬지 뭐야? 미천한 동물이라고 했던 건 수정해주지.”


미호와 안나의 눈싸움, 그리고 그 옆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 나. 그리고 다시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어.


둘 다 몸은 그냥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서로가 팔을 놀리는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 뭔가 휙휙 움직이고 있고, 그에 맞춰서 책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회오리처럼 움직이기 시작했고, 주변의 건물 벽이나 책장 등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지. 나조차도 그 안 보이는 일정 반경으로 들어가면 죽을 거야,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공기의 진동과 소음이 점점 격해지기 시작했어.


어디든 피해야 했지만, 문제는 피할 곳이 영 마땅치 않다는 거였어. 책장들이 아직 서 있는 곳들도 많았고, 내 등 뒤쪽은 벽과 책장이 맞붙어 통로가 없는 곳이라서 문제가 더 심각했지.


얼마쯤 격해지던 싸움의 공간에서 충격파가 터지면서 미호와 안나 둘 다 반대방향으로 튕겨나갔고, 반향이 나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어. 둘 다 바닥에 착지할 때 둘 다 바닥을 한 번 튕기면서 반동을 상쇄하느라고 웅크린 자세를 취하면서 주변으로 책과 책장들이 마치 물결처럼 밀려나갔어. 이 모든 상황에서 벌어진 열기 때문에 소화전이 작동하고 스프링쿨러가 터지고 있던 지경이었고. 물을 쫄딱 맞아가며 벽에 등을 대고 있는 순간에, 머리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성소! 괜찮아?”

“아저씨! 무사해요?”


진윤과 초롱이 책장 위로 달려와서 날 확인한 거야. 둘 다 역시 미호의 싸움이 너무 격렬해서 끼어들 생각 따윈 아예 못하고 있었어.


미호는 미소를 띄면서 다시 안나에게 달려들었어. 마치 오래간만에 제대로 싸워서 즐겁다는 듯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아.


“그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원한, 지금 갚겠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 이 모든 내막이야 나중에는 알게 되는 거지만, 어쨌든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진윤과 초롱이는 그 와중에서 최대한 날 보호하려고 애썼어.


모든 상황을 종합해봤어. 소화전이 작동했으니 남은 시간은 최대 10여 분 정도. 그 뒤에는 소방서의 빨간 차들이 죄다 몰려올 거야. 하지만 지금의 싸움은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을 끌 것 같은 느낌. 이 균형을 깨고 미호 쪽에 유리하게 하려면.


하는 수 없이 또 그 방법을 써야만 했지.


“초롱아. 네 도깨비방망이!”


초롱이가 어리둥절하며 방망이를 건네주려고 하는 걸 나는 왼손으로 붙잡고 오른손 바닥을 대서 긁어버렸어. 천보의 도깨비방망이의 축소판인 도깨비방망이인지라 확실히 살 찢는 건 대수도 아니더군.


“무슨 짓인가 성소!”

“아저씨!”


잠깐의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린 난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뒤로 젖힌 채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공간으로 다가갔어.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이 그들의 싸움 때문에 튕겨 날아와 따갑게 피부를 때렸고, 파편 같은 것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런 걸 따질 새도 없었어. 이 팽팽한 밸런스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내 피만이 유일한 해결책일테니까.


난 젖힌 팔을 힘껏 휘둘러 피를 흩뿌렸어. 온사방에 피가 흩뿌려졌고, 당연히 그런 피의 냄새와 기운에 반응을 보인 건 안나. 안나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일순간 내 피 쪽으로 정신이 쏠렸어. 그게 그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지. 미호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으니까.


미호의 손톱이 안나를 갈기갈기 후벼놓았어. 보이지도 않을 찰나에 옷이 찢겨져 나가는 광경과 동시에 온 몸이 기괴하게 흔들리면서 미호의 공격을 그대로 다 받고 있었지. 귀청을 찢어놓기라도 할 듯 소름끼치는 비명이 온 사방을 울렸고, 할퀴어진 안나의 몸은 거의 걸레짝 꼴이 되어버렸어, 그 반동을 고스란히 떠안고 책더미 속으로 쳐박히고 말았던 건 내가 팔을 휘두른 지 불과 몇 초 뒤.


안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말했어.


“어......어째서 재생이 커헉.....안 되는 거지? 넌 도대체 크헉.....뭐야?”


안나의 눈동자는 완전히 공포로 물들어 있었고, 미호가 다가오자 버둥거려 보려는 듯 팔다리를 움직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었어.


자, 거기까지.


“미호! 그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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