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7)

NEOKIDS 작성일 12.04.15 03: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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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들어보려고 했네만, 오늘은 왠지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현자 가르바의 집, 스케루니 전당포에서 데미앙은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보따리를 버리기로 결정한 때에 하필 훔족인가 하는 생각과, 버니와 메리니, 칼레아 시와 다이슨, 사람들의 광경, 페델리니 총리대신,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해보게."

강권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압력이 있는 가르바의 말에 데미앙은 어젯밤 다이슨 시장이 찾아왔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훔족에 관한 일도.

"예상은 했었지만 결국 때가 오고 말았군."

가르바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아주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 가벼움에 데미앙은 놀랐다.

"어떠한 고민도 되시지 않습니까."
"......"

가르바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데미앙을 바라보았다. 내친 김에 데미앙의 입에서 계속해서 말이 쏟아졌다.

"이 제국을 위해서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 도시도 별 다를바 없는 제국의 일부니까요. 제국의 사방을 돌아다니며 내가 이런 인간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도 많이 했고 저 자신이 음모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가 싸워주기를 바랍니다. 그래? 하면서 마음씨 좋게 다시 제국의 깃발을 들 순 없지 않습니까."

가르바는 묵묵히 데미앙의 말을 듣고 있었다. 데미앙의 말이 끊어지고 침묵이 어느 정도 지나간 순간, 가르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랑했던 게로군."
"네?"
"나 역시 자네 같았다네."

가르바는 데미앙과의 얘기를 적기 위해 들고 있던 깃털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스케루니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 그랬다네. 그 시절 나 역시 애국심, 명예, 진실함, 이런 것들에 빠져 살았었지. 그리고 자네와 비슷한 일들을 겪기도 했고."
"그걸 어떻게 이기고 현자의 자리에 오르신 겁니까?"

가르바는 데미앙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현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도 좀 우스운 말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내가 그것들을 버리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네."

데미앙은 그의 말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것들을 버리고서 어떻게 살 수 있었다는 말인가. 누구나 소중히 했던 것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큰 상처임에 틀림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데미앙의 속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가르바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자넨 분명 아직도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게야."
"말씀을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있지 않는데, 그런 것들에 상처받아 자신을 허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르바는 다시 깃털펜을 들고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커다란 원이었다.

"여기 5대륙의 역사를 이끌고 온 거대한 원천을 나는 찾고 있다네. 안간들의 방향성, 다른 종족들이 태어난 이유, 그리고 항상 전쟁과 수많은 체제들이 생겨나는 이유들. 거기에 어떠한 의지가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그 물음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네. 의지 따윈 없다고 일축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도 그 의지가 없다는 확실한 부정을 할 순 없었지. 그런 큰 그림을 보고 있자면, 다른 모든 것들이 보이게 되는 법이지. 그것들이 허상이고,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현실이라 믿으며 움직이게 되는 이유를."

가르바는 데미앙의 두 손을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어떠한 열쇠가 될 수 있다네. 자네의 마법 운용력의 특이점을 탐구해보려는 이유도 그런 것이지. 흑마법과 백마법은 운용의 기본부터가 틀린 바탕을 두고 있네. 그럼에도 자넨 그 두 가지를 자네 안에서 모두 운용할 수 있지. 그 말은 원래부터 흑마법과 백마법의 원류라는 것이, 갈라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 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가능하게 하는게야. 이 돌고 도는 원처럼. 그렇다면 이 원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그 의지이며 힘이라는 것이지. 거기에 다가가는 길은, 애국심이나 명예 같은 허상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게 또한 내 생각일세."

가르바는 한숨을 훅 내쉬고는 데미앙의 손을 놓았다.

"아직은 이론에 불과할 뿐이지만, 늙은이가 너무 어려운 얘길 늘어놓았군."
"아닙니다. 저로선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는 알 수 있게 되겠지요."
"그나저나 오늘은 자네에게서 얘길 듣기는 글러버린 것 같군."
"예?"

가르바는 일어서서 방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다이슨이 오늘 중앙광장에서 중대발표를 한다는군. 아마도 자네가 내게 전해준 그 훔족에 관한 이야기겠지. 거기 가보게."
"가르바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내 처신에 무슨 중요한 게 있겠나."

가르바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자네가 버려야 될 것들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데미앙이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시민들이 시장의 발표를 들으러 나온 상태였다. 둥그런 형태의 광장은 소리의 반향을 고려하여 설계된 곳이기도 했다. 서로들 수군거리는 모습 속에는 이미 훔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듯한 눈치도 섞여 있었다.

곧바로 다이슨이 단상에 등장했고, 데미앙과 시민들은 모두 정숙했다.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다이슨의 목소리는 힘이 있으나 낮게 깔렸다.

"척후병들의 보고로 훔족의 동태가 파악되었습니다. 현재 300케타 가까이 표지를 세웠고 현재 칼레아 시로 진격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절망의 탄식, 울부짖음, 혼란의 웅성거림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광장을 불안의 기운으로 가득 물들였다. 다이슨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손을 들어 군중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고요가 찾아오자 다이슨은 입을 열었다.

"관리와 병사 일단이 지원군 요청을 위해 제국 수도로 향했습니다. 최대한 빠른 파발 쪽으로 연락을 취하는 중이기에 전갈은 수도로 먼저 가게 될 겁니다. 또한 그동안 공사중이던 2차 도랑도 그들이 오기 전에 완공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릴 도와줄 것 같습니까?"

군중 속의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반쯤은 불신과 의혹을 지울 수 없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도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현재 지형상으로 우리 칼레아 시를 통과하게 되면 제국 수도까지 큰 대군을 만나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공격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보다 큰 문제는......"

다이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원군이 오기 전에 훔족과 싸워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보다 더 위험한 기운의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개중에는 다이슨을 향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도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시장으로 뽑아줬으면 그런 일을 잘 해야지!"

금방 폭동이라도 터질 듯한 기운 속에서 다이슨은 다시 손바닥을 편 두 팔을 높이 들었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말했다.

"여러분. 들어주십시오."

다이슨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잠시 사람들은 그 때를 떠올려 보는 듯 했다. 유년시절에 온 자, 와서 장년이 된 자, 그리고 노인이 된 자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인생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10여 년의 그 시간들을.

"아무 것도 없어 보이던 땅에서, 아침마다 떠오르는 카나이 산맥의 아름다운 햇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희망을 일구었고, 지금 이렇게 칼레아 시를 만들었습니다. 방패도시라는 말에도, 수많은 어려움에도 우리는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꾸려왔고 이만큼 키워 놓았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 모든 일을 해낸 것입니까!"
"우리 모두요!"
"맞습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그런데 훔족의 침략에 모든 것을 내주고 다시 아무것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겠습니까? 제국 중앙의 견제조차도 코웃음쳤던 우리가, 단지 저 괴물들의 힘에 굴복하며 우리가 이뤘던 모든 것을 내주어야 맞는 것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소!"
"맞서 싸웁시다!"

군중들의 맞장구와 흥분도 같이 고조되는 가운데 다이슨은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맞서 싸워,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고 정복해 나갈 것입니다!!!!"

군중들의 함성이 폭발하며 다이슨과 칼레아를 연호했다. 벌써 칼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팔을 들어 내두르면서.

데미앙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다이슨의 연설은 제국의 황제가 마지막 진군 직전 한 연설보다는 덜 웅장하기도 하고, 논지의 흐름도 유약했다. 하지만 어쨌든 연설은 성공적인 셈이었다.

흥분에 휩싸인 군중의 모습을 포함해, 모든 것들을 돌아보며 데미앙은 가르바가 말한 '버려야 할 것'이란 놈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허나 데미앙은 그 느낌을 애써 지웠다. 아직은, 어떠한 확신도 들지 읺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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