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1)

NEOKIDS 작성일 12.03.28 12: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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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에 데미앙은 눈을 떴다. 전날 마신 캄프주 때문에 골이 줄어들어 두개골 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데미앙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담요가 밀려나며 떨어졌다.

데미앙은 옆에 누운 소녀의 나신을 보고 있었다. 앳된 젖멍울과 덜 자란 골반이 만드는 밋밋한 라인이 아무리 봐도 어린 애였다. 데미앙은 길게 자란 장발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가게 됐는지를 생각하려다 만두고 데미앙은 웃옷과 바지를 아무렇게나 걸쳤다. 걸치면서 그는 한구석에 있는 보따리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천은 제노스 제국의 최고품이라 일컫는 르노아 산 옷감이었지만 오랜 풍랑과 허술한 관리는 그것을 넝마나 다름없게 만들어 놓았다.

사람의 상반신 크기만한 그 보따리 꾸러미를 바라보며 데미앙은 도대체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졌는지를 떠올려보았다. 회상은 착잡함과 분노로 바뀌었고,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걸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이 붉은 갈기 여관 1층에 있을 것이었다. 캄프주.

"캄프주 한 병."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데미앙은 주문을 했고, 그가 비틀거리며 2층에서부터 내려와 바에 털썩 앉기까지 계속 그를 지켜보던, 멋진 턱수염과 날렵해 보이면서도 큰 키의 여관 주인장은 말없이 캄프주 한 병을 내놓았다.

데미앙이 연거푸 세 잔을 목구멍에 털어넣고 네 잔 째를 마시려는 순간, 2층 계단을 통해 누군가 엉기적거리며 내려왔다. 데미앙의 옆에 있던 그 소녀였다. 그걸 보고도 주인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데미앙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데미앙은 내려와 곁에 선 소녀에게 짜증을 실어 물었고,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벌렸다. 데미앙은 쓴 웃음을 짓고는 금화 3기네온을 테이블에 놓았다. 침대에서 볼 때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소녀가 금화를 집으려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금화를 집어들진 못했다. 데미앙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물어본 탓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처음이었지?"

소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주인장이 신경쓰이는 눈치였다. 그걸 눈치챈 데미앙의 말이 더 짖궂어졌다.

"많이 아팠을 텐데 잘도 참더군. 그러게 집안 일이나 잘 돕고 살 것이지 무슨 매춘이야? 정신이 나간 거 아냐? 그런 걸 밝히는 병이냐? 정말 그런 것 같던데. 그 나이에도 그렇게 격렬하게 느끼는 걸 보면...."

데미앙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소녀가 다른 한 쪽 손에 구겨쥐고 있던 것을 데미앙의 얼굴에 던져버렸던 때문이었다. 데미앙은 그게 뭔지 보려고 천천히 얼굴에서 떼었다. 첫날 밤의 흔적이 배어버린 소녀의 속고쟁이였다.

그와 동시에 데미앙의 눈에 들어온 건, 분노를 어쩌지 못해 눈을 부릅뜬 채로 구슬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소녀는 금화를 그러쥐고는 도망치듯 여관을 나갔다.

"쳇."

데미앙이 이번엔 병째로 캄프주를 들이키려 하는데 주인장이 병을 잡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이런 싸구려술로 과음하시면 되겠습니까, 데미앙 페르마이어 친위기사단장."

데미앙은 자신의 앞에 버티고 있는 주인장을 올려다 보며 되받았다.

"그러시는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뭘하고 있습니까? 크리시나 공국의 붉은 창기사 팔크람 폰 라인할트님."
두 사람의 눈빛 속에서 잠시 뜨겁고 격렬한 적의가 교차했다. 그러길 얼마쯤 지났을까. 두 사람의 입에서 피식하고 새어나오던 웃음이 서서히 크게 쏟아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핫!"



팔크람이 가져온 술은 싸구려 캄프주보다 훨씬 비싸고 맛있는 러그라인주였다. 데미앙은 팔크람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왕년에 제노스 제국 최대의 적이었던 자네가 여관 주인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다 자네 덕분이 아닌가. 천년에 한 번 나올 뛰어난 마법기사인 자네의 용맹함 덕에 나라가 없어져 버렸으니."

"그거에 대해서 사과받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그나저나 아직도 자넬 찾는 첩보망이 가동되고 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편히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팔크람은 한 잔을 들이키고 데미앙에게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거야 다 여기, 칼레아 시장 다이슨 덕분이지. 하지만 어젯밤에 자넬 봤을 때는 좀 놀랬다고. 날 잡으러 온 줄 알고."
"그런데 어째서 공격하지 않았지?"
"옛날의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성급함도 초조함도 사라져갈 나이니까. 거기다가 메리니를 옆에 끼고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자넬 보고선 날 잡으러왔단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그 애 이름인가. 메리니가."

데미앙이 멋적은듯 물었다.

"그래. 우리 여관일도 곧잘 도와주고는 하지. 동생이 아픈데 방법이 없어서."
"자네도 못 도와줄 정도인가?"
"약으로 그저 살려만 놓고 있을 뿐이라지."
"그런 애가 매춘을 하게 보고만 있었다니. 왕년의 그 정의감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신의 죄책감을 내게 전가하진 말라고. 그런 말 하기엔, 정말 나이를 먹어버렸지. 갓 스무살 시절이 아니란 말이야."

팔크람은 술을 한 잔 입으로 털어놓고는 말을 이었다.

"그 땐 정말 뭔가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크리시나의 수도 마니안이 불타던 날 난 뒤늦게 깨닫고 말았지. 내가 뭘 위해 싸워야 했는지, 그 수많은 죽음들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그런데....."

쓴웃음을 지은 팔크람이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말했다.

"아무 것도 없더라고. 아무 것도."
"늙은이 같은 말이로군. 고작 30대 중반에."
"그래. 겨우 15년 전 일들인데, 폭싹 늙어버린 기분이야. 그런 김에,"


팔크람이 데미앙의 잔을 채워주면서 물었다.

"자넨 어쩌다 이렇게 방랑자꼴이 되어 여기까지 온 건지. 그거나 털어놔 보게."

술을 목구멍으로 넘긴 데미앙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술의 독한 기운 때문인지 과거에 대한 쓰디쓴 회상 때문인지 팔크람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데미앙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절의 뜻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음에 하겠네."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데미앙이 있다. 그들은 데미앙을 둘러싸고 원형으로 서서 비난과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선다. 페델리니 총리대신.

"그리하여 황제폐하를 능멸하고 제노스 제국의 위엄을 추락시킨 이 친위기사단장을 엄한 벌로 다스려..."
"아니야! 모두 거짓말이야!"

데미앙이 목놓아 외치는 순간 그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한 여자의 모습이 그 자리에 나타난다. 허영심과 미모로 남자들을 사로잡았던 그녀, 데미앙이 진심을 담아 사랑했던 스카일라의 모습이.

"난 당신을 믿었지만 이제 아니에요. 거기다가, 더 이상 당신은 귀족도 아니잖아요. 이젠 그만,꺼져버려요."

이번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배신자! 변절자! 은혜도 모르는 놈!"

목구멍이 점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틀어막혀 목소리를 내려고 꺽꺽거리고 있는 데미앙의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그의 아버지, 페르난드 페르마이어 후작이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쓸쓸한 느낌을 주며 등을 돌린다. 손을 뻗어도, 발버둥을 쳐도 닿지 않는 공간 속에서 울리는 것은 오로지, 데미앙을 비난하는 목소리 뿐.

"아니야아아아아아!!!!!!!"

데미앙은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 땀으로 절어 있었다. 또 같은 꿈. 그가 친위기사단장직을 박탈 당한 이후 계속 꾸어온 꿈이었다.

데미앙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이 이룩해놓은 제국에서 자신은 쫒겨났고, 죽임을 당할 뻔 했으며, 지금도 죽음의 문턱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팔크람의 말이 데미앙의 뇌리를 스쳤다.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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