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6)

NEOKIDS 작성일 12.04.07 12: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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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니가 앞까지만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나오는 걸 데미앙은 손을 저어 말렸다. 메리니는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신 거에요?"

데미앙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음......나중에 말할께."

걸어오는 내내 데미앙은 여관에 있는 보따리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그리고 여기 이 칼레아 시에서라면 그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고, 휘말리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가르바님이 여기 있는 것도, 팔크람이 정착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붉은 갈기 여관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데미앙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여관의 주점쪽 문 앞에 영업을 안한다는 표지가 붙어있었던 것이다. 한창 장사를 해야 할 시간에 영업을 하지 않다니.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미앙의 눈에 테이블에 앉아있는 세 사람을 보였다. 하나는 앉아있는 한 사람의 뒤에 서 있었고 하나는 팔크람이었다. 그리고 팔크람과 마주보며 앉아있는 사람. 큰 키는 아니지만 몸집과 분위기에 강단이 서려있고 코밑 수염을 멋지게 기른 채 후드를 걸치고 있는 남자. 술과 간단한 안주를 놓고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은 모양새.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네. 잠깐 앉아보게."

팔크람의 권유로 데미앙은 테이블 한쪽에 자릴 잡았다.

"소개를 하겠네. 여기는....."
"먼저 술 한 잔 따르게 해주시죠."

데미앙은 술잔을 들어 남자를 보며 내밀었다. 남자가 술잔을 채우며 자기와 시종의 소개를 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칼레아 시장 다이슨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문지기 타레크라고 합니다."

뒤에 서 있는 남자가 꾸벅 목례를 했다. 그 가는 눈을 한 남자의 낯빛에서 데미앙은 적의를 느꼈다.

"반갑습니다. 오늘 성을 한 번 돌아봤는데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더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이야기와 함께 셋은 술잔을 비웠다. 다이슨은 잔을 내려놓고는 급하게, 그러나 성급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400케타 지점에서 훔족의 표식이 발견된 게 어제였습니다."

데미앙과 팔크람은 물론 뒤에 서 있는 타레크도 놀라고 있었다. 과거 3차에 걸친 대륙간 전쟁. 거기에서 훔족의 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엔 없었다. 그것은 선전포고이자 대규모 부대를 통솔하기 위한 훔족 특유의 영역 표시법이라는 것을.

단순히 그 표식을 옮기면 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표식이란 것의 정체를 모른 채 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인간 장정 20여 명이 달라붙어도 꿈쩍하지 않는 거대한 토템폴 같은 것. 그것을 땅 속 깊숙히 박는데, 훔족에게 그 작업은 단지 5명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훔족은 여러모로 상대하기 힘든 존재였다. 거대한 송곳니와 엄니가 교차되고 인간의 2.5배 되는 우람한 몸집에 두려움을 모른 채 북소리에 따라 마치 광신도들의 행진마냥 선두가 넘어져도 그대로 밟아버리고 진군할 정도였다.

그런 종족이 침을 흘리며 단숨에 도약해 올 때의 광경은 보는 인간족에게는 공포스러운 광경 중의 하나였다. 그들에겐 부대라는 개념이 1000명 단위였고, 전술은 오로지 종심돌진 뿐이라는 점도 위협이었다. 종심돌진은 가장 무식한 전법이지만 그 물리적 규모와 그들의 신체능력, 인원 등을 고려하면 무시못할 전법이 되었다. 제노스 제국의 정예부대들조차 몇 번이나 돌파당해버렸던 두려운 전법이었다. 그 전법 때문에 병사 수가 일정 이상 되기 전까지는 절대 대규모 공격을 먼저 해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돌파한 훔족 하전사들은 거의 사람만한 곤봉과 철퇴를 휘둘러 인간들을 으깨놓다시피 해서 진영의 병사들을 전장공포에 질리게 만들기가 일쑤였고, 지휘관들은 몇 번이나 목숨을 내놓으며 선두에서 다시 진영을 갖추게 해야 한다.

그런 훔족이, 칼레아 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2차 도랑 공사도 공기를 앞당긴 상황입니다만, 이 순간에도 50케타 (1.25km)씩 전진하고 있을 겁니다. 시민들에게는 내일 발표할 예정입니다. 방비해둬야 하니까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데미앙은 다이슨의 말을 끊었다.

"전 참전하지 않을 겁니다."

다이슨은 묵묵히 데미앙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정도의 일은 예상했다는 듯한 여유있는 표정으로. 하지만 오히려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은 타레크였다.

"제가 좀 말해도 되겠습니까."

타레크는 그렇게 말한 후 허락이 떨어지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페르마이어님의 사정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페르마이어님께서 친위기사단장직을 물러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요. 누구든 페델리니 총리대신의 그릇된 처사에 관해서는 공감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페르마이어님은 이 제국에 속해있으며 중요한 전력이므로 이번에 공을 세워 돌아가신다면 황제폐하께서도......"
"뻔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데미앙이 또 말을 끊었다.

"토사구팽 꼴을 당한 사람이 또다시 그 꼴을 겪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로 인해 황실, 귀족들의 더러운 이면과 협잡을 숱하게 겪고 봐왔던 내게 다시 이 나라를 위해 싸우라는 말입니까."

데미앙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었다.

"친위기사단장직 박탈로부터 5년. 그 5년을 방랑과 술로 달래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무함을 뭐가 메꿔주겠습니까. 실망에 실망을 시킨 이 제노스 제국에 내가 뭘 해줘야 한다는 말이오!"

데미앙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술병을 잡아 벌컥거리며 마신 후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다신 나에게 그런 얘기 하지 마시오."
"전 해야 겠습니다."

이번엔 다이슨이 나직이 말했다.

"페르마이어경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이 도시는 이주해온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 겨우 일구어놓은 곳입니다. 훔족이 쳐들어온다면 그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겠지요."
"그럼 중앙정부에나 요청해보시오."
"이미 관리와 병사 일단이 출발했습니다."
"그럼 기다리시지요. 그 이전에 훔족이 쳐들어온대도 이 도시를 위해 내가 해줄 것은 없습니다."

데미앙의 단호한 태도에 다이슨은 더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일어나면서 다이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페델리니 총리대신의 사냥개들도 와있다는 걸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마법을 써서 회피하신 것도 들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알아서 할테니 이만 가시죠."

데미앙은 말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휑허니 올라가 버렸고, 타레크는 기가 찬 듯 말했다.

"뭐 저렇게 무례한......"
"됐네. 가세. 팔크람님도 잘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살펴가시오."

팔크람은 다이슨 일행을 보낸 후 여관 문을 닫고 잠시 그 문에 등을 기대었다. 여관을 처음 만들 당시에도 참 어색하고 낮선 공간이었던 느낌. 그것이 그에게 되살아났다. 짧은 한숨을 쉬고, 팔크람은 창고 쪽으로 향했다.

창고의 바닥, 뚜껑을 열어야 나오는 작은 방 정도의 공간에 놔둔 물건을 꺼내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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