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혈 (20) - 첫번째 싸움의 끝

NEOKIDS 작성일 11.07.12 21: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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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웅 할아버지의 검도 너무 매섭거니와, 저 쪽의 숫자가 그냥 봐도 한 10명은 넘어 보이는 지라 나 같은 아마추어가 어떻게 해보기엔 버거웠지. 겨우겨우 막아내는 게 전부. 그래도 생각하는대로 윈귀들이 빨리빨리 움직여주니 그것도 해 볼만 했어. 그 인원이 다 몰려드니 옥상이 좁긴 했지만, 어찌 저찌 겨우겨우 피할 수도 있었고.


그런데 막아낼 때마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또 들리는 거야.


--더.....짜릿해.....아흥.....

--거기.....더 때려줘 아악....


이건 아무리 들어봐도 SM계열에서나 나올법한 사운드가 아닌가 싶어, 그 와중에도 한 번 따져봤지.


“아이씨. 이거 무슨 소리야?”

--이해해라. 원귀 생활 오래하다 보니 좀 변태처럼 변한 놈들도 있어서, 그 놈들을 방어축으로 삼다보니 들리는 소리다.


대강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하고 나서 그 윈귀협회대표자놈의 목소리는 계속 내게 공격하라는 주문을 해댔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틈이 나야 하지. 게다가 그 귀축검, 승천혈의 피들만 적셔서 그런지 원귀들에 대한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지. 다른 놈들이야 잘 막아댔지만 귀축검은 한 번 내리칠 때마다 그 물처럼 물렁물렁한 외형이 쓸려나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연기와 함께 사라지더군. 왜 그 놈들도 힘에 부친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어.


얼마나 그렇게 피하고 있었을까. 그 많던 원귀의 양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가고 있고, 옥상 끝까지 끝내 내몰린 상황. 아래에 문득 골목까지 나와있는 미호와 진윤, 초롱이의 모습이 얼핏 보였어.


초롱이의 손을 한솔이가 잡고 끌고 가고 있는 한 편으로, 미호와 진윤은 나름의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어. 특히 미호가 아주 볼만 했지. 이쪽을 보더니 눈에서부터 빛이 나면서 그 빛이 온몸으로 퍼지더니 점점 형상까지 변해가면서 완전한 본모습, 건장한 청년 정도도 부럽지 않을 크기의 꼬리 아홉 여우로 변신한 거야. 진윤도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손을 들어 귀곡성을 길게 내뿜자 주변 동네 골목들에서부터 마치 좀비영화에서나 볼법한 광경처럼 그동안 홀려뒀던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기 시작했어.


그런 광경들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순 없었지만, 잠시 그런 상황에 당황한 석웅 할아버지의 검이 늦춰지는 틈에 나도 어느 정도 구경은 할 수 있었지.


석웅 할아버지는 상황을 살펴보더니 잠깐의 손짓을 했어. 그러자 석웅 할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한 번 다른 집의 지붕들로 물러나기 시작하더군. 난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얻었는가 싶기가 무섭게, 석웅 할아버지의 지시가 들려오자 이맛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어.


“저 구미호와 처녀귀신, 도깨비들은 아직 능력을 발휘 못하는 것들이다. 네놈들만으로도 충분할 터. 나는 이놈을 해치울 터이니 너희는 저놈들을 해치우거라!”

“어르신, 하지만 한솔이가....”

“저놈이 선택한 운명이다.”


간결한 대답에 뜻을 알았다는 듯 놈들이 전부 우리 애들을 덮치기 시작하는 거야.그리고 다시 석웅 할아버지는 내게 덤벼들었지. 한솔이까지 처리하겠다는 그 뜻을 나도 알아듣고 또다시 슬슬 열이 뻗치기 시작하는데, 이건 도저히 막을 수가 없겠더라.


--오오오.....그래. 바로 이거야......더 화를 내. 그래서 저 놈의 사지를 찢어버려!


라고 또 추임새를 넣기 시작하는 원귀대표자녀석에게 난 내뱉었어.


“싸물어.”

--뭐라고? 

“주둥이 싸물라고!”


난 처음으로 주먹을 내질렀어. 공격해오던 석웅 할아버지가 질주해나가는 원귀들의 모양새에 급하게 도로 방어형세를 취하면서 튕겨나가 버렸던 그 틈. 그 틈을 타서 난 급하게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지. 몇 놈은 미호와 함께 이 지붕 저 지붕을 널뛰며 쌈질을 하고 있었는데, 미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역시 덩치가 커지다 보니 받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고, 진윤도 겨우 인간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놈들의 재빠른 움직임은 그런 인간벽 쯤은 식전거리도 안된다는 듯이 잽쌔게 이동해 나가 공격을 하고 있었어. 한솔이도 초롱이를 지키느라 맞대응을 했지만 점점 열세에 몰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애들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시간.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자마자 내 몸이 붕 날아서 허공에 떠있더라고.


“뭐! 뭐야 이건!”


--생각만 해라. 그럼 우린 움직여줄 수 있지. 공격력을 반탄력으로 이용하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아까 전 같은 말은 빈정 상하게시리 하지 좀 말고.


“좋아, 그럼 제대로 날 따라와. 놈들에게 한 대씩만 때리는 거야. 죽지 않을 정도로.”


--오케이. 


먼저 내 몸이 떠서 날아간 곳은 초롱이와 한솔이의 위치였어. 포위된 그 틈사이로 내려서자마자 놈들이 좁은 골목에서 후다닥 물러나 다른 지붕들로 날아갔어. 가까이 보니 상처도 많이 입었고 숨도 거칠어져 있더군. 검은 오오라가 일어나고 있는 나에게 한솔이 다시 검을 고쳐 잡고는 살기어린 눈으로 쏘아보았지.


나는 한솔이를 바라보며 일단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얘기했어.


“미안하다.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

“일단 초롱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해......”

“왜! 왜 미안하다고 하는 겁니까!”


한솔이가 울부짖듯 외치더군.


“너는 나쁜 놈이야! 이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될 악한 존재라고! 그런데 어째서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어째서!”

“긴 말은 나중에. 어서 초롱이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놈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고, 석웅 할아버지도 이쪽으로 날아오더군. 그것들을 다시 방어력으로 막아내면서 나는 급하게 외쳤어. 칼날이 번뜩이는 만큼 그것을 잡아먹는 검은 오오라도 점점 더 넓어져 갔고,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 갔지만, 원귀들은 내 말을 잘 따라주었지. 딱 한 대씩만 제대로 때린다, 이게 성공적으로 먹혀들기 때문이었어.


처음 겁을 집어먹고 웅크렸을 정도로 현란했던 도법들은 내 몸이 생각했던 것만큼의 스피드를 내게 되면서 느려터진 것처럼 보이게 마련. 열심히 원귀들의 검은 오오라들이 내 수족을 움직여 주는 덕분에 난 위치만 생각해도 엄청난 스피드를 낼 수 있게 되는 대신, 삐걱거리는 몸의 고통을 견뎌야 했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 원귀생활들을 했으면 이렇게 호흡이 착착 맞는건지. 내 몸의 수족들을 담당한 오오라들은 나도 놀랄 정도로 내 몸을 내가 생각한 것처럼 움직였어. 이것이 에반게리온에서나 보던 싱크로라는 개념인 것일까?


그렇게 한 놈의 도를 피하고서 골반뼈 옆쪽을 가격하자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석웅 할아버지와 다른 놈들의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하더군. 그와 동시에 나도 살짝 빈정 상한다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목소리가 또 들려왔어.


--아이썅, 한 대잖아. 한 대. 힘 조절 한 거라고.


일단 뭐 그렇게 덮어두고 나는 위치를 바꿔가면서 놈들을 한 대씩 쳐나갔어. 먼저 한솔이를 공격하던 놈들을 다 쓰러뜨리고 그 다음엔 진윤쪽. 벽을 타고 공중으로 떠 살펴보니 진윤은 최후의 보루로 몸에 바싹 붙여둔 한 겹의 인간 스크럼을 짰기에, 이들이 이 싸움과 관련 없는 민간인이란 걸 알고 놈들이 공격에 조심하려 여간 애를 먹고 있는 게 아닌 상황. 옳다구나 끼어들어 어깨뼈와 팔뼈를 닥치는 대로 가격. 또 우지직. 그 다음으로 미호 쪽까지 해결. 미호조차 놀랍게도 이런저런 상처들을 입고 있었어. 그래도 미호를 상대하는 놈들도 꽤나 당한 상태. 뭐 어렵지 않게 한 대씩.


그렇게 다 쓰러뜨리고 나서 마지막 석웅 할아버지를 돌아보자마자, 내 생각에 반응한 원귀들이 내는 스피드가 최고조에 달했어.


끝내 이 할아버지가 그 큰 귀축검을 쳐들어서 한솔이를 향해 내리치려 하고 있는 거야. 한솔이는 주저앉은 채 최대한 검을 들어서 초롱이를 보호하고 있었고.


“그만둬!”


엄청난 스피드로 그 사이에 끼어든 나는 그만 얼굴부터 땅바닥에 쳐박혀 버린 꼴이었어.


--아.미안.


원귀대표자놈 목소리가 띡 허니 들려오는데, 이걸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사이도 없을 모양새인게, 내 엉덩이로 검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거든. 검이 한 1센찌만 더 들어 왔어도 뭔가 더티하게 위험했던 상황.


급하게 내가 일어나자, 석웅 할아버지가 뒤로 물러났고, 미호와 진윤이 그 뒤를 막아서기 시작했어. 놈들은 모두 쓰러져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고얀 것......얌전히 칼을 받지 않고 사악한 힘을 빌려 해코지를 하다니!”

“사악함이란 뭡니까? 할아버지.”

“뭬야?”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외쳤어.


“친구를 사귀려 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 하며, 어떻게든 살려고 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인간다우려 한다는 것.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려고 하는게 죄라는 말인가요!”

“요망한 것! 네 그 피가!”


석웅 할아버지가 다시 내려치는 귀축검을 나는 손으로 그대로 받았어. 그건 결국 그 기세를 원귀들이 다 막질 못해서 손에 날이 조금 닿았어. 손으로 피가 흘러내렸지. 원귀들의 힘이 그 피를 보더니 더 분기탱천해졌고, 엄청난 양의 원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 그 때 쳤던 폭풍우 같은 검은 오오라의 이삼십배 정도 되는 크기가 공중을 맴돌기 시작하면서 아예 동이 다 터 오르려는 주변을 더욱 칠흑 같은 밤으로 만들었지.


“네 그 피가! 더러운 게야!”

“입 다무세요!”


나는 귀축검을 잡아서 벽으로 내동댕이쳤어. 뒷걸음질 치고 있는 석웅 할아버지의 위로 원귀놈들의 기운이 이젠 광란을 일으켜 공간을 마구 이지러뜨리며 석웅 할아버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나는 품속에 항상 넣어놓던 초영의 부적을 꺼내어 위협하듯 흔들어 보였지. 그러자 그걸 본 놈들이 순식간에 폭풍우를 지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그 광경을 얼빠진 듯이 바라보던 석웅 할아버지 앞으로 가서 나는 섰어.


“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선은 선이오 악은 악이라고 제멋대로 못을 박고, 말을 만들고, 음해하고, 해꼬지하고, 조롱하고! 그렇게 우리들을 해하고 죽이려는 거라면, 우리도 그냥 앉아서 죽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왜 이런 싸움을 계속 만들려 하는 겁니까!”


이지러진 공간의 앞까지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난 석웅 할아버지는 대답도 못한 채 멍하니 내 말을 들으며 이미 힘이 다한 듯 흔들거리는 몸으로 겨우 내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어. 그리고는 내 손에 있는 부적에 눈을 고정하기 시작하더군. 


“네 놈.....그건.......그 문장은......”

“이....이게 왜요.....”


순간 또 소심해지던 나. 화제만 돌렸다고 그 지경이 되어버리니 나도 참 바보 같은 놈이었지.


“그.....그 문장까지 받다니......이젠 더 돌이킬 수 없는 놈이 되어버렸구나.....”

“이...이게 뭐가 어째서요....”

“이게 뭔지를 모른단 말이냐?”

“몰라요.”

“괴이한 놈이로고. 이것까지 받았으면서 고작 부림이로서의 힘은 이정도 뿐이라니....”


석웅 할아버지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가짐을 제대로 다듬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한 번 소릴 질렀어.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그 말에 수하 놈들이 부러진 몸땡이로도 벌떡벌떡 일어서더군. 난 또 공격을 해오려나 하는 생각에 다시 자세를 취하려는데, 석웅 할아버지가 한 손을 내밀어서 날 제지하는 포즈를 취하는 거야.


“오늘의 싸움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네놈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말단. 네놈에게 다시 올 수도 있으니 그 때는 원망 말거라. 그리고 귀축도는.....돌려주지 않겠나?”

“싫은데요.”


나와 가까운 곳의 벽에 꽂혀서 징징거리고 있는 귀축도를 바라보면서 도를 집어 들겠다는 기세라도 여차해서 보인다 하면 나도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내보였어.


“에헴....크흠......쯥. 할 수 없지. 허나 우리는 우리 말단들로써만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 즉, 우리보다 더 높은 어르신들이 나서서 네놈의 일을 처리하게 될 게야. 그 때에도 네놈의 그 잘난 논리를 앞세워 보려무나.”


그리고 석웅 할아버지는 돌아서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갈했어.


“그리고, 한솔이! 네놈은 파문이다! 너의 도는 네 뜻대로 해라!”


한솔이는 그 얘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이 없었어. 아무래도 충격이 꽤 컸을테지.


석웅 할아버지가 앞서 나가면서 수하 놈들이 절뚝거리거나 아파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그 뒤를 따라 골목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미호와 진윤도 어느새 내 곁으로 와서 서 있었어.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으면서, 우린 그렇게 물러나는 적들과, 앞으로 다가올 전투들을 맞이했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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